April 9, 2023

“이제 내가 사는 것은” (The Life I Now Live)

Preacher:
Series:
Passage: 갈라디아서 (Galatians) 2:20
Service Type:

“이제 내가 사는 것은

(The Life I Now Live)

4-9-23

본문말씀: 갈라디아서 (Galatians) 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설교 요약]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입니다. 주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He is risen!)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죽은 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지난 주에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셨는가?’에 대해 살펴본데 이어, 이번 주는 ‘그리스도 부활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묵상해 보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베드로의 외식>을 사도 바울은 <갈. 2:11-16>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지는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과거 유대전통에 속한 율법의 요구를 따라 행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와 같은 ‘베드로의 영적 연약’을 지적하는 이유는 자신이 ‘율법에 대하여는 죽었고, 하나님에 대해 살고자 한다’고 고백을 가고자 함입니다 (갈.2:19).

그럼으로 <갈라디아서 2:20>의 본문말씀을 통해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살게 되는 성도의 믿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자신의 고백을 통해 밝혀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v. 20)라고.

그렇다면 무엇이 사도 바울의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뜻일까요? 그것은

첫째,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지난 날의 삶은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목 박히고, 그분의 부활과 함께 그분의 생명으로 살게 되었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바로 죄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둘째, ‘율법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 살았다’는 뜻입니다: 사도가 여기서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언하는 것은 ‘율법폐지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주의’와 ‘율법폐지론’ 이 양극단은 모두 위험합니다. 오직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아 순종하는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6)라고 바울은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함의 의미를 밝힙니다. 이 연합은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통해 육신과 죄와 사단 마귀와 싸워 승리하는 연합이요, 그리스도를 머리로 서로 사랑하고 함께 세워져 나가는 연합’입니다.

주님 다시 뵐 때까지 그분의 성령의 능력으로 인하여 죄와 사망을 이기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주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He is risen!)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죽은 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부활절은 크리스마스보다 더 우리가 더욱 기념하고 기뻐할 날이요! 승리의 날이 바로 부활절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첫번째 부활절 메시지로써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셨는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목박혀 죽으심으로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구원 얻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권세를 얻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계획과 역사가 영광스러운 것은 그 계획의 시작이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창조 되기도 전에,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에’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는 사실 (엡. 1:4-5)은 ‘범죄하기 전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완전한 창조 상태와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의 의미는 우리 거듭난 성도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늘에 속한 모든 것을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으로 우리가 누리게 하셨다 (엡. 1:3)고 사도 바울이 선언하는 이 엄청난 존재가 바로 우리 구원받은 성도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수 있을 것인가가 매우 중요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은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승리의 부활절을 맞아 주께서 사망을 이기고 다신 사신 부활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묵상하기 원합니다. 특별히 우리 구원받은 성도의 삶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떠한 가치와 영향력을 끼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사도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내는 그의 첫번째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부활장>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온 결과가 무엇인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0)라고. 그렇다면, 여기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는 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대표해서 가장 첫번째로 다시 살아나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성도들 또한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다시 살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2)고 선언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첫 사람 아담은 그의 범죄함으로 인하여 그에게서 태어나게 될 모든 그의 후손을 죽게 만들었지만,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십자가 대속죽음과 부활하심>으로 잠자는 모든 자의 첫 열매가 되셔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생명의 삶을 얻도록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간결하게 확인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다 준 결과 (=열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통하여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는 분이심을 증명하였고, 우리도 그분처럼 육체로 부활함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한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제가 부활절 예배의 본문말씀으로 오늘 <갈. 2:20>말씀을 정한 것은 ‘무엇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가져다 준 성도의 삶의 핵심인가?’ 하는 점을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절을 맞아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심을 기념하며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만약 부활절 예배가 끝난 다음 우리 각자의 삶이 종전처럼 주님의 부활과 무관한 삶을 산다면 그것은 주께서 주신 부활의 능력을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갈라디아서> 본문말씀의 배경에 대해서 잠깐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가 편지하는 갈라디아 교회는 그가 1차 전도여행 중에 세운 교회의 하나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게 된 동기는 쓰게 된 동기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잘못된 신앙생활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 가운데 가만히 들어온 거짓교사들이 잘못된 가르침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잘못된 가르침의 핵심은 <거짓복음>이요, 이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율법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거짓되게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구체적인 예로서 ‘육체의 할례’를 행하고자 하는 유대교 전통에 배경을 둔 거짓교사들의 잘못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는 <베드로의 외식>을 바울이 책망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율법으로 의로와지는 것이 아니다’고 말은 하면서도, 행동은 반대로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교회 지도자였던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 크리스챤들이 방문했을 때,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식사하다가 갑자기 당황하며 그 자리를 급히 피해 나가 버렸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의 경우,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그들의 율법에 따라 부정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베드로는 말과 행동이 서로 다른 외식을 그 순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바울은 이것을 분명하게 책망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행동은 성도의 믿음에 있어서 매우 잘못된 동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 앞에서 <베드로의 외식> (위선)을 예로 들면서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강력히 주장하는 것은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율법에 속한 자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니라” (갈. 2:19)라고. 그러면 율법이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율법은 지극히 선한 것이며,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 것입니까? 문제는 우리 속에 있는 육신에 속한 것 (죄/자아)이 우리를 속이고, 선한 율법을 통하여 도리어 범죄하는 도구로 악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 하냐구요?! 물론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유대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책망과 도전하셨던 핵심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자랑하고, 사랑하고, 지킨다고 하면서 정작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림으로 형제를 미워하고 생명을 죽이는데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 하노니,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16-17)고 사도 바울은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가 선한 율법을 이용하여 범죄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갈라디아서 2:20>의 오늘 본문말씀은 사도 바울의 믿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자신의 고백을 통해 잘 나타내 주는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v. 20)라고. 여기서 무엇이 사도 바울의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뜻일까요? 그것은

첫째,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지난 날의 삶은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목 박히고, 그분의 부활과 함께 그분의 생명으로 살게 되었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기록뿐 아니라, 기독교 교회사의 전해지는 문헌을 통해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이후, 완전히 변화된 새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가 매우 실천력이 있고, 한번 마음먹으면 행하고야 마는 의지가 굳은 인물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골고다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죽은지 3일만에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참되게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생명으로 다시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바울의 진실한 고백은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v.20a)는 것입니다. 과거의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율법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 살았다’는 뜻입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과거 바리새인과 같이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되고자 하는 자들, 아니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스스로의 행위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율법주의자들의 잘못된 노력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사도는 고발합니다. 그럼으로 이제 자신은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 감각하지 못하듯, 율법에 대해 그렇게 전혀 감각하지 못하는 죽은 자가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율법주의> 곧 <행위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것>은 과거 유대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도 여전히 열심 있는 우리 크리스챤들 사이에 팽배해 있는 이슈라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지금 ‘율법 페지론’ 즉 ‘율법을 안지켜도 좋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도 기억하시듯이,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막. 5:17)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주의’와 ‘율법폐지론’ 이 양극단 모두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율법의 행위에 얽매이지 않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아 나감으로 그분의 뜻에 순종할 수 있을 것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결국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대해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해 살았다’는 의미는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셋째,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그분과 함께 연합한다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 (롬. 6:6,11)라고. 잘못하다 보면,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의 상징과 비유 혹은 비현실적인 교훈으로 끝나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말씀을 통하여 제가 깨닫고 도전받게 되는 것은 언제나 사도의 결론은 우리 성도의 삶속에서의 구체적인 적용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살리는 능력임을 믿는다면, 이제 그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우리 각자가 그것을 삶 속에서 증명해야 한다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주께서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밝히셨듯이, 우리 성도는 주님으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더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은 단지 구원을 얻었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 내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하심으로 풍성한 열매를 날마다 맺어 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그것이 우리의 육신과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육신에 거하는 죄와 악한 영 사단 마귀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된 우리 성도가 함께 연합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힘주고, 사랑으로 세워줌으로 함께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허락하신 능력이요, 그분과 연합함으로 살아가게 되는 성도의 삶의 모습 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을 대하여 살았다”는 뜻임을 저는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천여년 전 오늘 새벽 주님의 시신을 두었던 돌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 무덤을 막고 있던 큰 돌은 옮겨져 있었고, 그 무덤 안은 비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고자 무덤에 왔던 두 신실한 세여인들은 그 광경을 보고 두려움과 놀라움에 떨고 있을 때, 흰옷입은 두 천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주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 (눅. 24:5-6)라고. 우리는 지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라기는 2천여년전, 오늘 이 새벽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주님 다시 뵐 때까지 그분의 성령의 능력으로 인하여 죄와 사망을 이기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