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16, 2023

“영원한 즐거움” (The Eternal Pleasures)

Preacher:
Series:
Passage: 시편 (Psalms) 16:11
Service Type:

“영원한 즐거움”

(The Eternal Pleasures)

4-16-23

본문말씀: 시편 (Psalms) 16:11

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You have made known to me the path of life; you will fill me with joy in your presence, with eternal pleasures at your right hand.)

[설교 요약]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의 대표적인 리더의 한 사람인 ‘존 파이퍼’ 목사는 ‘크리스챤 희락주의’ (Christian Hedoism)라는 그의 신학사상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크리스챤 희락주의’를 한문장으로 요약할 때,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영광 받으신다> (God is most glorified in us when we are most satisfied in Him)고 정의했습니다.

제가 이해할 때, “우리 크리스챤 삶의 핵심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분을 향한 순전한 즐거움과 만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인간의 진정한 즐거움’이 하나되는 관계를 잘 밝혀주는 말씀이 오늘 본문 <시. 16:11>말씀입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고난과 생명의 위협 가운데 지은 찬양의 시입니다.

한편, <시편 16편>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예언한 시편으로도 유명합니다.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시.16:10; 행. 2:27)라고 다윗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오실 메시야의 고난과 부활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와 같이 다윗의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통해 구원받은 성도가 누리게 되는 크나큰 축복이 무엇인지를 그는 영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충만한 기쁨’ (filled with joy)과 ‘영원한 즐거움’ (eternal pleasures)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영원한 즐거움”을 묵상하는 가운데 <창. 32장>의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밤새도록 어떤 사람과 씨름’하는 사건을 떠올렸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신비로운 사건을 통해 야곱은 이스라엘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를 ‘움켜잡고 빼앗는 자’, 야곱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하나님의 황태자), 이스라엘로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영원토록 함께 하심을 깨닫고 경험하는 진정한 축복입니다.

이런 야곱의 ‘얍복강의 사건’과 오늘 본문에서 다윗의 고백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상급이요 축복 되심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시. 16:2)라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까? 다윗이 고백하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을 누립니까? 바라기는 어떤 상황과 형편 가운데서도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기쁨과 즐거움이 흘러 넘치나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예수님을 주로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고 믿는 우리 크리스챤들 중에서도 적지 않게 많은 성도들이 힘들어하고 고통받는 것 중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영적 안정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어떤 주어진 현실 상황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확신> 그리고 그 구원을 주신 하나님으로 인해 현재 내 삶의 현장이 두렵고 겁나지 않는다는 <평화로운 영적 상태>인 것입니다. 오늘 다윗은 이렇게 그가 누리는 영적 안정감과 마음의 기쁨을 고백합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v. 11)라고. 이런 넘치는 믿음의 감격과 은혜가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길 소망합니다.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의 대표적인 리더의 한 사람인 ‘존 파이퍼’ 목사는 ‘크리스챤 희락주의’ (Christian Hedoism)라는 그의 신학으로 인해 또한 유명한 목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크리스챤 희락주의’일까요? 그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영광 받으신다> (God is most glorified in us when we are most satisfied in Him)는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파이퍼 목사가 ‘크리스챤 희락주의’라는 신학을 통하여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요점은 “우리 크리스챤 삶의 핵심은 ‘기쁨과 만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과 만족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과 만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만 주실 수 있는 충만한 기쁨이요, 영원한 즐거움인 것입니다. 요점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간다고 하면서, 이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과 즐거움을 삶 가운데서 누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 정의하듯이 ‘인간의 근본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인데’ 이런 인간의 근본적인 목적조차도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힘겨운 의무감’이나 ‘무거운 짐’에서 출발한다면 결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것임을 저는 이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역설적이지만 그분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지 않을 때, 우리 인간은 결코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없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로 즐거워할 때 하나님은 가장 크게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게 될 때, 우리는 더욱 그분을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존재 안에 가장 깊이 뿌리 박고 있는 <영적 원리>이자,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인간의 근본적인 기쁨과 만족>이 비례해서 커져가는 영적인 ‘선순환의 논리’가 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인간의 진정한 즐거움’이 하나되는 관계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밝혀주는 말씀의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 <시. 16:11>의 말씀이라 저는 믿습니다. 이 시편 16편은 <다윗의 믹담>이라는 부제가 붙은 시편입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지은 시편으로써, ‘믹담’ 곧 ‘금언, 황금’이라는 의미를 지닌 정도의 주옥과도 같은 ‘믹담’이라는 이름이 붙은 시편인 것입니다. 총 <150편>의 시편 가운데서도 오늘 본문이 포함된 <시편 16편>과 <56~60편>인 총 6편만이 바로 다윗의 ‘믹담’ 시편입니다. ‘존젭’ (John Jebb)은 그의 ‘시편해설집’에서 “다윗의 시가 노래할만한 상황에서 지어진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 지어졌다는 것이 놀랍다. 그의 찬양의 근원은 그와 같은 고난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었다”라고 기술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시. 16편>이 유명한 것은 다윗이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오실 메시야, 즉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예언한 시편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바로 오늘 본문의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여 이 글이 장차 오실 메시야의 부활을 예언한 시편임을 이렇게 잘 증언했습니다.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행. 2:25~27)라고. 그는 계속해서 시편의 말씀을 풀어 설명하기를,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 2:29~32)라는 것입니다. 다윗 자신조차도 이런 자신의 찬송의 시가 이 땅에 오실 메시야를 예언의 말씀이 되었을 것이라 고는 아마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오늘 본문을 비롯해서 시편에서 다윗이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으로 인정받는 대부분의 말씀의 공동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매우 혹독한 시련과 고통 가운데서 지은 시편’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이 포함된 <시. 16편>도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v.1)라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정확히 다윗이 이 당시 어떤 육체적인 위협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시달렸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손이 그를 지켜주시고, 그분의 크신 팔에 피신할 수 있기를 간절히 구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의 목숨이 죽음과 손바닥만 한 거리에 있는 절대절명의 상황 속에서 그가 하나님께 아뢰고 있음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사실은 그가 성령의 감동을 통해 그 혹독한 생명의 위협 가운데서도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v.9)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그 불 같은 고난의 풀무불에서 연단하심으로 없어지지 않을 정금과 같이 그를 단련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럼으로 그는 순전한 믿음의 즐거운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와 같이 다윗의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통해 구원받은 성도가 누리게 되는 크나큰 축복이 무엇인지를 그는 영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충만한 기쁨’ (filled with joy)과 ‘영원한 즐거움’ (eternal pleasures)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영적 안정감’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결코 우리가 쟁취하여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신뢰하며 그분께 자신의 인생을 맡긴 자에게 주시는 선물임을 저는 깨닫게 됩니다. 다윗은 이런 하나님의 복되신 선물에 감격하며,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v.2)라고 아뢰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고백하는 “영원한 즐거움”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하고 자문해 봅니다. 그리고 이것을 묵상하는 가운데 제가 이해하기로는 성경 말씀 가운데 가장 신비롭고 하나님의 축복의 본질을 잘 묘사한 창세기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그것은 <창. 32장>말씀인데,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어떤 사람과 밤새도록 씨름’하는 장면입니다. 성경은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밤을 온종일 새면서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했고, 하나님께서 날이 밝음으로 떠나려 할때, 그는 만약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 32:26) 라고 매달립니다.

그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 주셨습니다. 속이고 빼앗는 자 ‘야곱’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하나님의 황태자) ‘이스라엘’로 바꿔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놀랍고 신비한 것은 표면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행하신 것은 단지 “이름 바꿔 주신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볼 때는 하나님께서 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셨고, 축복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그것은 야곱이 다음날 형 에서를 만났을 때 그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 잘 알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형 에서를 속이거나 빼앗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한편 형 에서를 두려워하고 도망치고자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 하심이니이다” (창. 33:10)고 형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결코 아부성 발언이나, 당장 위기를 모면하려는 얄팍한 술책이 아닙니다. 그의 내면에서부터의 본질적인 변화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창. 33:1~11).

저는 이런 야곱의 <얍복 강가의 사건>, 즉 ‘하나님께서 야곱과 그 밤이 새도록 그 치열한 씨름 가운데 만나주신 사건>이 우리 인간의 진정한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나를 만나주시고, 아니 절대절명의 위기 가운데 나를 만나주시고, 나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시고, 영원토록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 자신이 우리 인간의 ‘참된 축복’인 것입니다. 바로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 선하신 임마누엘 하나님이 날이 새면 형 에서의 손에 죽게 될 절대절명의 상황 가운데 야곱을 만나 주셨고, 그와 함께 하신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이 영원하신 임마누엘 하나님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며 고통 가운데 신음하던 다윗을 만나 주셨고, 그를 성령으로 감싸주심으로 함께 동거하신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다윗이 <시편 16편>에서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v.2)라고 하나님이 자신의 ‘유업이요, 상급이요, 참된 축복’임을 고백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그토록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그 어떤 여러분의 소유나, 행위나, 수고로이 획득한 그 무엇이 아니라, 여러분을 구원하실 뿐 아니라, 영원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진정한 여러분의 복이심을 고백하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까? 바로 오늘 다윗이 고백하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입니다. 어떤 생명의 위협과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를 성령 싸개로 안전히 둘러쳐 주시는 ‘평화와 만족’의 즐거움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과 같이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속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합. 3:17~18)는 것입니다. 그 어떤 상황과 형편 가운데서도 여러분을 떠나지도 않으시고, 버리지도 않으시는 이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로 인하여 날마다 순간마다 감사와 기쁨, 만족과 평화가 강같이 흘러 넘치나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