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23, 2023

“네가 낫고자 하느냐” (Do You Want To Be Healed?)

Preacher:
Passage: 요한복음 (John) 5:6~9
Service Type:

“네가 낫고자 하느냐”

(Do You Want To Be Healed?)

4-18-23

본문말씀: 요한복음 (John) 5:6~9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널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설교 요약]

            우리 주 예수께서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가셨고, ‘양문’ (Sheep gate)라 불리는 성문 근체에 ‘베데스다’ 못 가를 들르셨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38년된 병자’를 보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묻으셨고, 그분의 신적 권능으로 그를 치유하셨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씀하셨고, 그는 즉시 일어나서 자신이 누웠던 자리를 들고 걸어갔던 것입니다 (v.8-9). 이런 오랜 세월동안 병마에 시달리던 한 사람을 그분의 긍휼하심으로 치유하실 수 있는 주님이심을 우리가 믿는다면,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무엇이 우리가 예수님께 치유함을 받는다는 뜻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핵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첫째,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실 38년된 병자는 주께서 그를 고쳐 주셨을 때, 주님이 누구신지 조차 몰랐습니다 (v.12-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그를 회복시켜 주셨다면, 그의 피로 값주고 사신 그의 제자된 우리 성도는 어떻겠느냐 는 것입니다. 왜 치유하여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선하신 주님을 우리는 신뢰합니까?

둘째, “병으로부터 자유케 됨”을 의미합니다: 병의 원인은 ‘죄’로 인하기도 하지만 (v.14), 그 외에도 다양한 이유가 있습니다 (요. 9:3) 그리고 ‘병’이라는 것도 육신의 병 뿐 아니라, ‘마음의 상처와 고통 그리고 영적인 혼돈’의 병도 포함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께서는 우리의 이 모든 병으로부터 우리를 전인격적으로 자유케 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자녀로서 권세를 누리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축복은 천국의 소망과 함께 풍성한 삶입니다. 주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풍성한 삶’은 곧 물질적 풍요만이 아니라, 육신의 건강함, 그리고 모든 정신의 상처와 영적 혼란으로부터 회복되어 강건해지는 풍요를 뜻합니다. 이것이 주께서 약속하신 자녀의 권세요, 특권임을 믿습니다.

바라기는 이런 신실하신 주님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몸과 영혼의 참된 만족과 치유의 놀라운 은혜를 풍성히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제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우리 인간에 대해 이해하게 되는 것은 밖으로 드러난 것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외적으로 볼 때는 멋지고, 스마트하고, 남의 부러움을 모두 살만큼 좋은 조건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에게 다가가면 갈수록 그 사람의 깊은 내면에 감쳐진 정신적인 상처나 영적인 고통이 뿌리박고 있음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인간의 삶은 복잡미묘 하다고도 말할 수 있고, 밖으로 드러난 것만으로 판단할 수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38년된 병으로 인하여 걷지 못하고 깊은 실의에 놓인 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만약 주께서 이렇게 성도 여러분에게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시는 사건과 관련된 말씀이 <요한복음 5장 1~1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요. 5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v.1)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예수님이 사셨던 곳은 갈릴리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구약의 규례에 따라 유대인의 중요 절기에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이런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셨기에 <1절>에서 보듯이 유대인의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자들은 여기에서 요한이 언급한 ‘명절’은 바로 ‘유월절’이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사건이 벌어지는 곳은 예루살렘,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는 곳 입니다. 여기서, <베데스다>라는 뜻은 “은혜의 집”이라는 의미인데 바로 그 못 주위에서 오늘의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연못 이름에서 암시하듯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이 못에서 이루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못 곁에 행각 다섯채가 있는데, 그 안에 세상의 다양한 병마로 고통받는 장애인들이 상시로 기다리고 있다가, ‘주의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을 때 맨 먼저 그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기 때문’이라고 요한은 이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v.2-4). 그럼으로 그 행각에는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자 등이 가득이 모여 그 때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 그 여러 병자들 가운데 한 명을 예수님은 주목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떤 상태에 놓였는지는 오늘 본문 바로 앞절에서 한마디로 설명합니다. “거기 삼십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v. 5)라고. 그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수 없지만, 38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이 사람은 제대로 몸조차 가눌수 없는 비참한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바로 주목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셨음)” (v.6a)니다. 왜 주님은 이 사람을 주목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그곳에 모인 그 어떤 사람보다도 이 사람은 심각한 병마에 시달렸기 때문이요, 한 눈에 보기에도 그의 상태는 비참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몸과 영혼의 진정한 치료자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 누구보다 심각한 병마에 고통받는 자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심을 당연하기까지 느껴집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그의 상태를 보시고 이렇게 그에게 묻으시는 것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v.6b)라고. 어떻게 보면 상당히 의야스런 질문이 아닌가 하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린 사람이 어찌 병이 낫기를 원치 않을까? 하는 것이고, 또한 낫기를 원치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이 행각에 와 있었을까? 라는 상식적인 반문을 해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뿐 아니라 다른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은 그의 치유의 권능을 행하시기 전에 언제나 먼저 그 당사자의 낫고자 하는 소망과 의지가 있는지를 묻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가 얘기하지 않아도 내 깊은 마음의 생각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역사는 결코 그렇게 나의 동의없이 일방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 자신의 입술로 우리의 병든 몸과 마음과 영혼의 상처와 고통이 회복되기를 원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고백과 의지 (=소망)을 듣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관심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 자에게 주의 치유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38년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질문에 담긴 의미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이런 주님의 질문에 대해 그는 직접적인 대답 대신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가나이다” (v.7)라고 답합니다. 이런 그의 답변에는 “주님,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한번도 낫고자 하는 희망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이런 형편없는 몸의 상태라 할찌라도 그동안 포기치 않고, 물이 동할 때 가장 먼저 못에 들어가고자 한 적이 몇 번인지 알 수 없습니다?!”라는 그의 항변이 깔려 있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가 이런 힘든 여건 속에서도 낫고자 하는 희망과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럽고 좋은 일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하소연하듯 ‘물이 동할 때에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음으로, 안간힘을 다해 마비된 몸을 이끌고 못으로 가까이 가기도 전에 이미 그 누군가가 먼저 도착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낫기를 원할 뿐 아니라, 온 힘을 다해 그렇게 노력하지만 결코 1등으로 못에 도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1등만이 살아남는 오늘날 현대사회의 치열한 경쟁논리의 단면을 보는 듯합니다. 요즘보면, 세간에 유행하는 ‘서바이벌’게임을 연상케 하는데 여러분이 잘 아시듯, 그 서바이벌 게임의 장르는 상당히 다양한데 ‘음악’, ‘요리’ 혹은 ‘탤런트’등의 각 분야별 경쟁 프로그램들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전에는 ‘넷플릭스’에서 상영한 한국드라마로 전세계적인 대박을 터트린 ‘오징어 게임’에 이르기까지 오직 1등만이 살아남고, 최후의 승자만이 인기와 부를 누리는 서바이벌 게임 프로그램은 오늘날의 승자독식의 냉정한 경쟁사회를 잘 상징하듯, 오늘 본문의 ‘베데스다’ 못 가의 풍경도 시대와 민족을 초월한 1등 독식의 단면을 잘 고발하는 듯합니다. 한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그곳의 이름은 ‘베데스다’ 곧 ‘자비의 집’이지만, 실제는 ‘무자비와 냉혹한 논리가 지배하는 집’인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그의 넉두리와 같은 말을 들으시고 나서 그를 향해 놀라운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v.8)라고. 그리고 그 사람은 즉시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걷었습니다. 주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으로 치유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권능의 치유의 사건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오랫동안 병마로 시달리던 한 남자가 한 순간에 깨끗이 낫은 기적의 치유사건도 놀랍지만, 이 사건이 우리 각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 보는 것이 더욱 의미있고 중요한 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여러분께 질문했듯이, “만약 주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묻으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응답을 하시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질문을 통해 과연 무엇이 예수님으로부터 치유함을 받는다는 뜻인지?에 대해 이해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영육간에 건강한 크리스챤이 되는 복된 삶을 살게 되는 핵심이 되기 때문임을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첫째,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 몸의 질병과 마음의 고통과 상처, 그리고 영적 침체로부터 건져 주실 수 있는 사랑과 권능의 주님이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께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행하신 그 온전케 하시는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성경에서만 나타나는 나와는 무관한 사건이 아니라, 바로 현재 지금도 주님의 제자된 우리 각자가 그분을 믿고 따름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치유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의 ‘38년된 병자’가 나은 사건과 우리 크리스챤 성도들의 주님과의 관계와는 매우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존 맥아더’ 목사는 그의 ‘요한복음 강해’ 설교에서 이점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병자의 경우 예수께서 그의 병을 치유해 주실 때 그는 주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묻으셨을 때, 그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고사하고 라도 그분이 누구신지 조차도 알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뒤에 보면 그가 안식일에 병이 낫게 되었음을 알고, 유대인들이 그를 추궁하며 “네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v.12)라고 묻었지만 그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v.13)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예수님을 성전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을 낫게 해 주신 분이 예수님 이신 것을 알게 되었음을 요한은 밝히고 있습니다 (v.14-15).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점은, 예수님은 주님 자신이 누군지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자에게 조차도 그분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따라 놀라운 권능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가 낫고자 하는 소망과 의지만을 확인하고서 말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물며 우리 주님의 제자된 우리는 어떨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주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자신과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은 그의 제자된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은 ‘과연 주께서 여러분의 그 어떤 상처와 고통, 그리고 아픔과 병마도 넉넉히 치유케 하실수 있는 권능의 주님이시요, 또한 치유하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이심을 참으로 신뢰하십니까?

둘째, “병으로부터 자유케 됨”을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우리의 병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한가지 주목할 사실은 오늘 본문에서 38년된 병에서 자유함을 받은 사람의 경우, 그 병의 원인은 ‘그의 죄’ 때문임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 치유함 받은 자는 주께서 다시 그를 성전에서 만나셔서 그에게 말씀하실 때까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조차도 알지 못했는데, 주님은 그에게 이런 의미심장한 경계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v.14)라고. 사실 우리는 더 이상 구체적으로 그가 과거 어떤 구체적인 죄를 범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경우는 그 육신의 병이 그의 죄로 기인함 임을 주님은 분명히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의 육신의 병과 마음의 고통이 반드시 죄로 인한 결과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듯이, 주의 제자들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과 마주치고 나서 예수님께 ‘그가 소경된 것이 그의 죄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입니까? 라고 주께 질문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대인들은 모든 육신의 병은 죄로 기인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 9:3)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나서, 그 눈을 주님의 권능으로 또한 치유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병들게 하는 요인은 매우 다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오늘 본문의 받은 자처럼 죄로 인하여, 때로는 우리 각자가 성장환경이나 선천적인 몸의 컨디션에서 비롯되는 가하면, 혹은 헛된 가치관과 우리의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기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크리스챤이 이해해야 하는 것은 우리를 병들게 하는 요인은 매우 다양할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우리를 얽매게 하고 고통에 처하게 하는 육신의 병마와 마음과 영의 상처와 고통에서 우리 각자는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세로 그 온전치 못한 병에서 자유케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끝으로 이런 자유함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셋째, “하나님의 자녀로서 권세를 누리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 성도의 삶은 한두 가지로 평가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축복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분명히 밝히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I am come that they might have life, and that they might have it more abundantly.) (요. 10:10)고.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실 뿐 아니라, 더 풍성한 삶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그동안 여러 번 성도 여러분과 생각해 보았지만, 무엇이 풍성한 삶일까요?

저는 이 풍성한 삶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것과 같이 우리 주를 믿는 자가 예수님을 통해 받게 되는 ‘치유함’이요, 그로인한 ‘온전케 되어지는 삶’이라고 믿습니다. 어떤 물질의 풍요만이 아니라, 육신적인, 정신적인 그리고 영적인 전인격적인 풍요함 입니다. 주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병든 우리 육신을 깨끗케 회복시켜 주시고, 우리가 자라온 환경으로 인해 받게 된 상처와 고통, 그리고 우리의 죄악된 자아로 말미암아 여전히 참된 평화와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임하는 참된 회복과 만족의 풍요함 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권세요, 주께서 약속하신 풍성함, 곧 세상이 줄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주님의 기쁨과 만족의 풍성함 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이 땅에서 소위 ‘베데스다’라 이름하는 자비의 집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고 병든 몸을 이끌고 몰려듭니다. 그러나 이들이 경험하는 것은 자비가 아니라 무자비를, 쉼이 아닌 끊임없는 염려와 불안만을 경험합니다. 평화와 안식을 기대했지만, 남는 것은 경쟁과 패배와 허무만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이 없는 곳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자비와 진정한 만족의 치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만이 우리의 병든 몸과 마음을 치유하시고, 팜된 풍성한 삶을 허락하심을 믿습니다. 바라기는 이런 신실하신 주님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몸과 영혼의 참된 만족과 치유의 놀라운 역사를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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