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26, 2023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Whoever Wants To Be First)

Preacher:
Series: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20:26~28
Service Type: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Whoever Wants To Be First)

3-26-23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20:26-28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Not so with you. Instead, whoever wants to become great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must be your slave--)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just as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설교 요약]

예수님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의미있는 삶이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인지 하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v.26)고.

세상논리는 높이 올라간 자가 군림하고 낮은 자는 높은 자를 섬겨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주님은 반대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는 사건이 본문 앞 <20-25절>에서 발생합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이 서로 주님 가까이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언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와중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v.27)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뜻일까요? 그것은

첫째, ‘종의 낮아짐은 실력이 아니라 자세’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이해하는 것은 ‘낮아짐은 실력이 아니라, 자세’라는 것입니다. 마치 다윗이 일평생 ‘손의 공교함’으로 실력을 기르고, ‘마음의 성실함’으로 백성들을 섬겼던 것처럼 낮아짐은 자세인 것입니다 (시.78:72).

둘째,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으뜸이 되지 말라!’라고 말씀하지 않고,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한다면”이라고 말씀하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v.27). 중요한 것은 무엇이 <으뜸의 삶>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셋째, ‘주님 자신의 십자가 죽으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 종의 섬김인지를 자신의 죽음을 통해 가르쳐 주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v.28)라고.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의 남은 삶이 주께서 보여주신 본을 따라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서로 사랑으로 섬기는 복된 삶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마. 16:24-25).

[설교 전문]

            예수님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의미있는 삶이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인지 하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v.27)고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관심 받고, 찬사와 높임을 받는 삶은 우리 모든 인간이 본성적으로 추구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세상논리는 높이 올라간 자가 군림하고 낮은 자는 높은 자를 섬겨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주님은 반대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너희는 그렇치 않다’고 말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된 삶의 가치관은 그것과 전혀 다르다고 우리에게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세상이 줄 수도 없고, 깨닫지도 못하는 <천국의 큰자>로써 이 땅에서 겸손히 섬기며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포함된 <마. 20장>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천국의 임금계산법’에 대해 설명하심으로 시작합니다. 소위 <포도원 품꾼>으로 일컬어지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 비유 말씀을 통해 ‘포도원 품꾼’ 즉 ‘천국의 일꾼’된 우리 주님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바른 자세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십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그분의 선한 뜻을 따라 각자에게 넘치게 나눠 주시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왜 저에게는 이것 밖에는 주시지 않습니까?”라고 불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우리가 망각할 때, 우리는 내가 일한 행위에 근거하여 스스로 의로와 지고자 하게 되고, 하나님의 베푸심에 대해 언제부턴가 평가하고 불만과 의심으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품꾼의 자세’인지를 주님은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v.16)고 충성되지 못한 품꾼의 삶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경고하십니다.

또한 주님은 자신이 머지않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대제사장과 서기관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이방인에게 넘겨져 능욕을 박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과 제 3일에 다시 살아나실 것’ (v. 18-19)을 제자들에게 예언하셨습니다. 그때 오늘 본문말씀의 배경이 되는 한가지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12제자중에서 세베대의 두 아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주께 나아와 절하면서, 무언가를 구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녀는 이렇게 간구합니다. “(주여)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v.21)라고. 이것은 한마디로 ‘파워게임’ (power game/권력쟁탈전)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들 제자들은 주님을 3년 반 가까이 함께 따라다녔지만, 그들이 여전히 추구한 것은 예수님의 가장 가까이에서 막강한 권력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말로 주님의 ‘핵심측근’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옛날 우리나라 왕의 바로 양 옆에서 보좌하는 ‘우의정’과 ‘좌의정’처럼 말입니다.

이와 같은 그녀의 구함을 듣고나서 주님은 이렇게 반문하십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v.22a)라고. 그들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나의 마시려는 잔’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대뜸 “할 수 있나이다” (v.22b)라고 숨도 쉬지 않고 대답합니다. 이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v.23)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주석가 매튜헨리는 이렇게 그 의미를 해석했습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그것을 욕망하는 자들에게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겸손하게 자기를 부정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비한 자들에게 주시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때, 주님의 말씀을 듣은 나머지 10명의 제자들이 요한과 야고보에 대해 분개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를 제가 한번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재구성해 보았습니다. 먼저 다른 10명의 제자들이 (음식을 마련코자 했든, 혹은 볼일이 있어서였든) 어디론가 나간 사이에, 그 틈을 기다리던 요한과 야고보가 그 어머니와 함께 홀로 계신 예수님께 제 빠르게 찾아갑니다. 그리고, 주께 큰 절을 하고 그 어머니가 “저의 두 아들을 잘 봐 주세요”라고 구했던 것입니다. 소위 ‘치맛바람’을 일으킨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두 제자들의 대화가 한창 오고 가고 있는 상황에서 천천히 올 것으로 예상했던 10제자들이 갑자기 들이 닥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이 두명의 제자와 어머니가 나누는 대화를 이들이 듣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이 친구들이 내 보다 한발 빠르게 선수를 쳤구나!’라고 뒷통수 맞은 기분으로 분개하며 그들을 성토하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들 열명 모두도 각자 속으로 같은 생각을 품었다는 것이고, 요한과 야고보가 약삭 빠르게 그것을 먼저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을 한편에서는 내심 감탄해하고, 한편에서는 경쟁심으로 인해 배신감과 화가 났던 것이 바로 이 상황이 아닐까 하고 저는 이해해 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을 보신 주께서 이렇게 흥분하고 분개해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v.25-27)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2천여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 주님의 이런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아 당연한 말씀이지! 섬김은 멋진 거야!’라고 쉽게 반응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런 주님의 말씀은 그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상황에서 볼때 주님의 이와 같은 ‘주종’ (=갑을)관계가 완전히 뒤바뀐 도전의 말씀은 가히 혁명적이요, 심히 도전적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도전은 무엇일까요? 먼저 이방민족의 통치자들은 백성들을 자기 마음데로 부리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본다면 지극히 당연한 논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v.20:27)고 제자들에게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한걸음 더 구체적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중심질문은 이것입니다. 무엇이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뜻일까요? 그것은

첫째, ‘종의 낮아짐은 실력이 아니라 자세’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이해하는 것은 ‘낮아짐은 실력이 아니라, 자세’라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오늘 말씀을 설교하면서 주께서 제자들에게 ‘종이 되라’고 도전하시는 것은 ‘실력이 아니라 자세입니다!’는 지적은 무척 적절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특별히 우리 청년들에게 있어서 그러합니다. 우리가 종처럼 낮아진다는 것은 실력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 청년 크리스챤은 더욱 철저하게 실력을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크리스챤 대학인 ‘한동대학’의 한가지 모토가 <배워서 남 주자>라는 것임을 들었습니다. 참 좋은 크리스챤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열심히 배우는 이유가 남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많이 가질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챤은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배워서 남 주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멋진 크리스챤의 삶인지요!?

이것이 또한 청년 다윗의 모습이었습니다. 자기 하는 일, 곧 어려서는 양치는 신실한 목자로, 젊은 날에는 용맹한 군인으로, 그리고 남은 인생은 이스라엘을 탁월하게 다스리는 왕으로써 그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 실력을 기르는가 하면, 그 마음은 언제나 겸손히 낮은 자세로 이웃을 섬기는 모습, 이것이 시편에서 하나님께서 칭찬하신 다윗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 (시. 78:72)라고 말입니다. 청년 여러분, 이런 평생의 날 동안 다윗과 같이 마음의 성실함으로 이웃을 섬기고, 손의 공교함으로 탁월하게 실력을 기르지 않으시겠습니까?!

둘째,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서로 으뜸이 되고자 경쟁이 되어 서로 으르렁거리는 제자들에게 ‘으뜸이 되고자 해서는 않되! 그런 마음은 죄야!’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체를 결코 죄악시 하시는 것이 아니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v.27) 라는 것입니다. 단지 무엇이 으뜸이 되는 삶인지를 정확히 영적으로 일깨워 주시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으뜸/최고’가 되고자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주님은 말씀하는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이 마음은 도리어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에게 주신 귀한 마음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떻게 으뜸이 될 수 있느냐? 가 문제인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 크리스챤이 왜 선한 일을 하고자 합니까? 왜 선으로 악을 이기고자 합니까? 왜 우리를 유혹하는 그 달콤한 죄를 온 힘을 다해 싸워 이기고자 합니까? 왜 죽기까지 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삶이요,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삶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는 곧 ‘천국에서 으뜸이 되는 방식’이라고 믿습니다. 선한 일에 열심을 내며, 악은 대해선 관심조차 갖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삶을 온 힘을 다해 살다가 간 대표적인 성도의 한 사람이 사도 바울이라고 하면, 여러분 중에 반대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가 순교 당하기 얼마전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딤후. 4:7-8)라고. 바울은 의로운 재판장 되신 주께서 주실 의의 면류관을 사모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이 면류관은 사도 바울 뿐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가 간절히 사모해야 할 면류관인 것입니다. 이 의로운 면류관만큼 천국에서 으뜸으로써 주실 큰 상이 더 있을까요? 맞습니다. 천국에서 받게 되는 이 면류관은 결코 우리의 교만과 높아짐을 만족시켜주는 보상물이 아닐 것입니다. 도리어 이 면류관은 더욱 낮아지고, 겸손히 섬기는 자에게 선하신 주께서 주시는 칭찬이요, 섬김의 지도자로서 누리게 되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인 것입니다.

셋째, ‘주님 자신의 십자가 죽으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할찐데 그들의 종이 되어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도전하시고 나서, 그 완벽한 본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계시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v.28)라고. 이 말씀은 곧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주님 자신이, 구약의 어린 양과 같은 대속물 (a ransom)이 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섬기고자,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는 희생제물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자 이 땅에 오셨다고 주님은 자신이 오신 목적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논리는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남으로부터 대접받고, 자기 마음데로 세도 부리는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논리는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남을 대접하고 섬기는 것이라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권위와 파워는 남을 부림으로써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남을 겸손히 섬김으로써 나온다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러한 진정한 으뜸의 삶을 말로만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그의 살을 찢으시고, 그의 보배로운 피를 한방울도 남김없이 쏟으셔서 ‘섬기는 종’으로 이 땅에 오신 자신의 삶의 목적을 온전히 이루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이렇게 그를 믿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 16:24-25)라고. 우리는 어떻게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참된 주님의 제자로 그분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순간순간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자아를 부인’하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본을 주님을 본받아 날마다 우리의 자존심과 헛된 욕심과 육신의 소욕을 각자의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가능한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여러분의 자아가 못박히고, 자존심이 죽어지는 그 자리에서 서로를 향한 섬김의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주께서 약속하신 ‘천국의 으뜸이라 칭찬해 주실 섬김의 종’ 곧 ‘사랑의 종’으로 풍성한 열매 맺으시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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