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25, 2018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난을”

Preacher:
Passage: 로마서 (Romans) 8:15~17
Service Type: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난을”

(Suffering with Christ)

3-25-18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8:15~17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For you did not receive a spirit that makes you a slave again to fear, but you received the Spirit of sonship. And by Him we cry, “Abba, Father.”)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 (The Spirit Himself testifies with our spirit that we are God’s children.)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Now if we are children, then we are heirs – heirs of God and co-heirs with Christ, if indeed we share in His sufferings in order that we may also share in His glory.)

<서 론>

저는 성도 여러분과 <부활절 특집 2째주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제목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난을” 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이땅에 오신 목적을 “ ~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b) 고 말씀 하셨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이라는 제목의 말씀으로써,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해 우리가 ‘거듭 나게 된다’ (born again) 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가 거듭나게 될때 하나님의 나라를 볼수 있고, ‘거듭나다’는 영적 의미를 이해하며, 이것은 오직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져 주시는 선물임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내로운 피를 흘리심을 통해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 입니다. 그의 양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 입니다. 이제, 저는 이번주와 다음주 부활절 말씀을 통해 ‘주님은 그를 믿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뿐 아니라, 더 풍성하게 하시고자’ 이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은자 가운데 다시 살아 나셨음을 확인해 나가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풍성한 삶’ 입니까? 주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삶’ (abundant life)을 주시고자 하는 그 중심에는 ‘십자가’ 가 있고, 그 십자가의 중심엔 ‘고난’ 이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고난은 실패도, 저주도, 불행도 아닙니다. 이 고난은 장차 “ ~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또한 그와 함께 받아야 될” (v.17) 영광의 풀무불이요, 채찍 인것 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이 앞으로 부닺힐 고난에 대해 더이상 두려워 하거나 분노할 것이 아니라, 기쁨과 확신 가운데 그 고난을 이겨 나감으로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수 있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본 론>

제가 오늘 말씀을 통해 성도 여러분에게 질문하는 중요한 한가지는 이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하는 것 입니다. 제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의 최대의 비극의 하나는 ‘고난’의 의미와 유익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에 있기 때문 일것 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난을’ 이라는 오늘 설교 말씀을 준비하면서, 도데체 ‘고난과 우리 크리스챤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청년시절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난 이후 저의 짧지 않은 신앙생활을 되돌아 보았을때 ‘왜, 나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염려와 불안이 나를 떠나지 않았나?’ 하고 스스로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질문은 어쩌면 저 혼자만의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믿음으로 확신하는 모든 거듭난 자들이 한번은 꼭 스스로 물어보아야 할 질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 질문은 아직까지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질문 입니다. 성경은 결코 세상사람들을 향해 고난을 통한 궁극적인 축복을 약속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고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와 더불어 열매 맺을수 있기 때문 입니다.

다시 저의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성경의 가르침데로 고난을 이해하고 고난을 맞이 해 나가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 고난을 깨닫은 만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해 나갈것을 저는 의심치 않습니다. 제가 청년시절,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믿음으로 확신했음에도 왜 저는 그동안 긴 세월을 살아 오면서 제 마음 가운데 ‘불안과 염려’ 를 떨쳐 버리지 못했을까요? 맞습니다. 물론, 제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저의 그 부족한 믿음은 무엇 입니까? 어떻게 그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 일까요? 우리는 내 속에 있는 모든 불안과 염려를 가져오는 ‘의심과 불신’ 을 물리치도록 더욱 주께 기도하고 간구해야 할 것 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이 ‘고난’을 통해 우리 성도들이 바로 성장할수 있는 가장 우선되는 길은 ‘성경에서는 고난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확인해 나가고, 이해해 나가야 할 것 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왜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셨는가?” (Why does God allow suffering for His children?) 라고 표현할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의 자녀된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락 하신것일까요? 이제 그것을 구체적으로 살펴 봅시다;

첫째, ‘자녀를 징계하시고자 함’ (Because God let His children chastise) 입니다: 성경은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를 다루는 방식이 고난이라는 것 입니다. 구체적으로 ‘징계’ (chastisement) 를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 입니다. ‘고난’ 과 ‘징계’ 는 어떤 관계성이 있습니까? 그것은 둘다 ‘아픔과 고통’ 이 있다는 것 입니다. 솔직히, 그 누구도 육신적으로 ‘징계’ 로 표현되는 ‘고난’ 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징계는 고통스럽고 아픕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성경에서는 하나님께는 그의 택한 자녀를 다루시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으로 ‘징계’를 사용하심을 누누히 밝히고 있습니다. 저는 <창세기 1장>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후로 모든 구약의 역사는 바로 그분께서 택하신 그의 자녀 이스라엘을 다루신 징계의 역사라고 이해 합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징계의 역사’가 구약성경의 역사인 것 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구약성경에 기록된 그 모든 구체적인 하나님의 징계의 사건들을 다 나누기에는 시간이 부족 합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은 그의 자녀에게 징계를 행하시는지? 때로는 심히 혹독한 징계의 채찍을 휘두르시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할수 있기를 원 합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 하십니까? 성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런 징계하심의 목적과 그분의 사랑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말씀의 하나가 <히브리서 12장> 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 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히. 12:5~7) 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징계의 목적을 설명합니다.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을수 있겠는가?” 라고 우리에게 도리어 반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히. 12:8) 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징계를 통하여 우리를 그의 참 아들과 딸이 되게 하신다는 것 입니다. 우리가 비록 예수 믿고 거듭남으로 놀라운 자녀의 신분을 소유했지만, 여전히 죄에 속한 육의 몸을 입고 살아가기에 실수하고 죄 짓는 연약한 우리들을 어떤 지혜로운 부모보다 지혜로우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그냥 고아나 사생아처럼 놔 두시겠느냐?’ 는 것 입니다. 결코 그렇수 없다는 것 입니다. 반드시 징계 하신다는 것 입니다. 바로 “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의 거룩함에 참예케 (하시고자)” (히. 12:10) 함이요,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히게)” (히. 12:11) 하고자 함이 우리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의 목적이라고 성경은 감사하게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 입니다. 여러분은 이 징계의 목적을 지금 이해해 가고 있습니까?

둘째, ‘자녀를 성숙시키고자 함’ (Because God let His children grow up) 입니다: 이제 두번째 하나님께서 자녀를 성숙 시키시는 ‘고난’ 의 의미는 좀더 깊고 어려울수 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받는 ‘징계’ 는 당연하다고 할수 있지만, 내가 잘못한 것 같지 않는데 받는 고난은 우리 성도들을 당황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할수 있기 때문 입니다. 이 두번째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두신 고난의 뜻은 ‘그의 자녀를 성숙 시키고자 함’ 임을 우리는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것을 짧게 정의하면 ‘의인의 고난’ 입니다. 여기에 대해 여러분의 첫번째 반응은 무엇 입니까?;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힘든 고난을 겪는다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느냐? 너무 불공평한것 아니냐?’ 는 것은 아닙니까?!

여기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봅시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동방의 의인> 이라고 인정해 주셨던 ‘욥’ 이라는 믿음의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 앞에서 그를 평가절하 하면서 ‘만약 그의 가진 모든 소유를 다 치시면 그가 하나님을 욕할 것입니다’ (욥. 1:9~11) 라고 말 합니다. 그리하여, 그에게 모든 재산과 자녀를 하루 아침에 잃게 되는 고난과 더 나아가 온 몸에 악성 종기가 나서 극심한 고통을 하나님은 허락 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가 때로는 육신의 연약함과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께 원망도 하고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탄 하기도 하지만, 그 혹독한 고난 가운데 욥은 이런 소중한 깨닫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 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 23:10) 고 말 입니다. 자신이 앞으로 어떤 고난과 어려움을 더 겪을지 욥 자신도 결코 알수 없지만, 그가 이 고난을 통해 점점 더 깨닫고 확신게 되는 것은 이 고난이 자신을 넘어 트리고 자포자기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도리어 이 고난은 ‘극심한 풀무불 가운데 단련한 순금’처럼 자신을 더욱 훈련시키고 성장 시키셔서 승리하게 한다 것 입니다. 이것이 때로는 그 당시는 이해할수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과 동행하는 자가 깨닫게 되는 진리라는 것 입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들을 ‘순금과 같이 순결한 믿음으로 성장시키고자’ 고난을 허락 하시는 이유 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긴 ‘장’인 <시편 119편> 에서 시편 기자는 우리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의 영적 의미를 자신의 경험의 차원에서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까지는 잘못된 길을 걸었으나,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지킵니다 ~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님의 율례(=법)를 배웠습니다” (시. 119:67,71/ 새번역) 라고. 고난은 우리 성도들의 삶을 통하여 당장은 이해할수 없고 깨닫을수 없을찌라도 점점 더 우리를 하나님의 법 안에서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그 뿌리를 깊이 내리고 푸른 잎사귀와 풍성한 열매를 맺는 축복된 인생으로 성장케 하는 영양분이 풍부한 거름인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 고난을 통해 점점 더 하나님의 철든 자녀로 성장해 가고 있습니까?

셋째,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게 하고자 함’ (Because God let His children share in the glory of Christ) 입니다: 저는 여러번의 <로마서 8장> 본문 설교를 통해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과 영광이 무엇인지를 사도바울의 놀라운 선언을 통해 나누고자 노력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롬.8장> 을 시작 하면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v.1) 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능력이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우리를 해방(하셨기)” (v.2) 때문 입니다.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성령의 능력으로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는 삶을 사는 자는 어떤 믿음 좋은 몇몇 크리스챤들만 되어서는 않된다는 것 입니다. 반대로,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의롭다 칭함받는’ 모든 거듭난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 전체는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가능한 가에 대해 사도바울이 조직적이고 깊은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설명한 것임을 우리는 살펴 보았습니다. 이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는 분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것 입니다. 이것이 전부 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v.9) 고 바울은 선언할수 있었던 것 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뿐 아니라 (1,2), 양자의 영을 주심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라고 고백하게 하시고 (15), 더욱 더 나아가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심’ (16) 을 우리는 살펴 보았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있어서 성령의 절대적인 영향력임을 살펴 보았습니다. 따라서, 왜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는지를 잘 설명하는 본문임을 우리는 함께 나눴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지 못할때,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이 얼마나 축복되고 영광스러운지 깨닫지 못하고, 그 특권을 누릴수도 없기 때문 입니다.

사도바울이 이 놀라운 성도의 특권과 영광스러운 미래를 밝히고 난 다음, <17절> 에서 갑작스럽게 ‘고난’ 을 언급한 것은 그가 그당시 섬겼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당면문제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그는 단순히 ‘신학적인 논쟁’을 하고자 함이 아니요, ‘목회자의 심정’ 으로 당시 성도들이 겪고 있는 가장 힘든 문제를 돕기 원했던 것 입니다. 바로 ‘고난’의 문제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당한 대부분의 극심한 고난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이 믿은 ‘예수 그리스도’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 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는 나의 주인이다’ (Jesus is my Lord!) 라고 고백하는 순간부터 그들의 가족들과 원수관계가 되고, 삶의 공동체에서 파문을 당하는 것은 말할것도 없고, 칼과 사나운 짐승과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철저한 믿음의 댓가를 지불 해야만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힘주어 주장하는 바는 이것 입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음으로 성령을 통해 자녀됨의 증거와 확증을 경험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상속자>임을 잊지 마십시요! 그리고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반드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함을 깨닫아야 합니다!’ 라고 선언하는 것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인 것 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겪는 고난과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 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저는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풍성한 삶’ 은 그 어떤 것 보다도 그분의 <십자가 안에> 감추어져 있고, 그 십자가의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 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만약 여러분과 제가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될 자녀의 가장 영광스러운 삶을 소망 한다면, 주께서 걸어가셨던 십자가의 삶을, 주님의 고난의 삶을 성령을 통해 더욱 더 깨닫고, 우리 또한 우리의 삶 가운데 그분과 더불어 고난을 실천해 나가야 할것 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 주께서 우리에게 도전하시는 십자가의 삶 이라고 믿습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 (눅. 9:23,24) 이요,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지는 삶’ (요. 12:24,25) 일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십자가의 삶을 살아감으로 주님과 함께 누릴 영광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간절한 이유를 이렇게 고백 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립보서 3:10,11) 라고. 바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의 부활에 이르고자 함 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참여 함으로서 그분의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하시기를 기도 합니다. 그분의 고난과 함께 그분의 부활의 영광과 승리를 경험하는 축복된 성도 여러분들 모두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