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17, 2022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I Am Crucified With Christ)

Preacher:
Series:
Passage: 갈라디아서 (Galatians) 2:20
Service Type: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I Am Crucified With Christ)

4-17-22

본문말씀: 갈라디아서 (Galatians) 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설교 요약]

            ‘주 예수께서 살아나셨습니다!!’ (He is risen!) 오늘 부활절은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사신 날이기에 우리 성도에겐 가장 복되고 영광스러운 날인 것입니다.

큰 그림에서 볼 때,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또한 3일만에 부활하신 이 <부활절기간>은 유대인들의 최대명절인 <유월절기간>과 겹칩니다. 유월절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민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케 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신지 1500년 후에 예수님은 유월절의 ‘하나님의 어린 양’ (The Lamb of God)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모두의 죄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를 그의 피로써 값 주고 사셔서 죄와 사망에서 건져 내심으로 자유케 하신 날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목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목 박혔다’는 의미일까요?” (What means that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그것은

첫째,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남’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또한 그와 함께 살아나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4-15)고 주께서 선언하셨듯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을 믿을 때, 그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율법을 향하여 죽었음’을 뜻합니다: 사도는 오늘 본문 앞절에서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갈. 2:19)고 선언했습니다. 여기서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라는 의미는 기독교인들에겐 ‘율법주의’ (legalism)가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행함으로 의로와지고자 하는 이 율법주의에서 죽을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의 다스림으로 살아감’을 뜻합니다: 사도가 고백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 내 안에 충만하게 임재 하시고 다스려 나가심을 뜻합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누리는 영의 풍성한 열매를 맺고, 성령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삶입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자유입니다.

부활절 오늘 하루만이 아니라, 날마다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육신에 속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아들이 주시는 생명의 자유를 누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주 예수께서 살아나셨습니다!!’ (He is risen!) 오늘 부활절은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복되고 영광스러운 날임에 틀림없습니다. 물론 우리 주께서 이 땅에 육의 몸을 입고 태어나신 ‘크리스마서’도 기쁘고 감사한 날이지만, 주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부활절은 진정 우리 모든 크리스챤들의 참된 소망과 승리의 날이요, 가장 복되고 영광스러운 날인 것입니다. 이 시간 함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살펴보는 시간 갖기 원합니다. 한걸음 더 부활의 의미를 깨닫아 나감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남아 있는 어둠의 옷들을 벗어버리고, 주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주와 함께 다시 삶으로 주의 부활의 능력으로 날마다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자신의 소중한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셔서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주신 복음의 자유를 결코 빼앗겨서는 안됨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진리의 자유 위에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가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밝히듯이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니라” (갈. 2:19)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제 자신은 ‘율법에 대해서는 죽었고, 하나님에 대하여서는 살려 한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셨다는 것 (롬. 4:24)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우리 크리스챤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또한 3일만에 부활하신 이 부활절기간을 단지 우리 기독교 안에서만 국한해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활절기간은 큰 그림에서 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유대민족에게 있어서도 이 부활절기간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명절 기간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들은 이 기간을 다르게 부릅니다. 소위 유대인의 3대명절인 ‘칠칠절’ (혹은 오순절), ‘초막절’ (수장절) 그리고 ‘유월절’ (무교절) 중에서도 최대의 명절이 유월절이 그것 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유월절’ (Passover) 기간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데로, 유월절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명령을 거부하며 고집을 부리는 애굽의 바로 왕에게 내리신 10가지 재앙 중 마지막 열번째에 해당하는 재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바로 왕의 첫 아들 뿐만 아니라, 애굽의 모든 백성들의 장자와 심지어 그들의 짐승들의 첫 숫컷 새끼까지도 모두 하나님께서 죽음의 사자를 보내어 치시는 열번째 재앙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집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게 함으로 죽음의 천사가 넘어가게 하셔서 그 집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바로 죽음의 사자가 어린 양의 피를 보고 그 집을 ‘넘어간다’는 의미의 ‘유월’ (逾越/ Passover)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유월절의 구원의 역사를 그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원토록 기념할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 최대의 명절인 유월절의 유래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것을 기념하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능하신 손으로 이스라엘민족 전체를 바로 왕에서 구속하신 은혜 (=사건)을 영원토록 기념하는 것이 바로 유월절인 것입니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신비로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유월절 명절 기간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하나의 우연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침례 요한이 정확히 예수님의 삶을 한마디로 정의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 (The Lamb of God)이 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그 보배로운 피를 흘리셔서 그를 믿는 자를 구원고자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허락하신 ‘유월절’ 구원의 역사는 오랜 시간이 지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는 ‘부활절’로 확대되고 완성되어 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목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저는 이제 바울이 선언하는 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목 박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성도 여러분과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뻐하고 기리는 것의 최종적인 이유는 그 부활이 내 속에서 어떻게 참되게 역사하는지를 깨닫고자 함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오늘 하루만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그쳐서는 안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목 박혔다’는 의미일까요?” (What means that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저는 그것은

첫째,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남을 뜻합니다 (It means to live with Christ again):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이와 유사한 고백을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8)라고. 그럼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목 박혔다’는 선언 안에는 그분과 함께 죽을 뿐 아니라, 또한 그분과 함께 살게 되는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 위한 첫걸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값주고 사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린 그분의 피로서 내 모든 죄가 씻겨졌음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1500여년경 전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함으로 불뱀 (=독뱀)에게 물려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명하셔서 놋으로 뱀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장대 위에 높이 달아 이스라엘백성들로 쳐다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모두 치유함을 받았고, 쳐다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주님은 이 사건을 염두에 두시고 이렇게 선언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4-15)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십자가 위에서 높이 매달려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그를 바라보는 자 마다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지 않을 때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의 옛사람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게 되고, 또한 주님과 함께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율법을 향하여 죽었음을 뜻합니다 (It means to die to the law): 앞서 잠시 인용했듯이, 사도는 오늘 본문 바로 앞절에서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갈. 2:19)고 선언했습니다. 여기서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이 메시지는 믿지 않는 불신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갈라디아교회 교인’을 대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대로 ‘율법’은 죄악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선하고 온전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도는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라고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잘못된 신앙, 즉 ‘율법주의’ (legalism)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에서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롬. 7:9)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매우 깊고 상징(?!)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볼 때 이 말씀은 죄에 갇힌 인간의 한계와 절규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챤에게 적용해 본다면 이것은 ‘형식화된 신앙생활’의 위험성을 의미합니다. 소위 말해 ‘율법적인 삶’ (legalistic life)입니다. 사실 사도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도전하고자 하는 것도 이것입니다. 성도들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v.16). 사도가 갈라디아 교회를 떠난 후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교사들이 ‘할례’와 같은 여러 율법의 요구를 행해야만 구원이 주어진다는 잘못된 가르침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목 박혔다는 말은 율법으로 의로와지고자 하는 ‘율법주의’ (legalism)를 과감히 배격하고,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을 실천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는 뜻일 것입니다.

셋째, ‘성령의 다스림으로 살아감을 뜻합니다 (It means to live by the reign of the Spirit): 신학적으로 볼 때, 모든 거듭난 성도에겐 성령이 계십니다. 누구든지 성령 즉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 즉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롬.8:9). 그러나,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성령이 그 성도 안에서 거하시는 상태는 그 사람의 영적 상태에 따라서 가히 천차만별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여겨집니다. 어떤 성도에게는 성령이 마치 바람 앞의 등불처럼 소멸되듯 매우 미미하게 거하시는 가 하면, 어떤 성도에게는 성령께서 강력하게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충만’함을 받는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사도가 고백하듯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은 나의 주인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말로 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나를 다스리시고 이끄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선하신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다스림을 어떻게 받게 된다는 것일까요? 바로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통해서 입니다. 주께서 이렇게 약속하시지 않습니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요.16:13-14)이라고. 그렇습니다. 내가 예수 믿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죄가 내게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강력한 도우심으로 육신에 속한 죄악과 세상의 헛된 가르침과 악한 영 사단 마귀의 권세와 싸워 나갈 때만이 그것들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하신 다스림을 통해서만 주께서 약속하신 모든 충만한 영적 열매를 맺을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안식과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진리를 소유하셨습니까? 그리하여 그 진리로 말미암아 진정한 자유를 누리십니까? 사도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감해 나가면서 이렇게 그들을 격려하고 촉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5:1)라고. 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죄악된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어 주신 이유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1500여년후에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으신 것을 믿게 될 때, 그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와 함께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약속하신 성령으로서 진리로 자유케 되는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부활절의 정신이요, 우리 성도가 평생을 통해 붙잡고 누려야 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모든 옛사람에 속한 율법주의의 옷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부활의 주님과 성령 안에서 풍성한 자유를 누리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