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24, 2022

“성령충만” (II) (Filled With The Spirit)

Preacher:
Passage: 에베소서 (Ephesians) 5:17-18
Service Type:

“성령 충만” (II)

(Filled With The Spirit)

4-24-22

본문말씀: 에베소서 (Ephesians) 5:17-18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Therefore do not be foolish, but understand what the Lord’s will is.)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Do not get drunk on wine, which leads to debauchery. Instead, be filled with the Spirit.)

[설교 요약]

오늘은 “성령충만”에 대한 두번째 말씀입니다. 사도는 ‘왜 이 시점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도전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 ‘지혜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지혜는 우리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지혜인데, 이 지혜는 바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함’을 통하여 얻게 됨을 사도는 도전하는 것입니다.

먼저, ‘성령충만’을 정의할 때, “크리스챤 성도의 삶에서 성령의 통제와 인도 아래 있는 상태” 라고 ‘신학사전’은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학자 ‘웨인 그루뎀’은 성령충만을 ‘물잔에 물이 넘침’이 아니라 ‘풍성을 불 때 계속 팽창하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헬라어 ‘플레루스테’가 <현재/ 수동태/ 명령형>형태를 취하고 있음에서도 확인됩니다. 성령의 1회적인 충만이 아니라 계속적인 충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령충만을 통한 변화일까요?그것은

첫째, “찬양의 삶을 살게” 됩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v.19)라고. 여기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영적) 노래는 하나의 ‘노래’만이 아니라 ‘삶’입니다. 성령충만 받게 될 때, 잃어버렸던 내 마음의 노래와 만족이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둘째, “감사로 제사를 드리게” (To worship with thanksgiving) 됩니다: 우리 성도가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게)” (v.20)될 때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시. 50:22-23). 찬양과 감사는 성령충만의 대표적인 열매입니다.

셋째, “자원함으로 복종하게” (To serve each other voluntarily) 됩니다: 성령충만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피차 복종함” (v.21)으로써 강력하게 드러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름으로 자원함으로 서로를 향한 섬김을 감당하는 것이 성령충만의 진정한 변화인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 11:13)고 우리에게 반문하시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시기 원하심을 강조하십니다. 성도 여러분은 성령충만을 원합니까?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시간에 “성령충만”이라는 제목으로 첫번째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사도가 ‘왜 이 시점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도전하는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도가 5장을 시작하면서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엡. 5:1)라는 말씀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빛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본받는 삶을 살자’는 것인데, 이와 같이 하나님을 본받는 빛의 자녀의 삶이 가능하기 위해 성도들에게 결정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지혜’라고 사도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요, 성령의 선물이 그가 말하는 지혜인 것입니다. 이 지혜를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어리석은 자처럼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지혜롭게 세월을 아낄 수 있는 것입니다 (v.15-16). 그리고 지난 주와 이번 주에 걸쳐서 묵상하는 ‘성령충만’을 받고자 하는 중심이유도 바로 하나님의 지혜로 성령충만 해 질 수 있다고 사도는 주장하는 것입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자녀를 그분의 지혜로 채워주실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약속하신 모든 충만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성도가 누리는 참된 축복과 은혜가 이 ‘성령충만’이라는 것보다 더 능가하는 상태 (표현)를 저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충만을 날마다 깨닫아 나감으로 더욱 풍성히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성령충만’에 있어서 먼저 성령은 누구시며, 성령의 사역은 무엇인지에 대해 지난 시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술 취하게 되는 것’과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함께 나눠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 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성령충만인지?’ 그리고 ‘어떻게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성도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먼저, ‘성령충만’에 대한 사전적 개념에서 볼 때, <웨스트민스터 성구사전>에서는 “크리스챤 성도의 삶에서 성령의 통제와 인도 아래 있는 상태” (행 11:24; 13:9,52)라고 간결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성령충만’에 대한 신학적 개념을 신학자 ‘웨인 그루뎀’은 설명하기를 ‘점점 더 팽창해 나가는 <현재진행>의 상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v.1)라고 시작하고 나서, “주께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v.5) 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다윗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것은 그의 영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충만했음을 뜻하는데, 이것은 마치 ‘컵이나 병에 물을 부어 가득찬 상태라기 보다도, 풍선을 불었을 때의 팽팽함과 같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컵의 물은 일정한 컵의 사이즈만큼 차게 되면 그것을 담지 못하고 흘러 넘치게 되지만, 풍성의 경우는 처음에는 조금만 불어도 팽팽해지지만 계속 불어도 분만큼 더욱 팽창하여 커져 나가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풍선은 공기를 붊에 따라 언젠가는 그 크기의 한계로 터질 수 밖에 없지만, 성령충만은 충만하다고 결코 ‘터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성도의 모범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헤아릴 수 없는 충만을 누리셨지만 그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도리어 지극히 아름답고 지혜와 순결함으로 우리의 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모든 성도는 우리 주님의 모범을 따라서 성령의 충만을 추구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충만의 개념을 오늘 말씀에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가 오늘 말씀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선언한 말은 헬라어로는 ‘플레루스테’인데, 이것은 <현재/ 수동태/ 명령형>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현재>는 현재진행의 상태에서 계속적으로 충만하라는 것이고, <수동태>는 인위적 체험이 아니라, 성령이 주체가 되어 주시고 우리는 받는 것이며, <명령형>은 모든 크리스챤이 적극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1회적인 충만이 아니라, 성령의 계속적인 충만을 뜻합니다. 바로 성령의 계속적인 통치하심과 인도하심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사도는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v.18)고 에베소 성도를 촉구하고 나서, 성령충만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결코 놓치지 않고 밝혀주고 있음을 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이어지는 <v.19~21>에서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령충만을 경험하면서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3가지 영적 변화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령충만을 통한 3가지 중요한 변화일까요?” (What are the crucial changes to believers through being filled with the Spirit?)  그것은

첫째, “찬양의 삶을 살게” (To live with life of praise) 됩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v.19)라고. 우리 교회에서 이틀전인 지난 금요일 ‘찬양모임’을 가졌습니다. 찬양팀의 열정적인 준비와 인도 그리고 참석한 우리 모두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심을 느낄수 있었던 기쁨의 밤이었습니다. 우리 성도의 찬양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고 새생명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격과 기쁨이 아닐까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이 존귀한 자녀의 삶에 대한 만족과 즐거움이 아닐까요? 우리가 느헤미야서를 읽어보면, 민족의 지도자 느헤미야는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벽을 이스라엘백성들과 함께 재건해 나가는 가운데, 무너졌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영적) 재건을 함께 해 나갔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잃었던 신앙을 회복하고 감격 가운데 눈물 흘리는 백성들을 향해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느. 8:10)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삶이 파워풀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그를 기뻐함으로 입술의 찬송과 마음의 즐거움이 꿀송이 보다도 더 달게 맺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감사로 제사를 드리게” (To worship with thanksgiving) 됩니다: 시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이 무엇을 가장 영화롭다고 인정해 주시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2-23) 하나님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자신을 그 누구보다 영화롭게 한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의 삶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사가 있는지요?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림에 있어서 인색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사도는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v.20)라고 성도를 격려합니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이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을 참된 주의 자녀들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v.20)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술과 함께 그분께 드리는 향기로운 감사의 제사만큼 성도를 능력의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 또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삶의 핵심인 것입니다.

셋째, “자원함으로 복종하게” (To serve each other voluntarily) 됩니다: 성숙된 교회 공동체의 모습에서 빠트릴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자원함’ 입니다. 이것을 사도는 자원함으로 피차 복종 (=섬김)한다고 표현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v.21)라고. 사도는 짧게 서로 서로 복종할 이유를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라고 말했지만, 이 속에 실로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로가 사랑으로 섬기고, 순종해야 할 수만가지 이유를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가운데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권면과 매우 흡사한 것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갈. 5:13)는 사도의 갈라디아 성도에게 권면했던 말씀에서 볼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 누려야 할 참된 자유를 빼앗기고 율법주의의 종으로 전락해 가는 어리석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허락하신 진정한 자유를 결코 빼앗기지 말고, 굳세게 붙잡기를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사도는 이렇게 그들을 격려하고 도전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갈.5:13)라고. 우리에게 있는 자유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데로 하는 방종, 즉 술 취함과 방탕이 아니라, 서로를 사랑 가운데 자발적 (=자원함)으로 섬기는 자유가 있을 뿐이라고 사도는 기독교의 역설적인 자유를 도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으로 섬겨 나감을 통해 함께 놀라운 성령의 충만하신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적지 않은 크리스챤들 가운데는 ‘성령충만’에 대해서 아직도 뭔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한다거나, 예언 혹은 초자연적인 신유의 능력을 행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의 은사이지, 성령의 충만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무엇이 ‘성령충만 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만약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고, 또 주시기 원하는 성령충만 받기를 사모하고 추구한다면, 선하신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반드시 우리에게 이 성령을 넘치게 부어 주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 11:13)고.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충만을 구하는 모든 자에게 넘치게 주실 것임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 성령충만을 통하여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경험하며 그 배에서 넘쳐 흐르는 생수의 강을 누리는 성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아포슬교회가 함께 기쁨과 감사의 제사를 하나님 아버지께 올려 드리며 서로를 뜨겁게 사랑으로 섬겨나가는 충만한 공동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