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28, 2017

“그리스도의 사랑” (2) (The love of Christ)

Preacher:
Series:
Passage: 고린도후서 (2 Corinthians) 5:13,14
Service Type:

본문말씀: 고린도후서 (2 Corinthians) 5:13,14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If we are out of our mind, it is for the sake of God; if we are in our right mind, it is for you)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For Christ’s love compels us, because we are convince that one died for all, and therefore all died)

<론>

                저는 지난시간에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는 사랑’, 우리를 지배하시고 휘어 잡으시는 사랑에 속해 있어야 만 하는 이유를 성도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통해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 크리스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휘어 잡혀야만 하는 이유는 <내 안에는 참된 사랑이 없음> 이 없기 때문 입니다. 그분의 놀라운 사랑을 덧 입지 않고는 누구도 사랑을 실천할수 있는 사랑의 사람이 될수 없기 때문 입니다. 저는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히는 사랑의 사람이 되자고 여러분을 지난 시간에 도전하였습니다. 오늘 계속해서 여러분과 제가 진정 주님의 사랑에 사로잡히고 그의 사랑의 사람이 되기 원한다면, 우리 각자가 점검하고 실천해야 하는 점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론>

                저는 시간시간, 말씀을 마치면서 ‘내가 품어주기 힘들고, 사랑하기 힘든 한사람을 두고 각자 사랑하기를 연습하자’ 라고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1주동안 사랑을 연습하자고 ‘숙제’ (assignment) 를 주었습니다. 어떠셨습니까? 물론 결코 쉽지 않은 것이 바로 사랑을 연습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말로만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음을 삶으로 드러내는 유일한 과정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사랑’ 이라는 제목의 설교말씀을 준비 하면서 문득 떠오른 책이 한권 있었는데, 그것은 오래전 제가 대학생시절 읽었던 ‘왜 사랑하기를 두려워 하는가?’ (Why am I afraid to love?) 라는 제목의 책 입니다. 그책은 ‘존 포웰’ 이라는 신학자가 쓴 책 입니다. 지금은 내용도 희미하지만, 한가지 분명히 기억나는 내용은 “만약 내가 사랑하기를 어떤 이유에서든 중단 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더라도 그대로 남아있다” 는 것 입니다. 그는 그것을 ‘마치 땅을 파서 사랑을 묻어 버린다고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긴 시간이 지나더라도 땅을 다시 파게 될때, 그 중지한 사랑은, 땅속에 파묻은 상태 그대로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고 비유적으로 사랑의 속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땅속에서 썩지 않고 있다> 는 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할지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저는 이것이 사랑은 회피하거나 무관심해 진다고 없어지는 것도 해결되는 것도 아님을 작가는 밝히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더 나아가, 사랑은 우리 인생의 살아가는 이유를 깨우쳐주는 가장 온전한 열쇠가 되기에 사랑하기를 회피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어 우리도 사랑을 계속적으로 연습해야한다고 이 책의 저자는 강조하지 않나 저는 생각해 봅니다.

사실, 사랑의 중요성은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다 할찌라도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 을 제외하고 그 대답을 찾기는 힘들 것 입니다. 그것이 남녀간의 사랑이든, 부모 자식 혹은 형제간의 사랑이든, 친구나 이웃간의 사랑이건 이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만큼이나 깊고도 또한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 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이렇듯 우리 모든 인간들에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 중요한 만큼 이해하기도 실천하기도 쉽지 않다는 점이 사랑에 대한 우리 모두의 딜레마라고 할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제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사랑하기를 연습하고, 힘쓰기 원하는 분명한 이유는 이 사랑이 우리에게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요, 우리 자신의 노력과 능력을 근거로 하지 않음을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 입니다. 그 사랑의 시작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로 부터 입니다. 이러한 서로 사랑할수 있는 힘과 능력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셔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는 사랑 안에서 성령을 통해 도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인 것 입니다. 이제 저는 지난주와 이번주의 핵심주제인 어떻게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는 사랑에 사로잡힐수 있을 것인가?’ (How are we compelled by the love of Christ?) 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저는 지난주 저의 집주위의 동네를 산책하면서 이웃집들의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집 잔듸는 깔끔하게 정리되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가 하면, 어떤집 잔듸는 잘 깍여지기는 했는데 여기저기 잔듸가 죽어서 구멍있고, 어떤 집 잔듸는 수없이 많은 잡초로 뒤범벅이 되고 눈살이 지푸려질만큼 엉망인 집도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집의 정원을 돌아보면서, 어쩌면 어떻게 우리가 서로 사랑할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이런 <잔듸 마당의 손질되는 단계> 가 영적인 좋은 적용이 될수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가 사랑의 사람이 되기위해 이렇게 영적으로 적용해 보았습니다;

첫째, ‘깍아줘야합니다 (It needs to cut grass on time); 잔듸야드를 잘 관리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시기를 놓치지 않고 잘 깍아 줘야 합니다. 가지런히, 깔끔하게 깍아서 관리되지 않고 떱수룩하게 안깍은 머리털 마냥 옷자란 잔듸정원은 누구 보더라도 잘 가꿔진 정원이라 불려질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 합니다. 저는 이것을 우리의 <서로사랑하기>에 적용해 본다면 그것은 <관계성 연습> 이라고 할수 있을 것 입니다. 언젠가 어느 목사님께서 “우리 모든 크리스챤들은 팻말을 목에 걸고 다녀야 하는데, 그 팻말에는 <공사중!!> (under construction) 이라고 써 붙여 다녀야 합니다” 라고 말씀했던 기억이 납니다. 내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갑자기 천사가 된것이 아니듯이, 우리는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실수하고 넘어지는 ‘공사중’ 의 인생이라는 것 입니다. 공사가 완료된 것이 아니기에 ‘불편을 끼쳐 죄송 합니다!!’ 라고 서로 양해를 구하고 용납해 주면서 함께 걸어가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삶이 되어야 할것 입니다.  잔듸를 잘 관리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때를 놓치지 않고 깍아 주어야 하듯이, 사랑의 실천은 무엇보다 ‘관계성의 연습’ 에서 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하고 저는 생각 합니다. 제가 굳이 ‘연습’ 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도 우리는 관계를 맺어 나가는데 모두 서툴고 힘들어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고, 실수하기 때문 입니다. 날마다 연습함으로서 조금씩 더 나아지는 것 입니다. 처음부터 잘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 13:34) 고 우리에게 명령 하셨습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그 명하심에 화답 하듯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요일. 4:7) 고 우리를 도전하고 격려합니다. 저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관계성을 연습’ 함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사랑이 이론이나 단순한 지식이 아니듯이 말 입니다. 그렇다면, 관계성을 우리는 어떻게 맺어 나가고 발전시켜 나갈수 있을까요? 저는 그 첫시작을 이렇게 권해 봅니다; 1) 관심 가지기,  2) 묻어보기, 3) 기도해 주기 입니다. 이것은, 관계성을 맺어가는 출발점 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삶으로 인도하는 전부가 되기에 역부족인 이유는 잔듸를 잘 깍아만 준다고 보기좋고 건강한 잔듸로 자라는 것이 아닌것과 같은 원리 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또한 필요한 것일까요? 그것은

둘째, ‘영양제를 줘야합니다 (It needs to be nurtured by nutritions); 잔듸를 잘 깍아주는 첫번째 단계가 잔듸의 외관의 아름다움에 촛점을 둔 것이라면, 잔듸에 영양제 (nutrition) 을 주는 것은 잔듸의 내면적인 아름다움에 촛점을 두는 것 입니다. 다시말해서, 잔듸가 풍부한 영양분을 속에서 부터 공급받지 못한다면 그 색깔과 싱싱함을 자랑할수 없는 것 입니다. 잔듸는 잘 깍아줄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 필요한 영양분을 적절히 공급해 주어야 건강하게 잘 자날수 있는 것 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사랑에 적용해 본다면 <영적 음식 공급하기> 라고 표현할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적음식은 무엇 일까요? 그것은 ‘성경말씀과 기도와 성도와의 교제’ 일 것 입니다. 여러분중에 영적 음식이 말씀과 기도 인것은 알겠는데 ‘성도의 교제’ 까지 영적 음식에 넣는 것은 너무 확대해석 아닌가요? 라고 반문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저는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성도의 교제’ 가 영적 음식에 있어서 빠져서는 않될 중요한 요소인 이유는, 나 혼자만의 ‘말씀과 기도’ 의 경건의 삶으로는 결코 영적인 영양분을 균형되게 공급 받을수 없기 때문 입니다. 가끔, 혼자서 말씀도 읽고 기도도 한다고 하는데 교회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신앙공동체와 단절되어 혼자 신앙생활 한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신앙생활이 얼마나 균형이 맞지않고, 자칫 위험할수 있는지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와의 교제’ 가 단절되거나 결핍될때 심각한 영적 영양 상실증이 걸릴수 있습니다. 특별히, 신앙적으로 성숙되고 서로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갈수 있도록 격려하고 좋은 영향력을 줄수 있는 성도들과의 교제는 이런 의미에서 <영적 음식을 공급>받는 점에 있어서 빠트려서는 않될점이 될것 입니다.

‘영적 영양분을 공급 받는다’는 뜻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실천한다는 것이 ‘관계성을 연습’ 하는 것으로는 역부족이기 때문 입니다. 관계성연습은 훌륭한 (=의미있는) 첫 출발점이지만, 이런 시도가 그것 자체만으로는 그리 오래 갈수 없는것은 이것이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만 함에 있어서 ‘동기부여’ 를 줄수 없기 때문 입니다. 이런 우리 크리스챤의 내면적인 사랑의 출발점은, 그 동기부여는 바로 ‘말씀과 기도와 성도간의 교제’ 를 통해 시작되고 더욱 충실하게 성장하고 자라날수 있을 것 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 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 하도다” (요일/ 1 John 4:11) 라고 사도 요한은 지적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모든 사랑할수 있는 힘과 능력은, 영적 영양분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 에서 출발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그 사랑을 그의 자녀인 우리 성도의 마음 가운데 부으셨다고 사도바울은 선언하고 있는 것 입니다; “ ~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 5:5) 이런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지 못하면, 우리는 잘 하다가도 갑자기 손해의식이 들고 ‘내가 왜 이런짓을 하지?!’ 하며, 갑자기 싸늘한 마음과 태도로 바뀌어 육체의 요구데로 사랑하기를 포기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영양분을 한시라도 공급받지 못한다면 말 입니다.

셋째, ‘약을 줘야합니다 (It needs to be taken by insecticides); 잔듸는 잘 깍아주고, 영양분을 충분히 주더라도 망가지고 훼손될수 있음을 저는 경험을 통해 알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잔듸에 붙어서 입을 갈아 먹거나 병들게 하는 ‘해로운 벌레’ 나 ‘곰팡이와 같은 미생물들’ (=병충해) 때문 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영적생활에 적용할수 있을까요? 사도 베드로는 흩어져 있는 성도들을 향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 (벧전. 5:8,9) 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성도들을 향한 강한 도전과 격려는 언제든지 우리 성도들을 공격하여 넘어트리고 영적 침체에 빠트리기를 호시탐탐 노리는 영적 해충 (=적) 이 있음을 분명히 지적하는 것 입니다. 바로 악한 영, 사단 마귀인 것 입니다. 또한 사도바울도 우리의 싸움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와 권세자들과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입니다” (. 6:12/ 표준새번역) 라고 이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영적인 해충약을 공급받는 것도 ‘영양제’ 안에 같이 포함해서 설명할수 있지만, 제가 따로 분류한데는 우리 크리스챤들이 얼마나 자주 자주 이런 ‘악한 영들과 우리의 육신의 요구’ 에 굴복하여 사랑하기를 중단하는지 저는 다 헤아릴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우리가 의도한 것도 아니요, 원하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을 속이는 육신의 욕심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 . 5:17) 과 악한 영 사단마귀의 공격에 영적인 침체와 좌절을 경험하게 되는 것 입니다. 특별히,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통해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악한 영의 공격과 내 육신의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잔듸가 잘 깍아주고, 영양제를 듬뿍 주는 것만이 아니라, 병충해를 없앨 ‘약’ 을 쳐 줌으로서 비로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수 있드시, 우리의 사랑할수 있는 영적 상태도 성령님께서 우리를 깨어 있게 하실뿐 아니라 나와 함께 이런 영적 해충들과 함께 싸워 이기게 하심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명령하신 사랑을 실천해 나갈수 있을 것 입니다.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는 사랑’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분의 ‘서로 사랑하라’ 는 명령을 순종하길 원하십니까? 우리 함께 사랑하기를 연습 합시다. 사랑하다가 실수하면 이해 합시다. 사랑하다가 넘어지면 서로 일으켜 줍시다.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법, 사랑의 법을 성취해 갑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인 여러분과 저를 이 땅에 남게하신 목적이요, 또한 축복임을 저는 믿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 잡히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 합니다. 그리스도의 그 사랑이 점점 더 넘쳐나서 사랑의 사람으로 서로를 섬기는 아포슬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