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5, 2021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

Preacher:
Series:
Passage: 고린도전서 (1 Corinthians) 15:22
Service Type: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

9-5-21

본문말씀: 고린도전서 (1 Corinthians) 15:22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For as in Adam all die, so in Christ all will be made alive)

[설교 요약]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의 하나가 ‘그리스도 안에서’일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의 서신서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라는 말은 무려 164회나 사용됨을 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여러 성경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하여 생명을 누리게 된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고전. 15장>은 “부활장”으로 유명합니다. 사도는 먼저 <고전. 15장>의 <1~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12~19장>에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선포합니다.

그리고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 하셨으리라” (v.13)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은 필연적으로 성도의 부활을 가져올 수 밖에 없음을 역설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v.22)라고 ‘아담 안에’ 속한 그룹과 ‘그리스도 안에’ 속한 그룹을 대조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는 죄와 죽음의 고통을 겪게 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움과 영생의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의미일까요?” (What does it mean to be ‘in Christ’?) 그것은

첫째, ‘존재가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It means to be changed our status):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고 신앙고백합니다. 이것이 가장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가 뜻하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그분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둘째, ‘삶의 자세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It means to be different our attitudes from that point):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구원받았다는 신분 (=존재)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더 나아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날마다 깨닫아 나가는 것입니다 (롬. 6장).

셋째, ‘부활의 능력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It means to enjoy the power of resurrection): 주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요. 15:5)고.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랑안에 거함으로써’ (요.15:7~9)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약속의 은혜를 날마다 누리는 성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의 하나가 ‘그리스도 안에서’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미일까요? 우리 크리스챤의 삶의 시작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면, 여러분의 삶은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 밖에 있습니까?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해서 그분의 피로 죄씻음 받아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분의 생명으로 영생의 기쁨과 부활의 능력을 누려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라는 말은 바울 신학의 중심 주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서신서 속에서 무려 164회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개념에서 볼 때, <웨스트민스터> 신학성구 사전에서는 “크리스챤 신자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 연합이 가져오는 구원의 혜택”이라고 짧게 정의하고 있고, 여러 성경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하여 생명을 누리게 되었음”을 정의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고전. 15장>은 “부활장”으로 유명합니다. 사도는 먼저 <고전. 15장>의 <1~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언합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이 역사적 사실 (fact)임을 그분을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 즉 사도들과 야고보와 일시에 목격한 500여 형제들 그리고 바울 자신까지를 그 근거로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12~19장>에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선포합니다. 사도는 성도의 부활을 선언하면서 먼저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 여러 예언자들에 의해 예언되었을 뿐 아니라, 앞서 언급한데로 여러 목격자들에 의해 증명된 사실’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v.12). 그리고 그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바로 성도들이 부활하게 되는 완벽한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 하셨으리라” (v.13)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필연적으로 성도의 부활을 가져올 수 밖에 없는 영적 필연성을 근거로 해서, 역설적으로 ‘만약에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는 우리 크리스챤에게 부활이 없다면 그것이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이렇게 잘 설명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v. 19) 이것이 그가 <32절>에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v.32)고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바울은 여기까지 설명하고 나서, 이어지는 <20절>에서부터 <고전. 15장> 끝절까지 이제 ‘성도의 부활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부활의 순서와 부활한 몸의 상태’가 어떠할 것인지에 대한 성령으로 계시함을 받은 구체적인 예언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선언하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v.22)는 말씀은 그가 두사람을 대조해서 비교함을 보게 됩니다. 한사람은 ‘아담’이요, 다른 한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왜 그는 두사람을 비교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대표성’에 있습니다. 첫사람, 아담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을 때 그는 첫 사람이라는 사실 뿐만 아니라, 죄가 없는 완전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에 의해 태어나게 될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후손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누릴 수도 있고 저주를 받을 수도 있는 대표성이 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안따까운 사실은 우리 모든 아담의 후손은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한사람도 예외 없이 저주와 죽음에 처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고 소망스러운 사실은 이런 아담의 범죄의 결과가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과 저를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 안에서 품어 주셔서, 죄와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구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과거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죽은 자 되었다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이런 영적 진리를 매우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로마서 6장>입니다. 그는 <롬. 6장 8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v.8)라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게 되는 우리 성도의 영적 실존을 확인시켜주는 분명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의미일까요?” (What does it mean to be ‘in Christ’?) 그것은

첫째, ‘존재가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It means to be changed our status):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가 의미하는 개념을 살펴 보았을 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하여 생명을 누리게 되었음’을 뜻한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그와 함께 부활했다’는 것이 도데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의미는 그 무엇보다도 ‘영적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영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그와 함께 부활했다’는 뜻입니다. 제가 그동안 여러 번 강조하여 말씀드렸지만, 이것은 하나의 영적 비유나 상징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와 같은 놀라운 일이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존재 안에서 일어나게 된다고 사도 바울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시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4~15)고 예언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불 뱀을 바라보듯이, 십자가에 목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다시 부활하게 되는 그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 근거는 2000여년 전에 주께서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서 목박혀 죽으심과 죽은 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건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접할 때 이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머리로 이와 같은 놀라운 구원의 역사와 능력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주님을 믿게 될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또한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되는 존재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이요 ‘영적 출생’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아담으로 대표되었던 우리의 옛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 벗어버리고, 이제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사람’이 된 우리 구원받은 자는 더 이상 아담의 대표성 아래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대표성 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듯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고 말입니다. 이것이 가장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가 뜻하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새 생명을 얻고 그분이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둘째, ‘삶의 자세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It means to be different our attitudes from that point):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는 무엇보다 ‘구원받음’이요 ‘영생을 소유했다’는 뜻임을 첫번째로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우리 신앙의 출발이요, 기초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가 가져오는 실제 삶에서 능력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됨을 우리는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0~11)고 사도는 로마교회 성도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음으로 영적인 출생을 했다는 존재의 변화가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오게 해야 한다고 사도는 도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전환점, 곧 내 신분의 각성을 통한 삶의 적용 단계에 이르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길지어다’ (count/ reckon) 는 말은 스스로 ‘설득하라’는 말이 아니라, ‘~ (자기 자신을 무엇)으로 생각하라’ 혹은 ‘~ 그렇게 된 줄로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체험이 아니라 깨닫음입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죄를 죽이라’고 말하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 곧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게 된 일을 깨닫으라>고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서 있는 영역에 관한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하여 있음으로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영역에서 살지 않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의로움과 생명이 통치하는 영역에 살아 있음을 깨닫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긴다’는 뜻이요, ‘그리스도 안에’ 속해 있다는 의미입니다. 깨닫음이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셋째, ‘부활의 능력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It means to enjoy the power of resurrection): ‘그리스도 안에’가 뜻하는 것이 먼저 ‘영적 신분의 변화’요, 그 다음은 ‘그 신분의 변화를 깨닫는 것’이라면, 마지막은 ‘그 신분의 <특권/혜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이렇게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고. 주님은 ‘나를 믿는 모든 자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내 안에 거하는 사람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했음을 삶으로 적용하는 단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을까요?

주님은 계속해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요. 15:7)고 말씀하시며,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하라고 도전하십니다. 이어서 “내 사랑 안에 거하라” (요. 15:9)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할 때 그것이 곧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요, 그것이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 풍성한 열매는 그 무엇보다도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 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금지할 법은 결코 없는 것입니다 (갈. 5:22~23). 이것이 부활의 능력을 누리는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자의 특권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더 이상 육신의 소욕을 좇지 않고, 성령께 순종하고 그 분을 좇음으로 맺게 되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첫 사람 아담 안에 속해 있었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분의 생명으로 다시 사는 새사람을 입었습니까? 더 나아가 거듭났다는 영적 존재의 변화 뿐 아니라, 이런 하나님께 대해 살아난 그분의 영광스러운 자녀가 된 우리 자신의 존재를 깨닫음으로 말미암아 참 포도나무 되신 주님께 속하고자 온 힘과 열심을 다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렇게 될 때 주의 영, 성령님을 통하여 여러분의 삶 속에 약속하신 성령의 열매를 거두는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속한 성도의 삶이요, 그로인하여 누리게 되는 풍성한 열매의 삶임을 저는 믿습니다. 이런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의 은혜를 날마다 누리는 성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