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12, 2021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나니” (There is no peace for the wicked)

Preacher:
Series:
Passage: 이사야 (Isaiah) 48:22
Service Type:

“악인에겐 평강이 없나니”

(There is no peace for the wicked)

9-12-21

본문말씀: 이사야 (Isaiah) 48:22

22 “여호와께서 말씀 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There is no peace,” says the Lord, “for the wicked”)

[설교 요약]

            성도 여러분은 지난 한 주, 마음에 기쁨과 평화와 감사 가운데 한주를 보냈습니까? 아니면 불안과 불만과 불평에 가득차서 한주를 보냈습니까? 사실 성경은 우리 성도들에게 평화와 기쁨을 약속합니다.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평화를 약속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 인간에겐 평안이 없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고백과 같이 “다 치우셨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시. 14:3)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 인간의 ‘죄’ 로 인함 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으로 죄를 유전받게 된 그의 모든 후손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선을 행치 못하고 치우쳐 악을 행한다는 것이 성경의 고발입니다. 고로 본질상 우리 모든 인간은 죄인이요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우리 인간이 어떻게 평화를 누릴수 있을까요? (How are we able to be peace?) 그것은 무엇보다도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화목됨으로써” (We may be peace by reconciling with God) 시작됩니다: 우리 모든 인류의 불행과 평화 없음의 시작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불화할 때, 나 자신과도 평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때만 비로소 평화는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 5:1)라고 바울은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 안에서 배움으로써” (We may be peace by learning from Jesus) 완성되어 갑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 가운데 무거운 짐지고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에게 이런 안식의 초청을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8~29)라고. 예수님은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께 날마다 배워 나감으로 진정한 평화를 누릴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적 출생 뿐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배워 나감으로 약속하신 ‘주님의 평화와 기쁨’을 누려 나가는 성도 모두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성도 여러분은 지난 한 주, 마음에 기쁨과 평화와 감사 가운데 한주를 보냈습니까? 아니면 불안과 불만과 불평에 가득차서 한주를 보냈습니까? 사실 성경은 우리 성도들에게 평화와 기쁨을 약속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주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여러분이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 자녀임을 확신하면서도 여전히 불안과 염려, 스트레스와 원망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바라기는 말로 만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평화와 기쁨의 삶을 성령의 충만하신 은혜로 풍성하게 누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포함되어 있는, <이사야 48장> 말씀의 주제는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잡혀 간 이스라엘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귀환의 약속’입니다. 비록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해서 강대국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들을 징계하셨지만, 그 징계 이후에 또한 그의 자녀를 회복하시고 그들의 땅으로 되돌려 보내실 것을 신실하게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강력한 바로의 힘에서 건져내시고, 광야의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셔서 그들을 지켜 주셨던 것을 기억케 하심 (사. 48:21)으로 이 약속이 신실함을 그의 백성들에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이런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권능으로 행하실 약속을 불신하는 자들은 단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흔들리고, 불안해하고 바람과 함께 살아져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 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v.22)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자에게는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이 ‘평화’에 대한 문제는 제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도 중심적인 ‘화두’ 입니다. 늘 해결되지 않고 마음의 중심에서 떠나지 않는 질문 말입니다. 그것은 곧 “나는 정말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성령의 충만을 통해 약속하신 ‘평강’ 곧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인 것입니다. 물론 교리적이거나 신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제 삶 속에서 주께서 약속하신 평강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을 통해 좀더 본질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왜 인간에겐 평안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과연 우리 인간은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왜 우리 인간에겐 평안이 없는 것일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말씀 중에서도 <시편 1편>말씀은 그 이유를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1)라고 시편기자는 <1편>말씀을 시작하며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복된 사람>은 ‘이런 이런 일들을 행하지 않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꿔 말하면, <복 없는 자>는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복 없는 자라구요? 그는 “악인의 꾀를 좇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않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한 부류의 사람의 삶에서 나타나는 특징인 것입니다. 이들은 ‘악인의 꾀를 좇을 뿐만 아니라, 죄인의 길에 들어서며, 또한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않는 것’입니다. 따로 따로가 아니라 이 세가지가 한사람에게서 연결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악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죄인 그리고 오만한 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같은 사람들입니다.

<시편 1편>은 이런 자의 결말이 어떨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악인은 ~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v. 1:4~6)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왜 악인 (=죄인)이 의인처럼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들의 악한 꾀와 죄악된 삶의 방식과 교만하고 높아진 마음 때문에 그들은 열매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악인입니까? 성도 여러분은 누가 이와 같은 악인이라고 생각합니까?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 모든 인간이 악한 자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사람도 예외없이 스스로의 행위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지 못하는 악인이라고 성경은 우리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윗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다 치우셨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시. 14:3)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다윗의 이 선언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입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0~12)라고.

제가 이 지점에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실존’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인간은 한사람도 예외 없이 타고 나면서부터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하고 의롭다 인정받는 삶을 사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아담의 원조를 유전 받았기에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점입니다. 한사람도 예외 없이 우리 자신의 실존은 여기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우리 인간의 존재 이해에 대해서 거부하고 매우 모욕적으로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름 도덕적으로 살고, 법을 잘 지키며 스스로 만든 높은 도덕률과 철학의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사람들에게 ‘당신은 죄인입니다’ 라든지, ‘하나님께 당신의 죄를 고백하고 죄 용서함을 받으세요!’ 라고 한다면 그들은 매우 자존심 상해하거나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영적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성도 여러분과 함께 확인해 나가고자 하는 것은 “왜 우리 인간에게 평안이 없는가?”에 대한 성경의 대답인 것입니다. 그 대답은 ‘죄’입니다. 인간 안에 거하고, 인간을 사로잡고, 인간 위에 통치하는 죄로 인해 우리는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내가 별로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죄쯤은 문제없다!’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습니까? 이것은 착각입니다. 그 죄의 막강한 힘은 그 누구도 이길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20)라고 토로한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죄가 우리 인간을 사로잡고 통치하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함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짐으로 ‘인간 내면의 평화’가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인간은 평안을 누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평화 함으로써시작됨을 믿습니다. 앞서 잠시 살펴본 대로 우리 인간은 우리 속에 있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미워하는 존재요, 모두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심각한 것은 이런 우리 인간의 상태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에 대한 적대감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적대관계를 맺게 된 타락한 인간의 진정한 비극은 자기 자신과도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로 말미암아 내적 갈등을 겪게 되지만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내면 속에서 지금 큰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그 이유를 전혀 이해하질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식을 우리는 ‘불안, 염려, 스트레스, 갈등, 그리고 불만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그분과 평화를 누릴 때만 자신과의 평화가 가능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땅에 보내신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우리를 격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 5:1)라고. 성도 여러분 대부분은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압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심으로 죄 용서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뜻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는 죄 용서함을 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깨어졌던 그분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적 출생을 하게 되었다는 의미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죽었던 생명이 되살아 남으로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평화의 관계를 시작하셨습니까?

그 다음으로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평화를 누리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근본적으로 시작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우리는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배움으로써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삶의 무거운 짐 가운데 고통받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안식의 초청을 하심을 보게 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 11:28~30)라고. 우리 주님은 세상 가운데 무거운 짐으로 말미암아 수고하고 쉼없이 살아가는 자들을 향하여 사랑의 초청을 하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지금 그의 안식으로 초청하는 그 대상은 누굴까요? 그렇습니다. 주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라고 부르시는 대상은 우리 모든 인류인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떠난 우리 인간은 그가 아무리 잘 먹고 잘 살고, 호의 호식 한다고 할찌라도 여전히 한사람도 예외 없이 인생의 무거운 짐 아래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그분께 나아와서 쉼을 주시고자 하는 근본 이유입니다. 그분을 믿고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초청의 말씀에서 우리 성도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또 한가지 사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주님이 주시는 안식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영적 출생>을 시작한 신분의 변화와 더불어 주님께 나아와 온 힘을 다해 <배우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대로 ‘우리 인류의 비극은 우리 속에 거하는 죄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는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점에 비추어 봤을 때, ‘우리 주님을 이미 영접한 성도의 최대의 비극은 주님께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주님은 ‘내게 와서 배우라’고 우리를 도전하십니다. 이것은 ‘내가 단순히 주님을 영접했다고 자동적으로 배우게 되는 것이 아님’을 강하게 도전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와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배울까요” 그분의 ‘온유하신 마음과 겸손’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하늘 영광을 다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인간과 같이 되심으로 지극히 겸손하심을 나타내셨고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죽으심으로 그분의 온유하심을 놀랍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럼으로 주님의 제자된 우리가 그분께 나아와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을 배우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쉼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께 배울까요? 이것은 곧 ‘주님의 말씀 안에’ 그리고 ‘주의 사랑 안에 거한다’ (요. 15:7~10)는 뜻이요, 그분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The Counseler) 곧 성령님을 신뢰하고 순종함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어간다는 뜻임을 믿습니다. 이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화목됨을 통해 우리 각자가 참된 평화를 누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로서 우리와 우리 사이에 가로놓인 막힌 담을 헐고 새사람을 입고 함께 평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엡. 2:13~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평화의 삶을 누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는 평화를 누립니까? 더 나아가 예수님의 가벼운 멍에를 메고 그분께 배워 나감으로 참된 쉼을 누립니까? 바라기는 그리스도 안에 성령의 능력으로 거하심으로 여러분 자신과 이웃과 더불어 약속하신 평화와 안식을 더 풍성히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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