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19, 2021

“바리새인의 누룩” (The Yeast of The Pharisees)

Preacher:
Passage: 누가복음 (Luke) 12:1~3
Service Type:

“바리새인의 누룩”

(The Yeast of The Pharisees)

9-19-21

본문말씀: 누가복음 (Luke) 12:1~3

1 예수께서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Jesus spoke to His disciples, “Be on your guard against the yeast of the Pharisees, which is hypocrisy.)

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There is nothing concealed that will not be disclosed, or hidden that will not be made known.)

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What you have said in the dark will be heard in the daylight, and what you have whispered in the ear in the inner rooms will be proclaimed from the roofs.)

[설교 요약]

            우리 인간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어쩌면 ‘남의 시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가 이런 말이나 행동을 하면 남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가 늘 우리의 관심이고, 우리의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v.1)고 도전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리새인의 누룩’일까요? 그것은 곧 ‘외식’이요 ‘위선’ (hypocrisy)이라고 주님은 분명하게 선언하십니다. 빵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누룩처럼 부풀려서 겉과 속이 다르게 포장하는 것이 바리새인의 누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비록 예수님을 따르고자 힘써 살아가지만, 겉과 속이 <통합된 인격> (완전한 인격이라는 뜻이 아니라, 말과 행동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 인격)으로 성숙되어 가지 못할 때 우리는 ‘바리새인의 외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이런 외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는 것’이 사람들의 시선과 영향력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관건이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성삼위의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눅. 12:4~10).

그러나, 만약 성삼위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 곧 ‘경외’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게 될 때 결국 “위선에 빠지게 되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정직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두려워할 때, 신실한 주님의 제자였던 베드로 조차도 이런 외식의 유혹에 걸려 넘어졌음을 사도 바울은 지적한 바 있습니다 (갈. 2:12~13)

둘째,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두 사람이 서서 기도했는데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자신이 ‘불의 간음 토색’을 행치 않았음으로 스스로 의롭다고 착각했다’고 주님은 비유를 통해 날카롭게 지적하셨습니다 (눅. 18장). 그는 남과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남과의 비교가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을 발견해 나감으로 우리 주님의 본을 따라 통합된 인격으로 성장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너나 할 것없이 남의 실수나 문제점은 날카롭게 분석하고 비판하면서도 나 지신의 실수와 잘못에는 잘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관대한 것이 아닐까요? 달리 말하면, 우리 각자는 나 자신과 남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이중잣대>를 알게 모르게 적용하는 것은 아닌가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모순’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그 대표적인 그룹의 하나로 ‘바리새인들’을 보여줍니다. 저는 단순히 또 한번 바리새인이라는 나와 무관한 한 그룹을 비판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그 바리새인의 모습 속에서 진실하게 우리 각자의 모습을 발견함으로써 겸손히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주의 신실한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사실 우리 인간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어쩌면 ‘남의 시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가 이런 말이나 행동을 하면 남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가 늘 우리의 관심이고, 우리의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주께서 만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병든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 그리고 그 당시 유대종교 지도자들로 대표되었던 ‘바리새인들’도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이들 모두에게 그분의 돌보심과 능력의 손길로 함께 하심으로써 병들고 약한 그들의 심령과 육체를 치유하셨던 것을 봅니다. 그러나 유독 이들 가운데 바리새인들과는 우리 주께서 평화로운 관계를 갖지 않으셨다는 점을 저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이들 바리새인들과 부딛친 것일까요? 이것을 성경학자들은 분석하면서 ‘예수께서 그 당시 유대종교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바리새인들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했기 때문이다’ 든가 혹은 ‘주께서 그들의 치부를 드러내셨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합니다. 우리가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이와 같은 부딪힘을 여러 사건에서 보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들이 바리새인들을 말할 때면 십중팔구는 부정적인 의미를 그 단어를 사용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바리새인 같군요’라고 말한다면, 그 말에 기뻐하거나 반가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매우 기분 나빠 하거나 모멸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만큼 바리새인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부정적인 의미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로 돌아가 본다면 사실 바리새인들은 (대다수) 유대백성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았던 종교 지도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유대인들 사회에서 가장 신뢰받는 사람들이 ‘랍비’ (선생)들인데, 예수님 당시 이 랍비들의 상당수가 바리새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헬라어/ “파리사이오스”)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인 “페루쉼”에서 나온 것인데 그것은 <분리된 자>라는 뜻입니다. 기원전 2세기경에 유대교를 박해하던 헬라 정책에 맞서서 <모세의 율법과 유대전통>으로 자신들을 세속적인 것들로 부터 분리시킴으로 지켜 나가고자 했던 자들이 바리새인의 역사적 유래가 됩니다. 그래서 주님 당시에 유대교의 여러 분파들 중에서 이 바리새파는 율법을 가장 엄격하게 지킴으로 유대인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엄격한 율법준수의 추구는 심각한 자기모순으로 심화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했던 열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신이 지키지도 못한 율법을 마치 다 행한 것처럼 속이고 또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강요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 모순>이요, 바로 오늘 본문에서 주께서 지적하시는 <바리새인의 누룩>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다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누룩’이 무엇입니까? 누룩은 빵을 만들 때 밀가루에 넣어두면 빵이 만들어지면서 크게 부풀어 오르게 하는 “효모가루”입니다. 실제로는 그렇치 않는데, 빵 사이에서 효모가 발효함으로써 가스가 생겨 빵을 크게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이 누룩이 하는 역할입니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도 ‘과장’하고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자들이 바리새인이라고 주님은 고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입니다.

여기서 ‘외식’ (혹은 위선)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hypocrisy’라는 말인데, 헬라어 원어 ‘페르소나’는 고대 그리스시대에 배우가 연극을 할 때 <얼굴에 쓰는 가면>에서 유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배우가 가면을 쓰고 연극하듯,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적인 자가 ‘외식하는 자’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와 같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모습’이 바리새인들의 치명적인 영적 문제임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도 짐작하시겠지만, 제가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여러분과 생각하기 원하는 것은 바리새인은 나쁜 사람이라고 판단하자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속에는 너나 할 것이 ‘바리새인의 외식’이 잠재해 있다는 영적 사실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는 오늘 주님의 도전이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 가운데서 ‘천국시민의 헌장’이라고 불리어 질만큼 성도가 행할 믿음의 삶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하신 대표적인 말씀이 ‘산상수훈’입니다. 주님은 그 산산수훈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 7:1~5)고 말입니다. 이 주님의 날카로운 지적에서 볼 수 있듯이 외식하는 자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의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요즘 하는 말로 ‘내로남불’이라고 부릅니다. 이 지점에서 제가 한가지 엄중한 진실 한가지를 말씀드린다면, 여러분과 저 우리 모두는 자신을 객관화하기 매우 어려운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난 주에 “악인에겐 평화가 없나니” (사. 48:22)는 설교 말씀을 나누면서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설교말씀을 통해 우리 인간 속에는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우리 자신은 본질적으로 나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모순된 존재임을 우리는 인식하고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우리의 영적 상태를 인식하고 인정한다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일까요? 왜냐하면, 이것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외식하는 자’ (=위선자)에 대한 우리 주님의 영적 도전을 하고 계심을 <누가복음 12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외식에 빠지고자 하는 사람들을 향해 ‘두려워 하지말라’ 고 도전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외식 (=바리새인의 누룩)에 빠지면 빠질수록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눅. 12장 1~12>을 통하여 주님은 ‘외식에 빠진 자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한마디로 <두려워함>이라고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자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먼저 ‘누가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자’일까요? 그는 바로 <사람과 악한 영들>입니다. “몸은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 (v.4a) 곧 인간과 악한 영들입니다. 이런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v.4b)고 우리 주님은 도전하십니다. 반면에 주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v.5)고 말씀하십니다. 누구십니까?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우리의 행위를 따라 선하신 뜻대로 판단하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주님은 또한 동시에 본인 자신과 성령님을 두려워해야 함을 지적하십니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v.8~9)고 말씀하시고,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v.10) 말씀하십니다. 성부 하나님과 같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은 본질상 동일하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심을 주께서 밝히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께서 강조하시는 요점은 ‘위선자의 특징은 사람의 눈은 두려워하면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눈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자는 두려워하고, 정작 두려워해야 할 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솔직히 여러분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사람의 눈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눈입니까?

이제 저는 주께서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이 빠지게 되는 올무 (snare) 즉 ‘바리새인의 누룩’에 따지게 되는 자들의 몇 가지 특징들을 살펴봄으로 우리 자신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여러분은 위선의 늪에 빠진 자들의 특징? 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첫째), 정직하지 못함을 볼수 있습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자들의 대표적 특징은 정직하지 못함을 알수 있습니다. 있으면 있는데로, 없으면 없는데로 말하지 못합니다. 어떤 것은 부풀리고, 어떤 것은 있는 것도 애써 감춥니다. 왜일까요? 사람의 판단이 두려운 것입니다. 이것이 심각한 것은 이런 부정직한 위선의 유혹은 예수님의 도전과 심한 꾸지람을 받았던 바리새인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수제자였던 신실한 베드로도 피할수 없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갈라디아서>를 읽어보면 <갈.2장>에서 베드로가 어떻게 <바리새인의 외식>에 걸려 넘어지게 되었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차별이 존재하지 않음을 믿었으면서도, 야고보가 보낸 할례받은 그리스도 형제들의 판단을 두려워하여 외식적인 행동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갈. 2:12~13).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크신 눈을 의식하지 못하고 인간의 눈을 의식할때,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 행동하기 보다는 감추고 부풀리는 외식의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정직’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가장 심각하게 우리를 다루시는 핵심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믿음을 통하여 올바르게 이어가는 핵심적인 것이 ‘정직’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처음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을 피하고 숨었듯이, 정직하게 죄를 고백하지 못하고 남의 탓을 했듯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못한 것이 그 무엇보다도 내가 현재 위선으로 빠질 수 있는 위험성에 있음을 우리는 자각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정직히 나아오고 있습니까?!

            다음으로)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함을 봅니다. 주님은 <눅. 18장>에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관한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 주된 내용은 이러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영적 교훈은 무엇일까요?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진정한 겸손과 회개로 나아갔지만, 바리새인은 스스로 자랑과 세리에 대한 업신여기는 높아진 마음을 볼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바리새인은 안타깝게도 자신 또한 옆에 있는 세리와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받아야 마땅한 죄인이요, 오직 그분의 긍휼하심을 구해야 할 존재임을 자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반대로 그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착각하고 “이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갈. 18:11)라고 어리석은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외식을 행하는 자의 또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이 이와 같이 자신의 정확한 존재인식, 즉 ‘영적 상황인식’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스스로 높아져 있고, 자기만족에 도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의 삶은 그럼으로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겸손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회개해야 할 필요성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자기기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자신을 성령의 빛으로 겸손하고 진실하게 비춰보지 못할때, 잘못된 자기 진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결코 죄 없다고 인정함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갈. 18:13)는 자에게 의롭다고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계하십니다. 이 누룩은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사람들을 두려워함으로 비롯된 위선적인 삶입니다.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 속에 존재하고 점점 더 내 존재에 퍼져 나가는 영적 누룩은 없습니까? 내 눈속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끌은 지적하는 우리 자신의 모순은 없습니까? 바라기는 더욱 겸손하게 나 자신을 성령의 빛으로 밝히 보고, 옆에 있는 형제 자매를 오직 사랑으로 섬기는 진실한 주님의 제자들 모두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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