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10, 2021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But Even If He Does Not)

Preacher:
Passage: 다니엘 (Daniel) 3:17~18
Service Type: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But Even If He Does Not)

10-10-21

본문말씀: 다니엘 (Daniel) 3:17~18

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If we are thrown into the blazing furnace the God we serve is able to save us from it, and He will rescue us from your hand, O king.)

18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But even if He does not, we want you to know O king, that we will not serve your gods or worship the image of gold you have set up.”)

[설교 요약]

            <다니엘 3장>은 느브갓네살왕이 그 거대한 신상은 만들어 제막식을 거행하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악기 소리와 함께 바벨론의 참석한 고관대작들은 일제히 그 신상 앞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그러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두말할 것없이 그들은 ‘우상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느브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단. 3:16~17)라고.

세 친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전적 돌보심>을 믿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한 풀무불에서 건져 내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믿음의 정수는 다음에 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v.18) 라고.

무엇이 ‘그리 아니하실찌라도’입니까? 그것은 ‘설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서 견져내시지 않는다 할찌라도’ 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이들은 죽음을 초월한 이런 놀라운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최선으로 인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 극렬한 풀무불에서 자신을 건져내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무엇이 자신들에게서 가장 좋은 것인지를 아시는 하나님이 내리신 섭리임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순교)은 끝도 아니요 실패도 아니요, 믿음의 승리임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우상숭배일까요?’ 이 우상숭배는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거짓 신의 형상일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우상임을 알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선언했듯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 1:23)는 것입니다.

이 우상은 ‘금과 나무로 신상’ 뿐 아니라 우리가 은밀히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곧 ‘돈’ ‘명예’ ‘육체의 정욕’ ‘가족’ ‘야망’ 그리고 ‘신념과 철학’까지도 자신의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상황과 형편에 따라 변질되는 믿음이 아니라, 전능하시고 가장 좋은 것으로 그의 자녀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의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항상 기쁨과 즐거움만 있는 삶이 아님은 성도 여러분 모두 공감할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원하던 원치 않던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고 눈물의 언덕을 넘어가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려움을 겪고 마음의 고통을 떨쳐 버릴수 없는 상황을 우리는 때로 피할수 없게 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요점은 우리 자신의 실수와 잘못에 따른 고통과 아픔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지키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고난과 댓가지불의 삶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의 시간을 걸어가면서, 여러분과 저는 이렇게 자문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열심히 잘 믿는데,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런 고통과 어려움을 안겨주십니까?”라고 마음 속으로 절규하게 됩니다.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함께 묵상해 보기 원합니다. 이를 통해 오늘 본문의 믿음의 세청년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이 세상을 향해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 금신상에 절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용감하게 선포하고, 그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 되시길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다니엘 3장>은 바벨론 제국의 느브갓네살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드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그 거대한 신상은 높이가 27m, 2.7m의 금신상으로써 바벨론의 넓은 두라 평지에 세워졌습니다. 그 신상이 세워진 해는 느브갓네살이 바벨론을 통치한지 18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바로 BC 587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왕은 자신의 통치 기간동안 세계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의 하나답게 여러 민족과 나라를 정복하고, 언어와 문화가 다른 여러 민족들을 다스려 나갔던 것입니다.

아마도 느브갓네살 왕은 그 자신이 정복한 여러 민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더 강력한 왕권으로 다스리기 위한 작업의 하나로 ‘종교화’작업을 한것을 볼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고대 국가에서 볼수 있듯이 자신이 믿는 신의 형상, 곧 신상을 만들어 그 앞에 절하게 하는 것입니다. 소위 말해, 우상숭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느브갓네살은 자신이 정복한 각 나라와 지방의 장관과 대신들과 총독들, 고문관과 재무관, 판사, 법률가들과 모든 지방관리들까지 자신이 세운 금신상의 제막식에 참석하도록 명령한 것입니다. 그 당시 다니엘의 세친구는 <단. 2장> 끝부분에 기록된데로 다니엘의 추천을 통해 바벨론 제국의 여러 지방관리로 흩어져서 살았었던 바로 왕의 신상 제막식으로 인해 여러 흩어져 있는 고관대작과 함께 신상 제막식에 참석하게 된 것입니다.

한가지 궁금한 것은 그 많은 왕의 주요 인사들 중에 다니엘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한 설교자는 설명하면서 느브갓네살이 매우 아꼈던 지혜와 하나님의 영에 충만했던 다니엘을 그가 멀리 출장을 보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이 여기 있었다면 분명히 우상 앞에 절하지 않았을 것을 그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왕은 그가 꼭 필요한 존재였기에 그를 살리고자 일부러 멀리 출장 보냈다는 것입니다. 설득력 있는 고관대작과 함께 신상제막식에 참석하게 된 것입니다. 어찌됐건 제막식 행사는 시작되었고 먼저 한 전령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는 각종 악기 소리가 울리면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금신상에서 절하라’ (v.4~5)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신상에게 엎드려 절하지 않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을 것이다’라고 경고했습니다.

드디어 나팔과 각종 악기가 크게 울렸고 두라평지의 넓은 들판에 수많은 사람들은 왕의 신상 앞에 일제히 엎드려 절했습니다. 그런데, 세 친구들은 그 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 넓은 들판에 일제히 납작 엎드리는데, 세명만 꼿꼿히 서 있으니 얼마나 눈에 잘 띄었겠습니까? 이것을 목격한 자들이 왕에게 그들을 고발했습니다. 그들이 왕의 신상 앞에 절하지 않는다고. 그럼에도 왕은 그들을 아꼈기에 그나마 한번 더 기회를 줍니다. ‘만약 지금이라도 악기 소리와 함께 신상에 절하면 살려주겠다’ (v. 15)고.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여기에 있어서 조금의 타협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왕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라든가 ‘한번 기도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두번 다시 생각하고 검토해 볼 필요조차도 없는 명백한 ‘우상숭배’행위임을 그들은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경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십계명의 첫번째와 두번째 명령에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말라” (출. 20:3) 그리고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을 섬기지 말라” (출. 20:4~5) 고 명하신 것을 지켜야 하는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럼으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에게 대답했습니다. “느브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니이다” (단. 3:16~17)라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전적 돌보심>에 의지하여 담대하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더 이상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명백한 우상숭배임으로 우상에게 절할 수 없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왕의 손에서와 극렬한 풀무 불에서도 그들을 건져 낼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진정한 믿음의 정수는 다음 고백에 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v.18) 라는 고백입니다. 무엇이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라는 말입니까? 그것은 ‘설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서 견져내시지 않는다 할찌라도’ 라는 뜻입니다. 설령 그런 ‘최악의 경우가 발생한다 할찌라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우리는 왕의 금신상에 절하지 않겠습니다’는 것입니다. 왜 이들은 이런 죽음을 초월한 고백을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믿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최선으로 인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 극렬한 풀무불에서 자신을 건져내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이요 최선인지를 아시는 하나님이 내리신 선택임으로 그분의 예정하심과 섭리하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순교)은 끝도 아니요 실패도 아니요, 믿음의 승리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들의 담대한 대답은 자신들이 살든지 죽든지 금신상에 절하지 않을 것이며, 죽게 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광 가운데 다시 살리실 것을 믿는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저는 다니엘의 세친구들의 믿음을 통해 성도 여러분과 함께 우리 스스로는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 첫째는 ‘우리는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있는가?’에 대해 돌아볼 수 있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상입니까? 그것은 고대시대 때 오늘 본문말씀에 등장하듯이 돌이나 나무에 사람이나 짐승등의 모양으로 만든 조각형상에 엎드려 절하는 행위가 전부는 아닙니다. ‘우상’은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 무엇이든 우상’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매우 핵심적으로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롬. 1:18)라고 선포하고 나서, ‘누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인지?’를 계속해서 설명해 나갑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 1:21~23)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상숭배’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짐승과 벌레형상으로 바꾸어 우상숭배의 가증한 행위를 하는 자들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 곧 ‘하나님의 진노’케 하는 자인 것입니다.

누가 우상 숭배자입니까? 이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리에 그 어떤 피조물을 대신 갔다 놓고 그것을 하나님 대신 숭배하는 자입니다. 그것은 금송아지와 어떤 벌레 뿐 아니라, 오늘날 가장 대표적인 우상숭배는 ‘돈’이요 ‘성공’이요 ‘육체적 쾌락’입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것은 때로 “자신의 철학, 공부, 신념, 도덕성, 야망, 그리고 배후자와 자식 등”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단. 3장>말씀을 설교하면서 ‘존 맥아더’목사가 우리에게 도전했던 한마디를 나누길 원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에서 신앙 좋은 세 청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하는 것은 여러분의 믿음은 어떠하냐? 는 것입니다”라고. 그의 말은 옳다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말씀은 세 청년의 순수한 믿음을 강조하는 만큼, 동일한 무게로 우리 각자를 향해 질문하고 있습니다. “과연 나의 신앙은 지금 어떠하냐고?” 그리고 맥아더 목사는 우리 인간(모든 인간)이 삶을 결정하는 핵심적 원인이 있는데, 그것은 <외적 압력/ external pressure>과 <내적 원칙/ internal principal>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우리 모든 인간은 이런 외적 압력과 내적 원칙 사이에서 끊임없이 다툼으로써 삶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챤도 예외는 아닌 것입니다.

바로 참된 신앙을 지켜야 한다는 ‘내적 원칙’과 ‘외적 압력’의 치열한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신앙으로 분명히 믿는 ‘내적 원칙’을 지킬 것이냐, 아니면 오늘 본문처럼 두렵고 강력하게 배교 (=우상숭배)를 강요당한다 든지 혹은 달콤하고 교묘하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들게 하는 ‘외적 압력’에 굴복하여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 크리스챤에게도 동일하게 날마다 찾아오는 치열한 영적 전쟁의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진정으로 믿음으로 살아가고자 힘쓰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이 싸움은 더욱 치열하고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고 사도 바울이 선언한 고백한 의미입니다. 이 싸움은 얼마나 치열하던지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사도요, 그분을 위해 자기의 목숨까지도 내어 놓기를 아까워하지 않던 사도 바울에게서 조차도 날마다 자아가 죽는 아픔과 고통을 동반한 순간들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서 성도 여러분과 확인해 나가고자 하는 것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경험했던 믿음의 시험은 수천년 전에 성경에서만 한번 등장하는 드라마틱한 사건이 아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크리스챤과는 전혀 무관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이와 같은 풀무 불의 시험은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크리스챤들에게 반드시 찾아오는 시련인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자신의 마지막 편지를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쓰면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 3:12)고 선언한 이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악한 자는 더욱 악하여지고 속이는 자는 더욱 속이기도 하지만 (딤후. 3:13),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핍박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도 신앙 때문에 풀무불에 던져지는 상황을 맞이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역사는 “그리 아니하실찌라도”에서 시작됨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믿음을 붙들고 불에 던져졌을 때 던져지기 전과 비교해서 바뀐 것이 단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살갗이나 옷자락 하나도 그을리지 않고, 그을린 냄새조차도 없었지만, 바뀐 그 한가지는 오직 그들을 결박한 포승줄만 타서 없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 맹렬한 풀무불은 전혀 그들을 상하게 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들을 결박한 포승줄 만을 태워 없앤 것입니다. 그들을 온전히 자유케 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비록 원하지 않을찌라도, 극렬한 풀무 불과 같은 상황을 맞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불 가운데서도 도리어 주님의 지켜 주심과 함께 하심으로 자유케 되는 승리자의 삶을 살게 된다고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이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것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불 가운데서의 승리가 성도 여러분의 삶에서 경험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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