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3, 2021

“믿음이 없이는” (Without Faith)

Preacher:
Passage: 히브리서 (Hebrews) 11:6
Service Type:

“믿음이 없이는”

(Without Faith)

10-3-21

본문말씀: 히브리스 (Hebrews) 11:6

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And without faith it is impossible to please God, because anyone who comes to Him must believe that He exists and that He rewards those who earnestly seek Him)

[설교 요약]

            저는 그동안 몇번의 설교를 통해서 무엇이 믿음인지를 함께 살펴 본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믿음이 아닌지?’를 확인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이 아닌 대표적인 것으로써,

  • ‘맹신’은 믿음이 아닙니다: 맹신은 ‘맹목적인 신앙’입니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살펴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믿는 맹신은 믿음이 아니요, 도리어 믿음의 적입니다.
  • ‘지적 동의’는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의 다양한 지식과 신학에는 관심이 많지만, 정작 성경에서 가르쳐 주시고 삶의 실천은 관심없는 성도가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 지식을 인정하고 동의하는 것으로 그칠때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 ‘내 노력과 신념’은 믿음이 아닙니다: 지적동의의 타입과는 반대로 자신의 노력과 신념으로 삶으로 실천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점은 그 행위의 기초가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에 기초한다는데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에 기초한 행위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믿음입니까? 먼저, 오늘 본문 바로 앞 절에서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 11:5)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에녹을 표현합니다.

이제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일까요? 이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본다면,

첫째,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세상 철학에서도 ‘제 1원인자’로, 과학에서도 ‘우주존재의 근본원인’이라는 이름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들은, 창조자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그 존재를 ‘알수 없다’(不可知)고 규명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그 존재하는 하나님을 단순히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분과 인격적으로 교제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신 성경을 통해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계신것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우리 성도가 천국에서 받는 ‘의의 면류관’ (딤후. 4:7~8)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 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진정한 상은 밭에 감추인 보화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마. 13:44). 그분의 생명으로 구원받을 뿐 아니라, 그분 안에서 누릴 모든 하늘과 땅에 속한 상급인 것입니다.

바라기는 영원한 복의 근원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참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만약 오늘밤 성도 여러분이 우리 주님을 다시 만난다면, 여러분은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었습니까? 저는 이러한 물음에 대해 여러분이 “저는 주님 만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혹은 “저는 아직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하신다면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 근거가 여러분의 행위에 근거한다면 그것은 그리 훌륭한 판단이 아닙니다. 그 근거는 결코 여러분의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멋진 삶을 살았느냐, 혹은 고결한 삶을 살았느냐, 희생적인 삶을 살았느냐에도 있지 않습니다. 그 근거는 오직 ‘믿음’ 밖에 없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시요, 또한 그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우리를 위해 피흘려 죽게 하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 크리스챤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면서도 가장 많이 오해하고 그릇되게 적용하는 믿음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좀더 올바르게 깨닫아가는 시간되기 기대합니다.

저는 그동안 몇번의 설교를 통해서 무엇이 믿음인지를 함께 살펴 본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위해 역으로 ‘무엇이 믿음이 아닌지?’를 확인해 나감으로 그 믿음을 깨닫아 나가고자 하는 방법을 사용하였음을 기억합니다. 첫째, 저는 ‘맹신’은 믿음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맹신’은 무엇입니까? 맹신은 ‘맹목적인 신앙’입니다. 그것을 이성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살펴보지 않고 덮어놓고 믿는 것, 즉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맹신입니다. 이것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다음으로 ‘지적 동의’도 믿음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성경의 다양한 지식과 신학에는 관심이 많은 성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관심가지는 것은 지식 자체이지 삶으로 실천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타입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그것을 통해 내가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핵심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지적 동의’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영적인 ‘지적 유희’를 즐기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내 노력과 신념’은 믿음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이런 타입의 성도는 앞에서 진술한 지적동의의 타입과는 반대적인 스타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타입의 성도들은 성경지식을 아는 것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점은 그들이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근본동기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기 보다는 자신의 계획과 노력 그리고 신념에 근거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들도 성경말씀을 인용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는 자신이 좋아하는 말씀을 취사선택하고,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에 성경을 짜집기 한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먼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에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신념에 성경말씀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위험성은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설득시키려 하고, 자신의 가치관을 굽히지 않고 ‘하나님은 이러 이러 하셔야 해’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믿음입니까? 먼저 오늘 본문이 포함된 <히브리서 11장>은 성도 여러분이 잘 아시는데로 ‘믿음장’으로 불립니다. 이 믿음장에서 무엇이 믿음인지를 영적으로 잘 정의할 뿐 아니라, 특별히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핵심적으로 집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와 여러 믿음의 용사들의 믿음의 삶을 예를 들어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히. 11:6>은 구체적으로 볼 때 히브리서 기자가 ‘에녹’의 믿음을 예를 드는 가운데 표현한 문장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절 <5절>에서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 11:5)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에녹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여기서 에녹의 3가지 믿음의 특징을 보게 됩니다. 첫째,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 (창. 5:19~24)이고, 둘째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다>는 것이며, 셋째 그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는 의미는 에녹 자신이 자기의 양심 가운데 이런 증거를 지니고 있었고, 성령께서 그것을 그의 심령에 증거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에녹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가졌던 믿음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에녹의 특성에서 살펴본데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수 있도록 그를 인도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무엇이 믿음입니까?” 이 믿음에 대한 질문에 대해 저는 오늘 말씀 가운데서 믿음의 중요한 본질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히브리 저자는 믿음의 중요한 특성을 설명하면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v.6a)라고 주장합니다. 무슨 말 입니까?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고 참으로 기뻐하시는 것은 어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빠진다면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단지 근심시키고 진노케 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일까요? 그것은

첫째,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중에 과연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오늘 말씀에서 정의한데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이라는 것은 올바른 믿음을 가지게 되는 열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이해한다’는 뜻과 같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이 그분이 계신 것을 믿는 단초가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저는 여기서 성경의 <교리적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적지 않은 청년 크리스챤들 중에는 ‘기독교 교리를 잘 이해한다’는 말과 ‘율법적으로 된다’는 말을 동일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저는 교리 같은 복잡하고 까다로운 것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순수하고 확실하게 하나님을 믿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한가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믿는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기 위해선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인정해야 하는 진실은 인간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이해하는 만큼 그분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결여될 때, 제가 서두에서 지적했듯이 우리 인간은 필연적으로 ‘맹목적 신앙’으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진리의 두루마리를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영적으로 깨닫아 가는 과정이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믿는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 상당한 허상일 수 있음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사실 세상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 중에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듯이 세상 만물을 창조한 전능한 존재, 즉 창조주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창조주를 우리 크리스챤이 믿는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이해합니다. 이 전능한 존재는 세상만물을 창조했지만, 창조한 이후에는 더 이상 창조세계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지 세상만물이 유지되고 운행되어지는 법칙으로만 이 창조주는 존재한다고 그들은 믿습니다.

그럼으로 이런 초월적인 신을 인간은 결코 알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해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불가지론자’ (agnostic) 라고 부릅니다. 즉 사물의 본질, 더 나아가서 사물을 창조한 신의 존재를 우리 인간은 이해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불가지론자’인 것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적 그룹은 철학자나 과학자들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불가지론자가 이해하는 하나님과 크리스챤이 이해하는 하나님은 실로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불가지론자가 한가지 분명하게 이해한 진실이 있는데, 그것은 창조자 하나님이 만약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인간을 비롯한 그 어떤 피조물도 결코 그분을 스스로 깨닫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놀라운 성경의 진실은 그 창조자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 인간에게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셔서 스스로를 드러내심으로 우리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고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가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이해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더 나아가서 그 살아 계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기 원하시고, 삶에서 열매 맺게 하시는 하나님임을 성령을 통해 확신하고 삶으로 경험함으로 그분을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하나님은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은 상주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무엇을 뜻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신약성경에 보면 여러 곳에서 주님은 믿음을 붙들고 달려온 자들에게 ‘의의 면류관’이라는 상을 허락하실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도다)” (딤후. 4:7~8)라고 말입니다. 물론 우리 크리스챤들의 최종적인 소망은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과 약속하신 의의 면류관일 것입니다. 과연 의의 면류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가 구체적으로 다 알 수 없다고 해도 그것은 관계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의 면류관’ 곧 ‘상’은 이 세상에서 받는 그 어떤 상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영광스럽다는 것만큼은 우리가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이심이 대한 이해에 있어서 그 ‘상’이 본질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성도의 믿음에 매우 중요함을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상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어느날 우리 주님께서 천국을 영적으로 설명하시는 가운데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 13:44) 여기서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밭이고 무엇이 보화일까요? 먼저 ‘복음은 보화가 감춰진 밭’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 밭에 감춰진 보화’임을 우리는 깨닫아야 합니다.

주석가 매튜헨리는 이 본문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이 밭에 숨겨진 보화를 발견하고 그 보화가 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큰 기쁨이다. ~ 밭에서 이 보화를 발견하고 그 보화의 가치를 올바로 깨닫는 자들은 그 보화를 소유하기까지 결코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것이다. ~ 그러므로 그는 이 밭을 사기로 결심한다. 복음이 요구하는 조건에 따라 복음이 제공하는 것을 영접하는 자들은 이 밭을 산 것이다. 따라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산 그는 보화를 캐는 데 전념하게 된다. 바로 그리스도를 쟁취하여 그에게서 진정한 유익을 발견하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다”라고. 성도 여러분, 참된 믿음은 밭에 감추인 보화되신 예수 그리스도, 천국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분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창세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하늘과 땅의 모든 충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은혜로 넘치게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으로 간절히 찾는 자에게 주시는 그분의 상급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믿음으로 보화되신 예수님을 더욱 풍성히 발견해 나가고 있습니까? 그분 안에서 천국의 기쁨과 풍성함을 날마다 누려 나가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믿음입니까?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대하시고 기뻐 받으시는 믿음입니까? 성도 여러분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나를 사랑하시데 끝까지 사랑하시고 나와 영원한 생명의 관계를 맺어 나가길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십니까? 바로 우리의 영원한 복의 근원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마음과 성품과 뜻을 다해 사랑하고 그 분을 추구함으로써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이런 복된 믿음으로 주님 만나는 날을 오늘 이 시간부터 준비하는 성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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