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25, 2022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My Eyes Have Seen Your Salvation)

Preacher:
Series:
Passage: 누가복음 (Luke) 2:28~33
Service Type: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My Eyes Have Seen Your Salvation)

12-25-22

본문말씀: 누가복음 (Luke) 2:28-33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Simeon took Him in his arms and praised God, saying:)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 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Sovereign Lord, as you have promised, you may now dismiss your servant in peace.)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For my eyes have seen your salvation,)

31 이는 만민 앞에 예배하신 것이요 (which you have prepared in the sight of all nations:)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a light for revelation to the Gentiles, and the glory of your people Israel.”)

33 그 부모가 그 아이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The child’s father and mother marveled at what was said about Him)

[설교 요약]

          오늘 본문말씀은 지난 주 첫번째 성탄절 메시지의 본문말씀 <눅. 2:4-7>에 이어지는 두번째 말씀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고, 난지 40일이 되었을 때 율법을 따라 정결케 하는 <정결예식>을 드리고자 부모에 안겨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던 것입니다 (v. 21~24).

그런데 부모들이 그를 안고 올라왔을 때, ‘시므온’이라 이름하는 한 ‘의롭고 경건한 사람’과 마주쳤습니다. 한가지 놀라운 것은 성령께서 그에게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v. 26)고 알려 주셨다는 것이고, 드디어 그는 자기 앞에 있는 ‘그리스도’를 목격했습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두 팔에 안고 감격에 겨워 하나님께 송축했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v. 29-30)라고.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어린 아기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메시야)를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물론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요, 그럼으로 성령께서 그에게 그것을 깨닫도록 임하셨기 때문이겠지만, 그는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 (v. 25)라고 저자 누가는 시므온을 설명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위로를 바라며 남은 자’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민족이 바닷가에 모래 같이 많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로마서 9:27>의 선언과 같이 말입니다.

또한 시므온은 약속한 아기를 목격할 뿐 아니라, 성령의 충만으로 놀라운 예언을 마리아에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v. 34-35)고. 이런 '시므온의 예수님에 생애에 대한 예언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 주께서 분리시킬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장차 예수님은 그를 영접한 사람을 영원한 생명으로 흥하게도 하시고, 거부하는 자를 심판으로 패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v. 34)라고.
  • 주께서 고난 받으실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v. 34b-35a)라는 그의 예언과 같이 주님은 많은 멸시와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요, 우리의 죄사함을 위함입니다 (사. 53:3-5)
  • 주께서 드러내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v. 35b)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 인간의 죄악을 남김없이 더러내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선물로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시므온과 같이 ‘남은 자’가 되어 성탄절의 주인공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날마다 자라 나시길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성탄절 하루 뿐 아니라 임마누엘 되신 예수님이 여러분의 진정한 주인으로 다스리시는 축복된 삶 사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오늘 크리스마스 주일을 맞아 탄생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에게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성탄절 오늘 본문 말씀은 지난 주에 이어 <누가복음 2장>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에 살았던 ‘시므온’이란 한 사람이 아기 예수님을 보고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v. 30-32)라고 말입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이 주의 성령의 은혜 가운데 영의 눈으로 주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그 생명의 빛되신 예수 안에서 날마다 거하는 복된 삶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지난 주 첫번째 성탄절 메시지의 본문말씀 <눅. 2:4-7>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윗의 고향 땅,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우리 주께서 태어나신 사건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통상적으로 유대인들은 사내 아이가 태어나면 율법에 따라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 주님도 그 부모들에 의해 할례 받으셨음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눅 21). 또한 유대인들은 산모가 아이를 낳고나서 일정한 기간 (사내아이는 40일, 여자아이는 80일)이 지나면 규례대로 예물을 제사장에게로 가지고 가서 속죄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녀를 해산한 산모는 부정하게 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율법의 규정에 따라 부정하게 된 산모와 아이를 위해 정결케 되는 예식을 행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 부부의 첫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첫 아들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따라서, 아기 예수를 하나님께 번제와 속죄제로 대신하여 드리기 위하여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로 제사하고자 그 부모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한가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지난 주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의 탄생에서도 알수 있듯이, 주님의 부모들이 형편이 넉넉치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에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로 제물을 대신하도록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루살렘에 올라 갔을 때, ‘시므온’이라는 사람과 마주쳤습니다. ‘시므온’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v. 25)라고. 그는 한마디로 ‘의롭고 경건’ (righteous and devout)한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누가는 말하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저는 한마디로 그를 ‘남은 자’ (remnant)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자는 누구일까요? 사도 바울은 <롬. 9-11장>에서 자기 동족,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구원에서 제외된 그 불행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취소된 것 같지 않도다’라고 선언함을 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런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남은 자’를 남겨 두셔서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의 계획을 완성하실 것을 성령의 충만 가운데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이렇게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 9:27)라고. 저는 오늘 말씀의 시므온과 그에 이어서 누가가 소개한 신실한 믿음의 여인 ‘선지자 안나’가 또 한 명의 이스라엘의 남은 자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바로 예수께서 아기로 이 땅에 오실 당시 참된 믿음 가운데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린 소수의 ‘남은 자’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시므온이 기다린 “이스라엘의 위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 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말씀이 이어지는 말씀인 것입니다.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v. 26)라고. 시므온은 성령의 충만을 통해 자신이 죽기 전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 즉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라는 증거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가 언제 이런 지시를 받았는지, 받고서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알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눈을 감기 전에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를 목격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자신 앞에 엄마의 품에 안겨 다가오는 아기를 바라보며, 그 아기가 메시야이심을 성령의 감동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는 감격가운데 아기를 안고 이렇게 소리쳤던 것입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v. 29~32)라고.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 시므온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예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v. 34-35)고.

“시므온은 지금 무엇을 예언하는 것일까요?” 그것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시므온이 그리스도의 삶이 무엇인지를 핵심적으로 예언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첫째 ‘주께서 분리시킬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v. 34)라고. 이것은 그분 앞에서 어떤 자는 흥하게 되고, 어떤 자는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살아가는데 큰 도움을 주고, 인생의 지표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 그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운명을 갈라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를 영원히 흥하게 하느냐 혹은 영원히 망하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로 구원자 되신 그 분 자신 앞에서 한사람도 예외 없이 두 그룹으로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흥하게 하느냐 망하게 하느냐’로 말입니다.

둘째, ‘주께서 고난 받으실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v. 34b-35a)라고 시므온은 예언합니다. 그 아기가 장차 많은 비방과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언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700여년 전에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 매우 구체적으로 선포된 바 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사. 53:3)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무슨 잘못을 행한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그에게는 전혀 잘못과 허물이 없는 것입니다. 그가 이런 비방과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시므온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생애는 그녀를 기쁨과 감사와 소망이 됨과 동시에 아픔과 심한 고통을 그녀에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칼로 그를 찌르듯이 그녀의 마음을 찌를 것임을.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손과 발이 못에 박히고, 옆구리가 창에 찔려 모든 피를 남김 없이 흘리고 죽으셨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을 어떤 칼보다도 더욱 날카롭고 고통스럽게 찌르는 것으로 클라이막스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셋째, ‘주께서 드러내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v. 35b) 예수님의 생애와 그 사역은 결국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고 폭로케 할 것임을 시므온은 선언합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경계하시면서,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눅. 12:2)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교묘하고 세련되게 자신의 모습을 과장하고 포장한다 할찌라도, 예수님의 눈을 속일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위선과 죄악을 일거에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대제사장,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주님을 그토록 미워하고 죽이고자 혈안이 되었던 중심된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위선과 치부를 백일하에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의 진리와 의로움의 잣대로 동일하게 우리에게 적용하셨고, 부패한 거짓된 마음을 드러내심으로 우리의 죄성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께 회개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살리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멸망으로 이끄는 거짓된 칭찬이나 축복이 아니라, 생명으로 이끄는 썩고 냄새나는 환부를 도려내는 고통의 영적 수술을 통해서 말입니다. 주님은 실로 우리 모든 인생의 의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안고 기쁨과 감격에 충만한 시므온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이 모습은 시므온 한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의 모습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시므온은 그 아기가 어떤 모습으로 자라나며 어떻게 그 권능의 사역을 행할 것인지를 전혀 알수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성령의 증거하심을 통해 그 아기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그리스도이심을 깨닫았을진데,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피로 구원받았고 주님의 영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거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시므온과 오늘날 우리 거듭난 성도가 만나는 지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은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대와 환경과 민족은 다르다 할찌라도,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따라 남겨두지 진정한 ‘영적 이스라엘’,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남은 자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2년 크리스마스도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은 특별히 주일이자 성탄절을 맞아 오늘 함께 모여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영적 눈이 여전히 어두워 있다면, 그리고 우리의 귀가 여전히 닫혀 있다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되신 예수님을 우리는 아직도 바로 깨닫지 못하고 그분과 함께 복된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말입니다. 오늘 ‘시므온’의 모습이 우리에게 도전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2천년전 시므온과 같이 이 땅에 아기로 오신 메시야를 알아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 메시야의 사역을 완성하셨고, 그분을 통해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그분이 누구신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주님의 영,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감으로 점점 더 믿음에서 자라나가고 장성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성장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아들과 딸로 삼으신 목적임을 믿습니다. 이런 마지막 때 하나님의 남은 자로 크리스마스의 주인되신 예수님의 그 풍성하심과 영광을 더욱 깨닫음으로 승리하고 열매 맺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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