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18, 2022

“베들레헴의 말구유” (A Manger of Bethlehem)

Preacher:
Series:
Passage: 누가복음 (Luke) 2:4-7
Service Type:

“베들레헴의 말구유”

(A Manger of Bethlehem)

12-18-22

본문말씀: 누가복음 (Luke) 2:4-7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So Joseph also went up from the town of Nazareth in Galilee to Judea, to Bethlehem the town of David, because he belonged to the house and line of David.)

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He went there to register with Mary, who was pledged to be married to him and was expecting a child.)

6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While they were there, the time came for the baby to be born,)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and she gave birth to her firstborn, a son. She wrapped him in cloths and placed him in a manger, because there was no guest room available for them.)

[설교 요약]

저는 이번 주와 다음 주 두주에 걸쳐 성탄절 메세지를 성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누가복음 2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v.1)라고.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에 의한 호적령이 오늘 말씀에서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가서 아기 예수님을 낳게 되는 배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미가 5:2)는 미가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인 것입니다.

저는 특별히 ‘왜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태어나셔야만 했는지?’에 대해 매튜 헨리의 주석을 통해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먼저 “예수께서 ‘사관’ (=여관)에서 태어나신 것은?”

  • ‘주님은 이 땅에서 잠시 머물기 위해서라는 것’ 입니다
  • ‘사관처럼 주님도 우리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 입니다 (물론 사관은 값을 지불해야 하지만, 주님은 자신에게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값없이, 돈없이’ 받으심/사.55:1)

더욱이 “예수께서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은?”

  • ‘그의 부모가 가난했다는 사실’
  • ‘그 시대상황이 몰인정하고 강퍅했다는 사실’
  • ‘상징적인 주님의 겸손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주님을 태어날 때만이 아니라, 평생을 ‘머리 둘 곳도 없는’ 빈손의 삶을 사셨고,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은 그분의 겸손과 사랑의 절정이었음)

이제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 빈방을 내어 드리고 있습니까?’ (인간의 영적 상태는 2천년전 베들레헴 뿐 아니라 오늘날도 마찬가지) 여기서 예수님께 우리의 빈방을 내어드린다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 만이 아니라, 그분과 계속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어 나감을 뜻합니다.

이것을 잘 깨닫게 해주는 것이 <요한계시록 3장20절>말씀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를 향해 이렇게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라고. 바라기는 크리스마스 시즌 뿐 아니라, 평생의 삶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복된 삶 사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이번 주와 다음 주 두주에 걸쳐 성탄절 메세지를 성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두주 모두 <누가복음 2장>말씀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해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연말 분위기와 거리의 울려오는 달콤한 캐롤송이, 혹은 크리스마스 선물이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는 주된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는 어떠합니까? 여러분도 크리스마스를 통해 기대하거나 경험하는 것이 그것이 전부라면 뭔가 부족한 것이 아닐까요?!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자, 우리 믿음의 주인되신 예수님을 성도 여러분은 더욱 알아 나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크리스마스 뿐 아니라, 여러분 인생의 주인이 되고 있습니까? 바라기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더욱 자라나가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약속하신 은혜를 누려 나가는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성도 여러분 대부분 잘 아시는데로, <누가복음 2장>의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출생에 전후한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v.1~3)라고.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자신이 다스리는 로마제국 영토 아래 있는 모든 백성들에게 명령을 내려 호적등록을 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그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구레뇨’에 의해 유대지역에 호적 (=본적)을 둔 백성들이 각각 호적신고를 행하고자 고향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 당시 이렇게 호적신고를 통해 호구조사를 하는 주된 이유는 ‘세금징수’와 ‘군대징집’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요셉과 그와 정혼한 마리아가 요셉의 고향 땅인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했고, 그때 마리아는 이미 만삭의 임신 상태였습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v.4-5)라고. 그런데 ‘임신한 엄마나 태어날 아기’에게 있어서 지금 현재의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음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산모는 그동안 긴 여행 (약 90km)으로 인해 지쳐 있었고, 더 큰 문제는 이들 부부가 묵을 공간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타지에 나가 살던 많은 사람들이 호적을 위해 고향으로 한꺼번에 몰려옴으로 인해, 그곳 베들레헴의 여관들 (=숙박시설)이 방 한 칸도 남지 않고 완전히 차 버렸던 이유라고 여겨집니다.

이것이 저자, 누가가 아기 예수께서 태어날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기술하는 배경인 것입니다.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v.6-7)라고. 이제 제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왜 아기 예수님은 말 구유에서 태어나셔야 한 것인가?”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즉각적인 답을 저 또한 압니다. 방금 살펴본대로 그들이 묵을 어떤 빈방도 그 당시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현실적인 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진정한 대답이 아니라는 것도 우리는 압니다. 왜냐하면, 천지만물을 만드실 뿐 아니라 인간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독생한 아들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는데 ‘방 한 칸’ 마련할 능력이 없는 하나님이 아니심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아담의 윈죄를 물려 받지 않은 완전한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시고자, 성령을 통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하게 하신 권능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또한 선지자 미가의 예언을 성취시키시고자 인간을 구원할 메시야를 다윗의 동네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미가 5:2)라고 미가가 예언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지자 미가의 예언을 성취시키시고자 로마제국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하신 아들을 다윗의 고향 동네 베들레헴에서 예언을 좇아 나게 하시고자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를 사용사셔서 온 천하에 호적령을 내리게 하시고, 그 주인공인 아기 예수께서 한치의 오차도 없는 시점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조금 빨리 왔거나, 조금 늦었다면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독생한 아들의 탄생을 두고 온 세상을 동원하여 가장 완벽한 권능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가 태어날 방한 칸도 마련할 수 없어서 ‘말구유’ 곧 ‘말 밥통’에서 태어나게 하신다는 것이 여러분은 이해가 됩니까? 물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잘압니다. 그렇다면 ‘왜 아기 예수님은 말 구유에 태어나셔야 만 한 것일까요?’ 저는 우리 주께서 태어난 그 상황은 바로 그 당시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단적으로 밝혀 보여주는 (고발하는) 것이 아닐까 여겨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영적 상태가 빛으로, 생명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5)고 요한이 선언했듯이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왜 주께서 ‘사관’에서, 그것도 ‘사관의 말구유’에서 태어나셔야 했는지는 우리 성도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큼을 우리가 영적으로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을 저는 믿습니다. 주석가 ‘매튜 헨리’는 이점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주석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주께서 ‘사관’ (=여관)에서 나신 것>에 대해서 이렇게 재해석했습니다. 그것은 첫째), ‘그분이 사관에서 머무시는 것처럼, 잠시동안만 머무시기 위해서’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셨음을 암시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여관은 찾아오는 자 모두를 받아들이듯이, 주님도 우리 모두를 받아들이신다’는 것입니다. 단지 ‘여관과 주님의 차이’가 있다면, 여관은 돈을 받지만 주님은 자신을 찾아오는 모든 자를 ‘값없이, 돈없이’ 맞아들이신다는 것입니다 (사. 55:1).

그리고 <주께서 마굿관에서 태어나신 것>에 대해서는 또한 이렇게 주석합니다. 첫째), ‘그의 부모가 가난했다는 사실’ 입니다. 만약 그의 부모가 부자였다면 그들은 방을 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그 당시의 시대상황이 매우 몰인정하고 마음이 강팍 했다는 사실’을 잘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적어도 먼 친척이긴 하다 할찌라도 친척 몇명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임신부 친족을 짐승 우리에서 자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편 그녀가 친척이 아니라 할찌라도, 일반적인 ‘인간애’ (=측은지심, 양심)만 있다고 하더라도 만삭이 된 임신부를 마구간으로 보내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주님의 겸손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주님은 지극히 낮아지셔서 우리 인간과 같이 되셨을 뿐 아니라 (빌. 2:8), 그의 33년의 전생애는 바로 낮아지시고, 죽기까지 자신을 비운 삶 그 자체였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이 땅에서의 첫 순간을 말구유에서 시작하셨으며, 그의 평생은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거처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는 삶’ (마. 8:20)을 사셨고, 마지막 순간은 우리 모두가 너무도 잘 아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대속물로 완전히 내어 놓으셔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낮추신 삶이었습니다.

저는 성도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아기 예수님이 태어날 수 있도록 빈방을 내어 드렸습니까? 물론 여러분은 ‘저는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라고 대답하시는 성도 여러분도 많으리라 믿습니다. 그것은 매우 잘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여러분의 삶 중심에 모셔 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성탄절 특집, 첫번째 말씀을 나누면서 성도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기를 권하는 것은 ‘예수님은 지금 여전히 여러분과 함께 먹고 마시고 풍성한 삶을 나누고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고 영접할 그때 뿐 아니라, 더욱 더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남으로 ‘임마누엘’되신 그분을 여러분의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우리 크리스챤의 삶의 핵심인 것입니다.

제가 한가지 확신하는 것은 주님께서는 주를 믿는 성도들과 더욱 깊고 하나되는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어 나가기를 기뻐하신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극명하게 잘 보여주는 말씀의 하나가 바로 <요한계시록 3:20> 말씀일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 사도 요한은 그의 말년에 밧모섬에 유배되어 부활하신 주님의 영을 통해 환상과 계시를 받게 되는데 이것이 요한 계시록인 것입니다. 이 계시록은 먼저 주님의 영이 흩어져 있는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보내는 메시지로 시작하는데, <계. 3:20>말씀은 그 일곱 교회 가운데 마지막 일곱번째의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메세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말씀에서 적나라하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v.15-16)는 것입니다. 주님의 엄중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안따갑게도 이런 평가를 주님께로 받아야만 했던 것일까요? 그 이유가 다음 절 이하에 나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v.17)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부요하고, 넉넉하여져서 가난한 마음과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이 되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주님을 찾지도 하나님을 갈망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v.19)고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시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어지는 <계. 3:20>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라고. 흔히 성도들 가운데 믿지 않는 분들에게 전도할 때, 많이 사용하는 말씀의 하나가 이 말씀입니다. 그분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주께서 그들을 구원하심으로 그들에게 들어가셔서 그들과 먹고 마시는 풍성한 삶을 주신다고 말입니다. 물론 이 말씀도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계. 3:20>은 주께서 이미 주님을 믿고 따랐던 그분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임을 우리는 언제나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들의 마음의 문을 주께 열라고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우리 각자는 이전 보다도 더욱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풍성한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번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며 우리 각자가 돌아보아야 할 지점이 아닐까요? 여러분은 여전히 주님을 쓸쓸히 여러분의 인생의 대문 밖에 세워 두고 있지는 않은가요? 만약 그렇다면, 안타깝게도 주님의 태어나심은 여러분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말구유의 출생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000여년 전, 베들레헴 마을, 그 어느 집도 기꺼이 자신의 집 문을 열고 우리 주님을 모셔 들이지 않고, 몰인정하게 그분을 거부했듯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구원받았습니까? 만약 아직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지 않으셨다면, 그분을 여러분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축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미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여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남으로 그분의 사랑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릴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럼으로 주님의 세밀한 사랑의 음성을 잘 듣고 이전보다 더욱 주님께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그 분과 함께 먹고 마시는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러한 삶이 더 깊어갈 때,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신 우리 주님은 이 성탄절 하루 뿐 아니라, 여러분의 평생의 삶을 통하여 진실로 영광 받으시고 또한 여러분을 영광스럽게 지켜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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