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11, 2022

“풍족한 주의 은혜” (God’s Abounding Grace)

Preacher:
Passage: 고린도후서 (2 Corinthians) 12:9~10
Service Type:

“풍족한 주의 은혜”

(God’s Abounding Grace)

12-11-22

본문말씀: 고린도후서 (2 Corinthians) 12:9-10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But He said to me,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for my power is made perfect in weakness.” Therefore I will boast all the more gladly about my weaknesses, so that Christ’s power may rest on me.)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That is why, for Christ’s sake, I delight in weaknesses, in insults, in hardships, in persecutions, in difficulties. For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설교 요약]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내는 두번째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주님의 풍성한 은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성도들과 나누고 있습니다.

주님의 그 풍성한 은혜는 바로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게 (하시는 은혜)” (v.9)라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이것은 그가 3번씩 주께 육신의 가시를 없이해 주시기를 간구했을 때, 주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그에게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는 육체의 가시를 주님의 은혜라고 깨닫은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육체의 가시를 통해 자만하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 가시를 통해 바울이 너무 자만하지 않도록 그를 지켜 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 (v.7)라고 육신의 가시를 통하여 자신을 지켜주시는 주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둘째, ‘약할 때 강하여 지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선언합니다. “이것(=육신의 가시)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v.8,9a) 라고. 주님은 바울의 오히려 약한 것들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역사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약함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육신의 가시’ (신학자들은 ‘간질’, ‘약한 안질’ 혹은 ‘외모의 열등감’등으로 추정) 일뿐 아니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모두 통칭함을 알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주의 크신 은혜로 자만하지 않고, 나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며 주의 온전케 하시는 손 안에서 더욱 겸손하게 믿음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는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길 것만 같던 가을학기도 대부분 마감되어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가을학기를 마감하고, 한 해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면서 각자 감회에 젖게 되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는 만족과 감사를, 저런 경우는 후회와 아쉬움을 느끼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사도 바울의 믿음의 진솔한 고백을 통해 함께 도전과 위로를 받는 시간되기 원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v.9)고 응답하시는 주님의 말씀 가운데 사도 바울에게 풍족하게 부어 주시는 주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를 통해 성도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에게 주시는 주의 넘치는 은혜를 더욱 깨닫아 나가고, 또한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2번째 편지의 결론부분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에게 보내는 사도의 이 두번째 편지는 그가 첫번째 편지를 AD 55년경에 쓰고나서, 1-2년이 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썼을 것으로 성경학자들은 추정합니다. 사도가 이 두번째 편지를 쓰게 된 동기는 그가 첫번째 편지를 쓰고 난 이후에 그를 대적하고 크게 모욕하던 자들에 대한 ‘엄중한 편지’ (=지금은 존재하지 않음)를 쓰고 나서, 성도들 대부분이 바울의 책망을 듣고 회개했다는 소식을 고린도에 갔다 돌아온 디도 편에 듣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가 큰 기쁨과 위로를 받았던 것이 두번째 편지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이 편지를 통해 교회가 영적으로 분리되는 것을 막고, 사도 자신과 신자들 사이에 불화를 조성하고, 거짓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을 경계함이 고린도후서의 주된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는 성도들에게 진실한 사랑을 담아 그들을 격려하고, 교회의 일부 사람들이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위에 의문을 품는 것을 염두에 두고 편지 후반부에서 그 사도 직분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 본문을 포함한 <고후 11~12장>까지의 말씀은 바울 자신의 사도권을 구체적으로 피력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내용에서 볼 때, 바울은 그 자신의 다른 서신서에서 찾을 수 없는 매우 구체적이고 감동적인 스스로의 자서전적인 삶의 단면을 밝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의 <12장>에서 바울은 그가 주께 받은 영적 능력과 계시의 영광스러움이 얼마나 큰지를 과감없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자신의 사도권을 밝힐 뿐 아니라, 그 영적 능력의 원천을 보여 주고자 함일 것입니다.

여기서 <12장>의 내용을 큰 흐름에서 살펴보자면, 제가 앞서 잠깐 언급한데로 사도 바울은 <12장>을 시작하면서 그가 주께 받은 영적 은사가 얼마나 크고 영광스러운지를 <1~4절>에서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1절>에서 표현하듯이 ‘주의 환상과 계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 사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v.2)라는 바울의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자기 스스로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가능한한 겸손하면서도, 객관적으로 받은 은사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v.4)라고 자신이 경험한 영적 체험이 얼마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것인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5절>에서 얼핏 들어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바울은 합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v.5)고 말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요? 이것은, 쉽게 말하면 자기 자신을 위하여는 ‘오직 약한 것들 만을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께 받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영적 은사에 대해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약함 만을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는 자신의 약한 것들 만을 자랑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사도가 ‘약한 것들 만을 자랑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가 앞에서 고백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영적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약함을 통해 스스로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받은 영적 복을 간직할 수 있었던 비밀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도가 오늘 본문 앞절에서 주께 육신의 가시를 떠나게 해 주실 것을 3번씩 간절히 구했을 때의 주의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v.7-8). 주님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내 은혜가 네가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v.9)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는 육체의 가시를 주님의 은혜라고 깨닫은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육체의 가시를 통해 그가 자만하지 않게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 가시를 통해 바울이 너무 자만하지 않도록 그를 지켜 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인정하듯이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수많은 축복을 잘 감사치 못하고, 도리어 이것이 마치 우리 스스로 이루어 낸 것인 양 자랑하고 스스로 높아지게 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르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완전하게 지음 받은 첫사람 아담과 하와가 아닐까요? 또한 가장 보좌 가까이에서 하나님을 경배했던 광명의 그룹 천사장이었던 사단 마귀의 타락한 이유가 아닐까요?

안타까운 진실은 완전하게 지음 받은 인간도 그리고 광명의 천사까지도 그 스스로 겸손하고 충성되게 하나님께 받은 특권과 영광을 지켜 나가는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 아니 전 우주적인 피조물의 역사를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강력하게 교훈하는 핵심입니다. 제는 이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지켜 주시는 은혜가 필요한 지점임을 믿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 스스로 표현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능력과 체험을 점점 더 누려 나가는 성도일수록 더욱 필요로 하는 것이 주님의 지켜 주시는 은혜입니다. ‘나의 약함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주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것이 어느 순간, 스스로 자고하여서 이것이 마치 자신이 잘나서 이루어진 것처럼 착각하고, 영적 교만에 빠지게 되는 그 위기의 순간을 붙들어 주는 주의 크신 은혜인 것입니다. 놀랍게도 사도는 그 주의 크고 풍성한 은혜는 자신이 간절히 없어지기를 구했던 가시(=약함)를 통해 임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아이러니요, 신앙의 역설인 것입니다.

둘째, ‘약할 때 강하여 지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v.8~9) 사도 바울은 믿음의 놀라운 역설을 머리로가 아니라, 삶을 통하여 주신 은혜 가운데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로 자신의 연약함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풍성한 주의 은혜인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v.9)고 바울에게 응답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능력은 우리의 강함을 통하여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의 약함과 부끄러움과 실패를 통하여 역사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고 저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사도가 고백하는 핵심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v.10)라고.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강함과 잘남을 사랑하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육신적 자랑은 결코 그리스도를 위하여 쓰임 받을수 없다는 것을 주님은 아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육신의 조건 가운데 멋지고 자랑스러운 것은 모두 내려 놓게 하시고, 반대로 내 속에 있는 약한 것들과 모욕 받음과 궁핍과 박해와 모든 부끄러움과 아픔까지도 사용하셔서 그의 역사를 이루시고, 그의 강력한 능력을 이루는 밑거름이 되게 하신다고 바울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가진 육신의 가시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한가지 이해해야 할 것은 ‘육신의 가시’가 문자 그대로 ‘육체적 질병이나 결함’만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육신의 가시는 바울 자신이 육체적으로 고통받는 그 어떤 신체질환이나 핸디캡만을 말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 자신이 피하고 싶고 벗어나고 싶은 모든 ‘인생의 쓴 잔’ 혹은 ‘십자가’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땀이 피가 되도록 간절하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마. 26:39) 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듯이 말입니다. 사도가 말한 바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인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여러분의 마음의 상처일수도 있고, 성장환경의 열등감 일수도 있으며, 여전히 여러분 자신이 깍여지고 죽어지기를 거부하는 모난 성품과 이기적이고 육신에 속한 자아 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중요한 것은 그 성도 여러분의 이러한 약함이 주님의 손에 들리어졌을 때 비로소 강한 능력으로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주님의 손에 의해 항아리의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었듯이 말입니다. 이런 크고 놀라운 능력의 역사는 오직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올 가을학기도 우리를 떠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22년도 이제 몇 주를 채 남겨 두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는 아직까지 지나온 삶의 많은 순간들에 미련과 아쉬움이 있다 할찌라도 이제 떠나보내야 할 시점입니다. 앞으로도 여러분들이 맞이하고 또한 보내야할 많은 날들이 남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후회없이 충만한 주님의 은혜로 남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가 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육신의 가시가 있습니까? 어떤 벗어버리고 싶은 연약함이 있습니까? 선하신 주께서 그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이 간구하는 기도의 제목에 신실히 응답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러했듯이, 주님은 동일하게 성도 여러분에게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응답하시는 순간이 반드시 올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그때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고백하시겠습니까? 바라기는 주의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자고하지 않고, 더욱 겸손하게 믿음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는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약할 때 온전하여지는 영적 승리의 역사를 경험하시길 기대합니다. 성도 여러분의 약하고 부족한 그것을 사용하여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주님을 신뢰하고 순종함으로 약할 때 강하여 지는 주의 풍성한 은혜를 날마다 누려 나가는 복된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