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28, 202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Why are you cast down, O my soul?)

Preacher:
Passage: 시편 (Psalms) 42:5
Service Type: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Why are you cast down, O my soul?)

2-28-21

본문말씀: 시편 (Psalms) 42:5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Why are you cast down, O my soul? And why are you disquieted in me? Hope you in God: for I shall yet praise Him for the help of His countenance.)

[설교 요약]

            성도 여러분은 지난 한주를 보내며 어떤 마음의 무거운 짐과 실망스러운 일로 인해 힘들어 하셨습니까? 비록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때때로 삶에 찾아오는 고통과 고난의 순간들을 모두 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키에르 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 (The Sickness into death)이라는 그의 책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절망을 경험하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풍성하게 맺을 수만 있다면 그 자체가 축복이 됨을 역설적으로 주장했습니다.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해 우리는 때로 낙심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 계속 머무르게 될 때 죽음처럼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하게 됩니다. 특히 우리 성도가 영적 침체에 빠지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영적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How do we overcome from the spiritual depression?)  그것은,

첫째, “자신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We may overcome it by talking to ourselves): 로이드 존스 목사는 ‘영적 침체’라는 제목의 시리즈 설교를 하면서, 영적 침체에 빠질 수 있는 대표적인 유형을 소개합니다. 1 <기질>, 2 <몸의 상태>, 3 <반작용>입니다 4, <마귀의 존재>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런 여러가지 형태로 비롯되는 영적 침체에서부터 빠지지 않는 첫걸음은 ‘자신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v.5a)라고 우리 자신에게 선언해야 함을 로이드 존스목사는 강조합니다.

둘째, “상황 속에 빠지지 않는 것” 입니다 (We may overcome by escaping from the situation): 우리 성도들이 한가지 분명히 이해해야 하는 것은 “사탄은 우리 성도의 구원을 빼앗아 가지는 못해도, 우리의 기쁨은 확실히 빼앗아 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기쁨을 빼앗기는 그 중심에는 성경 교리에 바로 서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든든한 가르침 위에 서 있을 때 상황 속에 빠지지 않습니다.

셋째, “오직 하나님을 바라는 것” 입니다 (We may overcome by hoping in God):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v.5b)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바라라’는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믿어라’는 뜻이요, ‘ 그를 신뢰함으로 강해져라’는 뜻이요, 그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평강과 은혜를 누려라’는 뜻입니다.

바라기는 말씀 위에 든든히 서서, 자신을 올바로 설득시켜 나가고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영적 침체에 빠지지 않고 자녀의 복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성도 여러분은 지난 한주를 보내며 어떤 마음의 무거운 짐과 실망스러운 일로 인해 힘들어 하셨습니까? 아니면 힘든 일이 전혀 없으셨다고요!? 즐겁고 기쁜 일만 있으셨다고요! 주 안에서 언제나 기쁨과 감사만 충만하시길 소망합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때때로 삶에 찾아오는 고통과 고난의 순간들, 그리고 허무와 무의미의 혼돈스러운 순간들을 모두 피할 수는 없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것이 없다고 애써 부인할 필요도 없고, 이런 사실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이 육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구원받은 성도의 당면한 실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반갑지 않은 이런 낙심의 시간이 우리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힘들다 할 찌라도, 결코 세상의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상황도 여러분과 저를 좌절과 절망으로 끝내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이 줄 수 없고,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주님의 도우심과 소망으로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오늘날 실존주의 철학의 지평을 연 크리스챤 사상가로 19세기 덴마크의 <키에르 케고르>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냉철하고 순수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열정을 품고서 그 당시 교회들의 잘못된 관행들과 크리스챤들의 그릇된 신앙을 그의 여러 작품에서 날카롭게 드러내고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음에 이르는 병’ (The Sickness into death)이라는 작품을 1849년도에 발간하는데, 이 책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 (despair)이다’라고 그는 지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절망을 느낌을 통하여 결과적으로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더 풍성하게 열매 맺을 수만 있다면 그 자체가 축복이 된다’라고 그는 역설적으로 주장합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절망 자체가 결코 문제는 아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시간과 공간과 능력의 한계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무한을 향해 비상하기를 갈망하는 존재가 또한 우리 인간이기에 그 한계를 부딛칠 때, 인간은 낙심하고 좌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런 의미에서의 좌절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절망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절망에 빠져 있으려는 의지’가 바로 죄다>라고 그는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정확히 말해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죄’란 하나님에 의해서 절망의 상태에서 벗어날 길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고 절망을 고집하는 것이다’라고 키에르 케고르는 날카롭게 분석합니다. 따라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에 대한 의지’라는 것입니다. 이런 그의 실존적인 인간이해를 통한 탁월한 분석은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여전히 정신과 영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 유익한 길잡이 역할을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지난번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하면서 우리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 (시. 42:1) 해 하는 하나님을 향한 추구함이 그분을 사랑하는 삶의 중심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해,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고자 하는 그런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고 추구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은혜 안에 속하는 중요한 성도의 영적 자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주목해 보아야 할 점은 <시.42편>에서 기자는 과연 어떤 상태에서 이런 목마른 사슴과 같은 고백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기자는 하는 일이 잘 풀리고, 편안하고 만족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것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더욱 찾고 추구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그는 지금 깊은 낙심과 심적 고통 가운데 힘들어 하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 (시.42:5) 라고 그는 침체된 자신에게 촉구합니다. ‘네 영혼아 네가 무엇 때문에 깊은 실망 가운데 있고, 무엇 때문에 불안하고 염려 가운데 있느냐?’라고 스스로에게 강하게 질문하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시인이 처한 힘든 상황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가 어떤 이유로 해서 지금 이와 같은 깊은 낙심과 불안한 가운데 놓이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이어지는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몇 가지 근거를 추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종일 나 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v.2) 라고 한 것과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v.10)라고 고백하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추측컨데, 그는 자신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배척하는 자들, 곧 그의 대적들로부터 비방을 당하고 있음을 봅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그들은 조롱하는 것입니다. “네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데 하나님이 있으면 왜 너를 안 도우시겠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너를 버리셨는가 보다! 어쩌면 하나님이 주무시는가 보다! 큰 소리로 그를 불러 깨워라!”고 대적들은 그를 조롱하고 비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때로 낙심하거나 더 깊은 절망에 빠지기도 하는데 그것 자체가 죄는 아닌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방치했을 때 영적 죽음에 이를만큼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앞에서 키에르 케로르가 지적했던 ‘절망에 빠져 있고자 하는 의지가 죄’라는 도전을 우리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저는 우리는 어떻게 이런 영적 침체를 피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이 중요한 것은 나를 말씀 속에서 성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사실입니다. 나 자신을 좀더 객관화해서 볼 수 있도록 말씀의 은혜로 영적 침체의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크리스챤은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부담과 강박관념은 크지만, 정작 죄의 유혹이 찾아오면 쉽게 그 죄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와 같은 영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그것을 피하도록 오늘 말씀은 돕는 것입니다. 마치 정교하게 만든 차는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고성능의 <경보장치>가 먼저 작동하여 위험을 방지하듯이 말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말씀은 우리 성도가 죄에 빠지기 전에 그 위험을 경고하는 <영적 알람장치>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영적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How do we overcome from the spiritual depression?)  그것은,

첫째, “자신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We may overcome it by talking to ourselves): 로이드 존스 목사는 ‘영적 침체’라는 제목의 시리즈 설교를 시작하면서 오늘 본문말씀으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합니다. 그는 ‘오늘날 피상적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많은 이유는 시간을 내서 자신을 점검해 보지 않는데 있다’고 그는 지적합니다. 그는 먼저 영적 침체에 빠질 수 있는 4가지 원인을 이렇게 언급합니다. (첫째)는, <기질>입니다. 청년시절 의사였던 존스 목사는 그의 의학적 전문성에 근거하여 ‘그 사람이 가진 고유한 기질과 심리와 성향이 그가 크리스챤이 된 이후에도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과도한 자기 성찰’과 ‘병적인 집착’이 그것입니다. (둘째)는 <몸의 상태>입니다. 예를 들면, 영국의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은 그가 앓고 있던 통풍의 고통으로 인해 쉽게 침체에 빠지곤 했습니다.

(셋째), <반작용>입니다. 이것은 큰 축복을 받거나 비상하고 특별한 경험을 하고 난 후에 생기는 반작용입니다. 여러분도 잘 기억하시겠지만,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입고 바알의 제사장 850명과 겨루어 이기는 놀라운 영적 승리를 거두고 난 직후, 로뎀 나무 밑에 쓰러져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거둬가 달라고 의기소침했던 것입니다. 갈멜산 승리 이후의 반작용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마귀의 존재>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우리의 원수 마귀는 영적 침체를 일으키는 방법을 무궁무진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오직 한가지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를 침체시키는 것’이요, 세상 사람들의 눈에 우리를 비참한 자로 보이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원인들에 대해 대처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출발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입니다. 존스목사는 ‘인생에서 대부분의 불행은 우리가 자아에게 말하는 대신, 오히려 자아의 말을 듣는 데 있다’라고 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v.5a)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기술의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자신을 다룰 줄 아는 것’입니다. 자아가 먼저 불평과 불만으로 자신을 설득하고 말을 걸기전에, 자신이 먼저 내 영혼을 향해 선언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왜 이렇게 낙심되 있니’ ‘무엇 때문에 이렇게 불안해하는 거니?’라고 물어야 합니다. 스스로 비참해하고, 자기연민에 빠지고자 하는 자신을 향해 ‘정신 차리라’고 흔들어 깨워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상황 속에 빠지지 않는 것” 입니다 (We may overcome by escaping from the situation): 혹시 성도 여러분 중에 이런 말을 들어 보신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사탄은 우리 성도의 구원을 빼앗아 가지는 못해도, 우리의 기쁨은 확실히 빼앗아 갈수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겪게 되는 영적 침체에 대해 살펴보고 있지만, 사실 그 원인은 수없이 다양할 것을 우리는 족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해결방법도 그 만큼 다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그 대부분의 영적 침체의 원인은 ‘교리에 대한 무지’라는 점을 우리 크리스챤들은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리’ (doctrine)에 대해서 ‘교리에 대해 구원받을 만큼은 알지만, 침체에 빠지지 않을 만큼 분명하게 알지는 못한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교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무엇보다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적지 않은 구원받은 성도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죄의 문제를 행위의 문제로 인식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율법의 요구대로 행했느냐 행하지 못했느냐’로 죄를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의미가 단순히 <죄 용서함을 받았다>는 소극적 의미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였다>는 적극적인 의미도 포함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습니까?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있습니까?

이것을 종합해 볼 때, ‘진정한 죄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죄가 단순히 어떤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 있지 않는 것이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함으로 그 어떤 과거의 죄도 용서함 받고 새롭게 변화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지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전인격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지.정.의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이런 믿음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한가지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여러분과 저를 영적 침체로 빠트리는 상황 속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의 중요한 교리와 가르침에서 든든히 세워짐으로 다른 사람이나 자신의 과거와의 비교를 통해 침체에 빠지고자 하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성도들에게 보내는 첫번째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하나님게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일. 5:18) 이것보다 더 확실한 주님 안에서의 보호하심과 은혜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말씀의 도우심으로 침체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오직 하나님을 바라는 것” 입니다 (We may overcome by hoping in God):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내 영혼아, 왜 낙심하고 불안해 하느냐?”라고 자신에게 말을 걸고 설득할 뿐 아니라,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v.5b)고 명령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을 바라라’는 뜻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라/믿어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의미를 잘 설명하고 도전해주는 대표적인 말씀의 하나로 <누가복음 8장>의 말씀을 들고 싶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는데 피곤하진 주님은 배에서 주무셨고, 그때 큰 광풍이 일고 파도가 쳐서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던 장면을 기억합니다.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눅. 24~25a) 라고.

주님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들과 한 배에 타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불안하고 공포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전능하심과 그들을 향한 사랑을 제자들이 인격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과 형편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나를 지켜 주시고 보호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시. 118:6) 라는 다윗의 시를 종교개혁의 선봉자 마르틴 루터는 언제나 애송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믿음으로 강해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 12:12~13)라고 영적인 강건함을 지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충만을 통해 누리게 되는 평강과 기쁨과 자족의 삶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고 바울은 우리를 격려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주동안 아니 지난 오랜 기간동안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낙심케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라기는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 여러분을 지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더 깊이 연합함으로 우리를 낙심케 하고 절망케 하는 모든 것으로 부터 “내 영혼아 왜 낙심하느냐”라고 먼저 자신을 통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신뢰함으로써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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