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7, 2021

“영적 단순성” (Spiritual Simplicity)

Preacher:
Series: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6:26
Service Type:

“영적 단순성”

(Spiritual Simplicity)

3-7-21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6:26

26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 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않느냐? (Look at the birds of the air; they do not sow or reap or store away in barns, and yet your heavenly Father feeds them. Are you not much more valuable than they?)

[설교 요약]

            오늘날 청년들에게 있어서 성경의 명료하고 변치 않는 진리가 무시되거나 상대절하 되는 것은 빠르고 복잡한 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현대의 가치기준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하고 저는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앞 절인 <25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v.25) 라고 우리들에게 도전하십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말씀은 주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왜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설명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 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않느냐?” (v.26)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선하신 하늘 아버지께서 먹히시고 입히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왜 이것을 의심하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이러한 도전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성도들에게 영적 훈련의 필요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챤들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염려하지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수 있는 영성을 기르는 것이며, 그 중심에 영적 단순성의 훈련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크리스챤은 영적 단순성을 훈련해야 하는 것일까요?” (Why do we need to train for the spiritual simplicity?) 그것은,

첫째, 피상성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 (Because we may overcome our superficiality by the training) 입니다: ‘리처드 포스터’은 “피상성 (superficiality)은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즉시 만족을 누리려는 사상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문제이다. 오늘날 절실히 필요한 것은 똑똑한 사람이나 천재가 아니라 깊이가 있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다” (by ‘영적훈련과 성장’)라고 말했습니다. 영적 단순성은 겉도는 신앙의 피상성에서 나의 영적 상태를 직시하고 말씀 앞으로 인도합니다.

둘째, 본질을 붙잡을 수 있기 때문 (Because we may strongly hold the essential faith by the training) 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6장>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v.33) 라고. 영성훈련을 통해 더 명료하게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가게 됩니다.

셋째, 물질로부터 자유할 수 있기 때문 (Because we may free from the material bondage by the training) 입니다:  <크리스챤의 물질관>은 내적 영성이 외적으로 드러내는 가치기준이 될 것입니다. ‘물질로부터 자유함’을 누린다는 것은 믿음의 본질을 붙잡은 성도의 특권일 것입니다.

이런 영적 단순성을 통해 믿음의 본질을 든든히 붙잡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풍성한 은혜를 날마다 누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소위 문명의 발전이란 이름 아래 우리는 매우 복잡해진 사회 속에서 생활해 갑니다. ‘빠른 스피드와 복잡한 기능이 더 좋은 것’이라는 일반 상품에 적용하던 인식이 요즘에 와서는 인간의 중심적인 삶의 가치에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여겨집니다. 그 말은 무엇이든 빠른 속도로, 더 복잡 다난하게 살아가는 것이 멋지고 성공적인 인생으로 인식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지 않는가 하는 말입니다. 그에 반해, 단순한 것은 질적으로 떨어지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시대임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럼으로 빨라지고 복잡해지기를 추구하는 사회 속에서 단순 명료하고 변치 않는 귀중한 진리조차도 시대에 뒤쳐지고 가치를 상실해 가는 것으로 치부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됩니다. 어쩌면 오늘날 청년들에게 있어서 성경의 변치 않는 진리가 무시되거나 상대절하 되는 것도 이런 가치기준에 기인한 것이라고 제가 말씀드린다면 이것은 단지 저만의 우려일까요? 바라기는 시대와 장소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그의 자녀들에게 허락하신 믿음의 본질을 단순성 가운데 든든히 붙잡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영적 단순성’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허락하신 모든 충만함과 생명의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영적 침체’에 빠질 수 있는 위험과 침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성도에게 있어서 침체를 가져오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겠으나, ‘지나진 자기성찰’이나 ‘성격적 집착성’이 그 대표적인 요인 중 하나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여기서 ‘지나친 성찰과 집착’이라는 표현에서 느낄 수 있듯이 문제를 보다 큰 그림에서 보지 못하고, 작고 사소한 것에 사로잡히고 집착함으로 영적 침체로까지 이어질 수 있음을 우리는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말씀의 주제가 되는 <단순성>이란 특별히 영적 의미에서 볼 때 [복잡 다난한 삶의 현상 가운데서 여러 부차적인 잔가지들을 정리하면서 큰 줄기의 영적 본질을 붙잡는 것 (=파악하는 것)]이라고 저는 정의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Sermon on the Mount) 가운데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말씀이 포함된 <마태복음 6장>말씀을 시작하면서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v.3~4) 라고 말씀하심으로 ‘올바른 구제’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v.9) 라고 시작하는 <주 기도문>을 포함한 ‘올바른 기도의 자세와 금식’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v.5~18).

그리고나서, 일반적으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요약되는 말씀 (v. 19~24) 가운데 ‘지혜롭게 재물을 사용함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을 가르치시고, 오늘 본문이 포함된 마지막 부분, <25~34절>에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요약되는 가르치심을 주고 계십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 앞 절인 <25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v.25) 라고 반문하십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마실지, 그리고 무엇을 입을지를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복잡해지고, 정신없이 바삐 살아가는 그 밑바닥에는 생활에 대한 이와 같은 염려가 깔려 있음을 주님은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당장 먹고 살아야 되는데, 당장 좋은 학점, 좋은 학위받고, 좋은 직장 구하고, 좋은 배우자 만나야 하는데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라는 것이 우리들의 질문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을 아시는 주께서 하시는 대답이 바로 오늘 말씀인 것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 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않느냐?” (v.26)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 한사람 한사람을 기르시고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다면 염려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공중에 나는 수없이 많은 새들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바 된 너희일까 보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우리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없다는 것과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이름없는 들풀 하나만 같지 못하다고 밝히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르시고 책임지신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v.27~31).

주님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시느니라” (v.32)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v.34)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떻게 그 사랑하는 자녀에게 좋은 것으로 베푸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지 않습니까?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9~11)라는 것입니다. “왜 이것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영적 단순성’이라는 주제를 통하여 주께서 가르치신 ‘염려하지 않는 성도의 삶’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염려하거나 의심하지 않는 삶을 살수 있는 것일까요? 제가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기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왜 우리 크리스챤은 영적 단순성을 훈련해야 하는 것일까요?” (Why do we need to train for the spiritual simplicity?) 그것은,

첫째, 피상성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 (Because we may overcome our superficiality by the training) 입니다: <피상성> (superficiality) 이란 “본질적인 현상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 만을 중시함을 의미”한다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리처드 포스터’는 그의 책, <영적 훈련과 성장/ Celebration of Discipline>을 시작하며 이렇게 문제제기를 합니다. “피상성 (superficiality)은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즉시 만족을 누리려는 사상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문제이다. 오늘날 절실히 필요한 것은 똑똑한 사람이나 천재가 아니라 깊이가 있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포스터가 제기하는 문제의 핵심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문제점 이라기 보다는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우리 크리스챤들을 향한 도전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은 성경의 말씀을 통해 우리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이며 또한 미래에 어떻게 변화될 존재인지에 대해 듣게 됩니다. 그러나 단지 머리로 그 성경의 지식을 이해한다는 것이 곧 주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특권과 은혜를 누린다는 의미가 아님을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구체적인 자녀의 풍성한 열매를 누리지 못하는 그 중심에는 ‘믿음의 본질을 움켜잡지 못하고 겉 핣기만 하는 <피상성>’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질적인 피상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영적 훈련’ (spiritual discipline)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 피상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은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의 하나가 ‘죄에 대한 자세’인데 보다 분명하게 죄와 싸우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성도가 많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기자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너희가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히브리서/Hebrews 12:4)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피상성을 극복하는 방법을 생각하면서 저는 성도 여러분에게 한가지 질문을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은 염려하지 않습니까?”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립보서/Phillipians 4:6) 고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도전하고 격려합니다. 우리가 피상성을 벗어나 믿음의 본질을 붙들고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과연 나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가?!’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염려하지 않는 것’이지 ‘생각없이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린 이유는 ‘내가 나를 영적으로 객관해 볼 수 있을 것인가?’는 자신의 영적 성장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단순성의 훈련은 그 핵심이 됩니다. 그것은 곧 내가 나를 이해하고 판단하는 여러가지 요소들을 헤집고 들어가서 그 문제를 명료하게 분석하고 이해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리챠드 포스터가 지적했듯이, 누구도 여기에 대한 해답을 쉽게 즉시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성훈련을 통하여 더 깊은 자신에 대한 통찰을 말씀 가운데 배워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본질을 붙잡을 수 있기 때문 (Because we may strongly hold the essential faith by the training) 입니다: 주께서 오늘 본문을 포함한 <마. 6장>에서 말씀하시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33절>일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v.33) 라고. 이 말씀이 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주님의 대답인 것입니다. 앞서도 잠시 말씀드렸듯이, 우리 성도들이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가 소극적으로는 염려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하신 아버지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실 뿐 아니라 그의 자녀를 먹이시고 책임지시는 아버지시기에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마태복음 6장> 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성도의 삶의 본질적인 목적을 가장 선명하게 밝힌 말씀의 하나가 바로 이 <마. 6:33>말씀이라고 믿습니다.

더 깊은 영성 훈련을 통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유익은 신앙의 본질을 붙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없이 다양한 말씀의 진리 가운데서 우리 성도들이 그 무엇보다도 먼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또한 실천할 수 있는 힘이 단순성의 훈련을 통해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주께서 이같이 명하신 ‘하나님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은 살지 않고 지극히 지엽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에 사로잡혀 삶을 낭비하는 안따까운 모습을 우리는 목격합니다. 왜 이런 삶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일까요” 저는 그 중심에는 그 무엇보다도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꿰뚫어 볼수 있는 영성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습니까? 도리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살아갑니까? 그리하여 하늘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따라 채워 주시는 은혜의 손길을 누리고 계십니까?

셋째, 물질로부터 자유할 수 있기 때문 (Because we may free from the material bondage by the training) 입니다제가 우리 크리스챤이 단순성의 훈련을 통해 누리는 유익함을 살펴봄에 있어서 <물질로부터의 자유>를 마지막에 나누고자 하는 이유는 이것이 가장 중요해서는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의 본질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마지막에 말씀드리는 이유는 내면의 영성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물질에 대한 크리스챤의 자세>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다양한 주제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올바른 구제와 기도하는 법], 그리고 [올바른 금식과 물질을 사용하는 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어떻게 올바른 물질사용을 할 것인가?’를 말씀하신 가운데 포함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먼저 우리가 물질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를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마. 6:19)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보물’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말그대로 ‘보물’ (treasures)은 ‘우리 각자가 보물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그 무엇’입니다. 각자 그 보물은 다를 수 있지만, 아마도 주님은 우리 인간이 보물처럼 여기는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로 우리 마음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재물 (=물질/돈)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여기서 도전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은 ‘물질에 대한 탐심 혹은 탐욕’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몇 절 뒤에 이렇게 분명하게 그 뜻을 설명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v.24)

주님은 우리 속에 물질을 사랑할 뿐 아니라, 물질의 종이 되어 그것을 주인처럼 섬기는 물질을 행한 탐심이 있음을 꿰뚫어 보셨기에 분명히 그 위험성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런 재물을 주인으로 삼은 자의 삶이 ‘우상숭배’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람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10) 그리고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골. 3:5)라고.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단순성의 훈련은 그 무엇보다도 ‘물질로부터의 자유하는 훈련’인 것입니다. 또한 구체적으로 단순성의 훈련을 통해 물질에 대한 자유를 실천하는 것은 매우 다양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본다면, 물건을 구입할 때 활용도가 아니라 외관이나 남들의 눈을 의식 한다든지, 셀폰이나 컴퓨터가 아직 쓸 만한데 새것이 나오면 무조건 사고자 하는 욕구, 신용이 좋다고 크레딧카드 빚을 더 많이 지는 것, 그리고 중독성이 있는 음식물은 가급적 삼가 하는 등의 적용입니다. 우리가 단순성의 훈련을 점점 더 행해 나갈 때, 과거 깨닫지 못했던 다양한 물질에 대한 그릇된 가치관과 생활습관의 오류를 발견함으로 고쳐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마무리하기 전에 한가지 우리가 분명히 구분해야 할 것을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그것은 <금욕주의와 단순성은 서로 배치된다>라고 날카롭게 지적한 점을 환기시키기 원합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물질을 숭배하고자 하는 탐심의 유혹은 언제나 경계하고 그것과 싸워 나가야 하지만, 동시에 그와 같은 싸움과 <금욕주의>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유를 포기하고 물질 자체를 죄악시하는 금욕주의는 비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재물에 사로잡히지 않고, 또한 금욕주의라는 비기독교적인 사상에 빠지지 않고, 균형된 물질관을 가짐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인 물질을 잘 다스려 나갈 수 있는 것이 우리 성도가 단순성의 훈련을 통해 얻게 되는 실제적인 유익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아직도 단순함이 시대에 뒤쳐진 것이요, ‘단순무식’이랑 비슷한 그런 것으로 치부하십니까? 우리 주님은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격려하시고 도전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그의 자녀의 모든 필요를 아실뿐 아니라, 그 필요를 따라 온전하게 채워주시는 선하신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느냐’고 주님은 묻으시는 것입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은 이것을 믿는다면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게 바뀔까요? 그것은 ‘염려하자 않는 삶’이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임을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도전하심을 믿습니다. 바라기는 그의 자녀들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함으로 염려하지 않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으로 이 모든 것을 넘치게 받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