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14, 2021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Love your God)

Preacher:
Passage: 마가복음 (Mark) 12:28~31
Service Type: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Love your God)

2-14-21

본문말씀: 마가복음 (Mark) 12:28~31

28 서기관 중 한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 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설교 요약]

            예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성경전체 말씀을 오늘 본문처럼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 핵심을 요약해 주신 말씀도 없지 않은가 저는 생각합니다. 주님은 구약의 말씀 전체를 한 문장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선언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어떤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v.28)라고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주님은 그 질문에 대해 “첫째는 이것이니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v.29~31)라고 신명기서와 레위기서 말씀 (신. 6장 & 레. 19장)을 인용하여 성도가 지켜야 할 가장 큰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자신과 이웃사랑’의 기초가 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과연 무엇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의미일까요?” (What means to love your God?) 그것은,

첫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것’ (It means to grow up the knowledge of God)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고 명령하시고, 날마다 그분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신. 6:4~9).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지 못할 때 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호. 4:6).

둘째,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It means to obey the commands of God)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4) 라고 ‘무엇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뜻인지?’를 말합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 곧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 (It means to pursue God)입니다: <A.W. 토저>는 “~ 거듭나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왜냐하면 그제야 영광스러운 추구, 하나님의 무한한 풍요를 탐구하는 기쁜 마음의 추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이 바로 우리가 시작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선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아버지를 추구하는 것은 그의 생명으로 거듭난 자녀의 본질적 특성이자 특권인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날마다 알아 나가고, 그분께 더욱 순종하고, 간절히 그를 추구함으로 축복된 자녀의 삶을 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예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구약의 전체 말씀을 오늘 본문처럼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 핵심을 요약해 주신 것도 없지 않은가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님은 구약의 말씀 전체를 한 문장으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만약 여러분이 겸손하고 진실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깨닫고 순종하기 원한다면, 주님의 오늘 말씀은 여러분의 평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로 인도하는 어둠 속의 등대처럼 여러분을 비추는 말씀이 될 것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어떤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한가지 질문을 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서기관’ (scribes)은 히브리 말로 ‘소페르’라고 불렸는데, 이 서기관은 모세의 율법책을 중심으로 율법서의 말씀을 해석하고, 그 말씀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교사로써 유대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서기관제도가 이어져 내려오면서 오늘 본문과 같이 예수님 당시에서도 서기관들은 성경에 능한 자 (마. 2:4; 막. 1:22)의 대명사로 불려 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서기관’의 성경에서 불리어 지는 또 다른 명칭으로는 <율법사> (노미코스)와 <교법사> (노모디다스칼라스) 그리고 <랍비>가 있습니다. 이들은 그 당시 유대인의 대표적인 지도자로써 제사장, 장로들과 함께 산헤드린 공의회의 주요 구성원을 이루었습니다 (마. 16:21). 그리고 사두개파 사람들이 주로 제사장 직분을 독점한 반면, 서기관들은 주로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서 차지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의 말씀에 정통하고 열심이었던 서기관들 중 한 명이 예수님께 한가지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떤 마음으로 주께 질문했는지에 대해 “~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와서 묻되” (v.28)라고 누가는 그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서기관이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았다’는 것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 <2가지 사례>를 배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첫번째는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예수님을 고소할 구실을 찾고자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좋은지, 않 좋은지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가 잘 아는데로 동전 하나를 가져오게 하시고는, 그 동전에 찍힌 가이사의 얼굴 형상을 확인시켜 주시고 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v.13~17)는 기막히게 지혜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일곱형제가 있었는데 첫째가 자식이 없이 죽었고, 이스라엘의 전통에 따라서 형의 후사를 위하여 그 동생이 그 아내가 취했으나 역시 후사없이 죽었고 이렇게 해서 일곱째 막내까지 후사 없이 죽고 그녀도 죽었다면 부활된 후에 누구의 아내가 되는지에 대해서 날카롭게 질문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v.24~25)고 사두개인들의 잘못된 부활에 관련한 관점을 바로잡아 주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유대민족 가운데서 대표적인 종교적 분파였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과의 논쟁에서 지혜롭게 대답 잘하시는 것을 보고 어떤 서기관이 이렇게 주께 묻는 것입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v.28)라고.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왜 이 서기관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한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제가 여러가지 주석 가운데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그 서기관의 질문에 대한 2가지 조금 상반된 해석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는 <매튜헨리>의 해석입니다.

<매튜헨리>의 경우는 이 서기관을 ‘아주 공손하고 진지한 사람’으로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께 올바른 가르침을 받고자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구약의 말씀 중 으뜸되는 것임을 말씀하셨을 때, “선생님이여 옳습니다 ~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v.32~33)라고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으로 “네가 하나님나라에 멀지 않도다” (v.34)라는 인정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반면, 21세기 명 설교자 <존 맥아터>는 오늘 본문말씀을 설교하면서 이 서기관의 질문을 매우 정교하게 예수님을 책잡고자 하는 질문으로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대표적인 종파였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성경의 중요한 교리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로 인해 서로 반목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들에 비해 사두개인은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두 그룹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들 모두 <모세 5경>,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성경 전체를 믿는 바리새인에 비해 사두개인들의 경우는 모세5경을 제외한 율법에서 비롯된 전통이나 대부분의 율법의 해석서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서기관의 이런 질문은 이들 모두에게서 인정되는 모세5경을 벗어난 다른 말씀을 예수께서 언급하기를 바라면서 유도한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예상과는 달리 주님은 모세에 의해 기록된 <신명기서 6장>와 <레위기서 19장>의 말씀으로 정확하게 그 대답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아니 모든 유대인들이 인정하고 책잡을 수 없는 말씀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네가 하나님나라에 멀지 않도다” (v.34)는 그에 대한 평가도 단순한 칭찬과 인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네가 하나님나라, 즉 구원받기에 가까이 왔다’는 뜻이지, ‘하나님나라에 들어갔다’ 즉 ‘구원받았다’ 라고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연구하는 서기관과 종교지도자들은 그 누구보다 하나님나라에 더 가까이 갈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었지만, 이것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갔다’ ‘구원받았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유대종교지도자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 23:13)라고 꾸짖으신 것이 바로 그 정확한 예인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말씀을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 바로 문 앞까지 가는 특권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죄악과 불순종으로 인해 자신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맥아터 목사의 해석도 우리가 각자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는 개기로 삼을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주께서 모든 구약성경의 핵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묵상하고자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사랑도 중요하지만, 그 모든 사랑은 하나님사랑에서 출발함을 우리는 압니다. 구약 뿐 아니라 신약까지, 성경 전체의 요약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하심 가운데 있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의미일까요?” (What means to love your God?) 그것은,

첫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것’ (It means to grow up the knowledge of God)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일컬어지는 모세가 그의 죽음을 앞두고 백성들에게 마지막 전한 고별 설교가 ‘신명기서’입니다. 이런 신명기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기억하고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분명히 알고 있는 말씀이 오늘 주께서 인용하신 <신명기 6장 4절>이하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들어라 이스라엘” (신. 6:4)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긴 역사를 통하여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도 정통 유대인 가정에서는 매일 “쉐마 이스라엘” 곧 ‘들어라 이스라엘아’라고 시작하는 <신명기서 6장>의 말씀들을 암송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삶과 신앙을 바쳐주는 중심되는 말씀이 오늘 본문말씀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 자기의 자녀 삼으신 이스라엘에게 ‘들어라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시고나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구체적으로 이렇게 지시하십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 (신.6:6~7)라고. ‘사랑하라’ 명하심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까지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그분의 말씀을 우리 마음판에 새긴다는 뜻이요, 더 나아가서 나 자신 뿐 아니라 나의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는 것 까지를 포함해야 함을 하나님은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리스챤 가정의 신앙교육이 왜 중요한지를 매우 잘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그리하여 그 말씀이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집에 있을 때에든, 길을 갈데든, 친구를 만날 때든, 공부를 할때든 무엇을 하든지 그 말씀을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신.11:13,22; 13:3; 19:9; 30:6,16,20)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그분을 사랑함에 대해 명령하셨을까 하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설명해 주는 사례의 하나가 호세아를 통해서 하신 하나님의 탄식 가운데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 4:6)라고. 여기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그분의 말씀을 멀리하고 잊어버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고 그분께 불순종함으로써 징계받고 고통에 빠지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호세아는 이렇게 우리에게 촉구합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6:3)라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그분의 말씀을 통해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고 있습니까?

둘째,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It means to obey the commands of God)입니다: 사랑의 사도라고 일컬어지는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보내는 첫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3~4)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무엇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인지를 분명하게 밝혀 주신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가 그분의 말씀, 곧 계명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킨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사도 요한이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성도들에게 중요한 ‘자기점검’ (self-test)의 기준을 주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나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기쁘게 받고 있는가? 아니면 무겁게 여기는가?’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계명을 무겁게 여긴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 이유는 아직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 되, 내가 그분과 원수 되었을 때 먼저 나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통해 나를 구원하신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때문인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 (롬. 8:32)라고 선언했던 바울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눈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를 살리는 생명과 능력의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지켜 나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아 죄를 미워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 육신의 속한 소욕과 싸워 이겨 나가고 있습니까?

셋째,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 (It means to pursue God)입니다: 제가 좋아하고 은혜받는 시편 말씀의 하나가 <시편 42편>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 ‘고라 자손’이라고 명명되어 있는 이 <시편 42편>의 저자는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그의 간절함이 한 문장안에 깊이 녹아 들어가 있음을 저는 느낍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 곧 하나님을 추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A.W. 토저>는 그의 책, “하나님을 추구함” (The Pursuit of God)에서 이렇게 그것을 탁월하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자신을 알게 하시려고 인격이라는 친숙한 형태로 머무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 정, 의라는 길을 통해 우리와 대화하신다 ~ 하나님과 우리 영혼의 교제는 우리가 자각할 수 있는 것이고 개인적인 것이다 ~ 당신과 나는 그분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그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비록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능력을 상실했으나,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순간에 우리의 몸과 영과 마음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가족관계를 지각할 수 있고 그것을 알고 기뻐 뛰논다 ~ 그러나 거듭나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왜냐하면 그제야 영광스러운 추구, 하나님의 무한한 풍요를 탐구하는 기쁜 마음의 추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이 바로 우리가 시작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라고 토저는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그분을 추구한다는 의미와 그 필연성을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고 ‘누가 의인인지?’를 정의하고 나서 <11장>에 이르기까지 복음 안에서 드러나 구원의 능력 즉, 그의 아들을 믿는 모든 자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을 치밀하고 영광스럽게 영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이렇게 11장을 마무리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3~36)라고. 이 하나님을 향한 추구의 여정은 토저의 표현과 같이 그 시작은 있을찌라고 아무도 끝내야 할 곳을 발견하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마지막 숨을 쉬는 순간까지 말입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놀랍고 기이한 심오함에는 제한도 없고 끝도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 선하신 하나님을 추구하는 여정을 시작하셨습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풍성하신 은혜를 사모하며 그분을 더 깊이 추구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그의 택한 자녀를 향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v.30)고 명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명령은 그 어떤 명령보다 앞서고 중요한 명령임을 저는 믿습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시요,’ ‘그의 아들을 통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져 내셔서 그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과 즐거움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요’, 아직까지도 우리가 다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풍성한 은혜가 그분을 사랑함을 통해 여러분과 저에게 끝임없이 부어 주시고자 계획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더욱 사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바로 날마다 그분을 알아 나가고, 더욱 순종하고, 간절히 아버지를 추구함으로써 말입니다. 이런 축복된 자녀의 삶을 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