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14, 2020

“네 이웃을 사랑하라” (I) (Love your neighbor)

Preacher:
Series: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22:35~40
Service Type:

“네 이웃을 사랑하라” (I)

(Love your neighbor)

6-14-20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22:35~40

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One of them, an expert in the law, tested Him with this question:)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Teacher, which is the greatest commandment in the law?”)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Jesus replied: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This is the first and greatest commandment.)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으니 (And the second is like it: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hang on these two commandments.”)

 

[설교 요약]

            저는 이번 주와 다음 주에 걸쳐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제목의 말씀을 성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통해 함께 나누기 원하는 것은, 첫째 사랑은 무엇이고 그 사랑은 어디서부터 출발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그 사랑은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20세기 최고의 심리학 석학으로 알려진 ‘에리히 프롬’은 그의 책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에서 현대인의 문제는 ‘사랑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것이 없다’고 하는 편견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즉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고 ‘사랑은 행할 수 있는 능력의 문제가 대상의 문제’라고 치부하는 것입니다. 이런 편견이 현대인들이 성숙된 사랑에 실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신학사전>에서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이 잘 되기를 인격적으로 바라고 애정을 쏟고 보살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대표적인 특성 (=성품) (요일. 4:8,16) 이고, 크리스챤의 믿음과 행위에 있어서 최상의 표현이다 (고전. 13:13; 갈. 5:14; 엡. 5:2; 요일. 4:7~21)] 라고.

성도 여러분, “사랑은 어디서부터 출발할 것인가?” 성경은 그것에 대해 이렇게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 하시느니라” (요일. 4:16)라고. 바로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요, 사랑의 첫 출발점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v.37~40)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랑의 순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 사랑 이요 둘째 ‘나 자신 사랑 그리고 셋째 ‘이웃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나 자신을 참되게 사랑할 수 있고, 내가 나를 올바로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나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육신적인 사랑으로서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받은 사랑을 통해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성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성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사랑하고 있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한다는 의미일까요? 그리고 누가 여러분의 이웃입니까? 더 나아가 더욱 본질적인 질문은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웃 사랑을 명령하시는 것일까요?’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사랑’에 대한 이러한 질문들을 해 보면서,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명하심을 따라 이런 사랑을 실천하기 원한다면 중요한 질문 한가지는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이 사랑을 실천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주와 다음 주에 걸쳐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제목의 말씀을 성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성경지식이나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제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이번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통해 함께 나누기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첫째, 사랑은 무엇이고 그 사랑은 어디서부터 출발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 사랑은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번째 질문,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가?’는 예수님께 어떤 율법학자가 질문 했드시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이 먼저 있어야 하고, 이 질문이 답해졌을 때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최종적인 하나님의 명령하심에 응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먼저 <사랑은 무엇이며, 그 사랑은 어디서부터 출발하는가?> 에 대해 성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 다음 시간에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즉,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v.39) 고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실천인 것입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말만큼 사람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는 단어도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Let us love each other) 라고 말할 때 그들이 크리스챤 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 말에 거부감을 나타내거나 더욱이 화를 내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고기에게 물이 생존에 꼭 필요하 듯 사랑은 인간에게 있어서도 그토록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불행히도 사랑을 받지도 주지도 못하는 환경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음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랑받지 못한 이런 환경 가운데 성장한 사람들의 상당수가 나중에 자라서 그들의 비뚤어진 인격과 정서 장애로 말미암아 사회에 크나 큰 무리를 가하고 자기 스스로를 파괴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오는 경우를 우리는 왕왕 접하게 됩니다. 어쩌면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난 자의 이런 불행한 결말은 이미 예정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실로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을 풍요롭고 넉넉하게 채워줄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굳이 제가 강조하지 안터라도, 세상의 많은 문학가, 예술가, 심리학자, 환경학자, 의학자, 인류학자등에 의해 주장되고 넘치도록 많은 사례들이 발표되고 있습니다. 사랑은 실로 인간이 풍요롭게 살수 있는 거대한 바다요,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인생의 생명줄이라고 말해도 조금도 과장된 표현은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은 20세기 최고의 심리학 석학으로 알려진 ‘에리히 프롬’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의 대표적 저서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에서 프롬은 현대인의 문제는 ‘사랑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것이 없다’고 하는 편견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람들이 사랑하기에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를 가지게 이유로서 첫째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둘째 ‘사랑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의 문제가 대상의 문제라는 것’이고, 셋째 ‘사랑할 때 처음 느끼는 경험과 계속적으로 사랑해 나가는 지속적인 상태를 혼돈한다 는 것’ 입니다. 이로 인해 현대인들은 성숙된 사랑을 행함에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랑에는 훈련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프롬은 대안을 제시하면서, 상대의 말에 정신을 집중해서 듣고 인내함으로 기다려 주고자 하는 지속적인 훈련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상대에 대해 인내하고 존중하는 사랑의 태도는 프롬이 그 이론을 역설하기 2000여년 전에 사도 바울에 의해 이미 주장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장’ 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그 유명한 사랑의 위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

저는 <성경사전>에서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를 찾아보았는데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이 잘 되기를 인격적으로 바라고 애정을 쏟고 보살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대표적인 특성 (=성품) (요일. 4:8,16)이고, 크리스챤의 믿음과 행위에 있어서 최상의 표현이다 (고전. 13:13; 갈. 5:14; 엡. 5:2; 요일. 4:7~21)] 라고.

앞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사랑이라는 말이 우리 인간에게 주는 의미와 중요성은 신자건, 불신자건 관계없이 제가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조차도 없이 심히 지대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우리 인간에게 이렇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만큼 사실 사랑이라는 말만큼 주관적으로 이해되는 것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을 때 어떤 사람은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 다른 사람은 ‘사랑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즐거운 것이다’ 혹은 ‘사랑은 힘든 것이다’ 라고 각자 저마다의 관점과 경험을 통해 사랑을 정의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늘 성경 본문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v.39)고 말씀하실 때,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시각에서 살펴볼 때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음은 당연한 논리가 아닐까 생각 합니다.

저는 오늘 메시지를 시작하면서 “사랑은 어디서부터 출발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여러분에게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성경은 그것에 대해 이렇게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 하시느니라” (요일. 4:16)라고 사도 요한은 선언합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요, 사랑의 첫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깊은 산중에 흐르는 시원한 시냇물은 그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 볼 때 산 정상 그 어딘가에서 맑게 흘러 넘치는 옹달샘 근원을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사랑이시요, 우리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만물이 누리는 사랑의 첫 출발점이라는 사실은 실로 놀랍고 새로운 세상에 눈뜨게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의 사랑안에 거하게 될 때, 사도 요한이 고백 했드시 비로소 올바른 사랑을 행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봤을 때,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행하기 위한 첫걸음은 ‘사랑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은 하나님입니다. 또한 <사랑에는 순서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랑의 순서>를 짧고 명확하게 가르쳐 주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v.37~40) 고. 사랑의 순서는 첫째 사랑의 근원이요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v.37~38).  둘째는 <39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듯이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올바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도 당연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 다음 마지막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v.9).

대략적으로 이것이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사랑에 대해서 살펴볼 전체 내용입니다. 바로 사랑은 무엇이며, 이 사랑은 하나님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선 순서가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하나님 사랑, 나 자신 사랑, 그리고 나서 이웃 사랑이라고 우리 주님은 오늘 본문말씀에서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사랑의 주인이시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나의 사랑이 출발하게 된다는 것까지 이해하는 것은 훌륭한 깨닫음이지만 이것을 이해했다고 내가 사랑하기에 충분한 존재가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수많은 크리스챤의 문제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여전히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누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이 성경지식적으로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배웠고, 교리적으로 ‘사랑의 순서’를 알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사랑의 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한걸음 한걸음 더 하나님의 그 풍성하시고 선하신 사랑을 더욱 경험해 나감으로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제임스 패커>는 그의 대표적인 책, 하나님을 아는 지식’ (Knowing God)에서 ‘아는 것과 아신 바 되는 것’이라는 소제목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나의 상상과 지식을 초월하시는 사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신바 되는 것: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의 근저에 있는 더 큰 사실 곧 그분이 나를 아신다는 사실이다. 나는 하나님의 손바닥에 아로새겨진 존재다 (사. 49:16). 나는 결코 하나님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아는 나의 모든 지식은 하나님이 계속해서 주도권을 쥐시고 나를 아시는 것에 달려 있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아셨기 때문에, 그리고 계속해서 나를 아시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은 친구로서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분으로서 나를 아신다. ~ 하나님이 계속해서 사랑 가운데 나를 아시고 나의 유익을 위해 나를 지켜보고 계심을 알면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게 된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나에 대한 최악의 것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미리 알고 계시는 상태에서 주어지는 완전히 현실적인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무언가 때문에 환멸을 느끼더라도 그로 인해 하나님이 나에 대해 환멸을 느끼실 수 없으며, 내게 복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결심을 억누를 수도 없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안을 준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난다는 것을 <제임스 패커>는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 의해 아신 바 된 것’ (being known by Him)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에 의해 ‘아신 바 되었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사랑일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가야할 사랑의 목표는 분명해졌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간단히 성의없이 해칠울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온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우리의 평생의 삶을 통해 추구할 때 비로소 얻고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나의 노력과 모든 헌신을 다 합하여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더욱 가치가 있고 더욱 간절히 구하고 싶은 사랑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 측량할 수 없는 깊고 넓고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 (롬. 11:33)의 바다에 첫 발을 담그셨읍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는 과연 어떤 존재이십니까? 저 멀리 하늘에서 내 죄를 세면서 벌을 주고자 하는 엄한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내가 무엇을 해도 인격적으로 나와 상관하지 않고 천국만은 보장해 주는 저 멀리 있는 하나님입니까? 과연 사랑의 하나님을 여러분은 어느 만큼 깨닫고 있으며, 그 진정한 사랑에 눈을 떠가고 있습니까? 바라기는 여러분의 남은 평생 동안 참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눈이 열리는 복된 삶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긍휼에 넘치는 사랑에 포로가 되어 그 사랑으로 인해 자신을 참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