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21, 2020

“네 이웃을 사랑하라” (II) (Love your neighbor)

Preacher:
Series:
Passage: 요한복음 (John) 13:34~35
Service Type:

“네 이웃을 사랑하라” (II)

(Love your neighbor)

6-21-20

본문말씀: 요한복음 (John) 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A new command I give you: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so you must love one another.)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By this all men will know that you are my disciples, if you love one another.”)

 

[설교 요약]

            저는 지난 주에 이어 “네 이웃을 사랑하라” 시리즈, 두번째 메시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 주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나서 이렇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v.34)라고.

그렇다면 주께서 명하신 것과 같이 왜 우리 크리스챤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요?” (Why should Christians love one another?) 그것은,

첫째, “성도의 사랑은 이웃사랑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Christians’ love is the starting point for loving neighbors): 주께서 “서로 사랑하라”라고 새 계명을 주신 대상은 세상의 불신자가 아니라 주를 믿는 제자들입니다. 이웃사랑은 주님을 믿어 한 몸이 된 우리 믿음의 공동체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몸의 손과 발로서 서로 사랑을 연습하고 하나됨을 통해 최종적인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됨을 깨닫게 됩니다.

둘째, “성도의 사랑은 복음을 전하는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Christians’ love is the key to open hearts for the gospel): 사도행전에 보면 주의 제자들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 (행. 2:46~47a)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초대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 일어난 역사는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7b)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사랑으로 하나될 때 굳게 닫혔던 불신자들의 마음을 복음으로 여는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셋째, “성도의 사랑은 주님이 주신 만큼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Christians’ love need to follow the Jesus’ love for us):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라고 하시며 제자들에게 사랑을 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그 큰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 의미는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통해 우리 스스로는 행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주신다는 뜻임을 믿습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그 큰 사랑만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주의 사랑으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우리 믿음의 공동체 되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 주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v.34)라고. 지난 주에 <마태복음 22장> 말씀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의 핵심을 ‘사랑하라’,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여 정의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요한복음>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드시, 제자들을 향한 자신의 계명 또한 ‘사랑하라’ 라고 말씀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우리 주께서 ‘계명’, 혹은 ‘명령’으로서 그를 믿는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바로 이 사랑의 명령 밖에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왜 주님은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 제자들에게 ‘사랑의 실천’만을 명령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기 때문이요, 사랑의 실천은 곧 ‘모든 율법의 완성’ (롬. 13:10)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 안에서 뜨겁게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저는 지난 주에 이어 “네 이웃을 사랑하라” 시리즈, 두번째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사랑은 무엇이며, 그 사랑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 어떤 사랑에 대한 정의보다도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일. 4:16) 라고 간명하고도 심오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유일하신 하나님, 그 창조주 하나님의 본질 안에서 영원 전부터 존재했던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랑의 출발은 사랑이신 하나님께 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확인했던 중요한 ‘사랑의 법칙’ 한가지는 사랑에는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은 방금 살펴 보았드시 그 출발점이 있고, 그 곳이 어디인지를 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 출발점을 이해할 때, 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영적 근거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이해했다고 사랑을 실천했다는 뜻은 아님!!) 이 ‘사랑의 순서’는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 ‘나 자신을 사랑’하고, 그리고나서 셋째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무시하고 내 자신의 열심과 의지로 ‘이웃을 사랑하겠다’고 노력하는 것은 의지는 좋으나 결코 결과가 따라주지 않음을 우리의 경험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스스로는 그 선한 의도데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의지가 약한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내 존재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내 존재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 아니고는 내 스스로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구원받고, 거듭났다고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로 내 신분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썩어질 육신에 속한 나의 존재로 인해 마지막 숨쉬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사랑이 끝까지 요청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는 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이웃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 사랑’과 ‘나 자신 사랑’의 실천이 전제될 때 비로소 가능함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제자들을 향한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명령은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는 사랑의 명령은 아닐지라도, 매우 도전적인 명령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명령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사랑’은 모든 사랑의 시작이요 끝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 사랑’에 해당하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이 매우 도전적인 이유는 이 ‘이웃사랑’은 최종적인 사랑의 실천이 되기 때문이요, 사랑의 마지막 아름다운 결과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관계만으로 행해지는 것이기에 남에게 잘 드러나지도 않고, 대체로 남의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눈에 드러나고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포함된 <요한복음 13장>말씀은 주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주님의 제자들과 마지막 나눈 시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겠으나,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면서 2가지를 명하셨다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 명령은 첫째 <성만찬>을 명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떡을 떼 주시고, 포도주잔을 주시면서 그들이 받아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너희가 이를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눅. 22:19)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과 같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v. 34)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특별히 주님의 2번째 명령, ‘서로 사랑하라’ 는 명하심을 성도 여러분과 함께 묵상하며, 주께서 그 당시 제자들 뿐 아니라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 모든 크리스챤들에게 사랑의 명령을 주신 뜻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명하신 것과 같이 왜 우리 크리스챤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요?” (Why should Christians love one another?) 그것은,

첫째, “성도의 사랑은 이웃사랑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Christians’ love is the starting point for loving neighbors): 성도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과 같이 오늘 주께서 “서로 사랑하라”라고 새 계명을 주신 대상은 세상의 불신자가 아니라 주를 믿는 제자들입니다. 또한 ‘서로 사랑’이라는 말에서 이해할 수 있드시, 사랑하는 대상이 믿는 성도들 상호간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믿는 모든 자녀들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명하심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이제 구체적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오늘 주님의 말씀은 그 중요한 첫걸음임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앞서도 잠시 말씀 드렸드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자신 사랑의 최종적인 결과물로서 매우 아름다운 열매이지만 이런 이웃사랑이 말처럼 쉽지 않음은 제가 새삼 강조하지 않아도 여러분 모두 공감하실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 뿐 아니라, 예수님 당시 그를 3년반동안 따라 다녔던 12제자들 조차도 주님이 잡히시던 그 전날 밤까지도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누가 더 큰가!?” 를 두고 다투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사랑의 명령은 주의 12제자들 뿐 아니라 주를 믿는 모든 크리스챤들에게 주시는 도전이자 격려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공동체 모습은 오늘날 ‘우리끼리 만 서로 사랑하자’는 식의 자기 교회 교인들 끼리 끼리의 이익집단의 모습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격려하는 데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10:24~25)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향한 사랑을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이유가 먼저 우리 믿음의 공동체가 서로 뜨겁게 사랑하지 못한 때문은 아닐까요?!

둘째, “성도의 사랑은 복음을 전하는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Christians’ love is the key to open hearts for the gospel):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한가지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v. 35)는 것입니다. 그것은 만약 그들이 서로 사랑하게 된다면,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주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하고 강력한 사랑의 공동체는 누구나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마치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말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6~47)라고.

성도들이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기쁨과 음식을 함께 나누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사랑을 나누었을 때, 온 백성들이 그것을 다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온 백성들이 그들을 칭찬하고 주님의 제자임을 인정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더 이상 고난과 핍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은 2000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예수 믿는 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합니다. 솔직히 핍박과 고난이 없다면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모이기를 힘쓰고 사랑으로 뜨겁게 섬길 때 모든 사람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인식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로 인해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여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요! 주님의 지체인 우리 성도들이 서로 사랑할 때 그토록 굳게 닫혔던 불신자들의 마음을 여는 강력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2000년 기독교 역사는 증명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복음이 불신자들에게 그토록 전해지기 힘든 원인은 우리 교회가 먼저 하나되지 못하고 서로 사랑으로 섬기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때문은 아닐까요?!

셋째, “성도의 사랑은 주님이 주신 만큼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Christians’ love need to follow the Jesus’ love for us): 제 개인적으로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장 부담스럽고 도전적인 주님의 말씀은 <34절>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As I have loved you~)라는 말씀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사랑이 숭고하고 크면 큰 만큼 그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곱으로 부담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허물 많은 인간이 어떻게 감히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수준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 소신껏 서로 사랑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오늘 본문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기 전에 먼저 특별한 것을 행하셨음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오늘날 <세족식>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잘 아시는데로 주님은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먼지 묻은 발을 일일이 씻어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발을 모두 씻기시고 나서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v. 14) 라고 세족식의 의미를 그들에게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때묻은 발’ ‘서로의 실수하고 허물 많은 모습’을 덮어주고 감싸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의 수준을 몰라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라는 이 엄청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은 그 당시 제자들 뿐 아니라 오늘날 여러분과 저의 수준을 잘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분명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고 우리를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주는 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뜻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주님의 영 성령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받을 때 우리는 서로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그를 믿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 5:14)고 선언하시고 나서,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 고 도전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진정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길 원합니까? 여러분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춰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빛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착한 행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주의 사랑으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 믿습니다. 이 아름다운 사랑의 빛을 세상에 비추며, 많은 사람들을 옳은데로 인도하는 하늘의 별과 같은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