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7, 2020

“아름다운 발이여” (How beautiful are the feet)

Preacher:
Series:
Passage: 로마서 (Romans) 10:13~15
Service Type:

“아름다운 발이여”

(How beautiful are the feet)

6-7-20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10:13~15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For,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How, then, can they call on the one they have not believed in? And how can they believe in the one of whom they have not heard? And how can they hear without someone preaching to them?)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 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And how can they preach unless they are sent? As it is written, “How beautiful are the feet of those who bring good news!”)

 

[설교 요약]

            사도 바울은 복음전하는 자의 삶이 얼마나 축복된 것인가를 우리에게 밝히며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v.15)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좋은 소식입니까? 그것은 ‘바벨론의 멸망’ (사. 13장/ 계. 14:8) 에 대한 소식이요, 하나님의 의로운 종 메시야가 고난 당함으로 악을 이기고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이 온전히 통치하게 되었다는 소식 (사. 52~53장)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아름다운 삶으로 인정받기 원한다면, 우리는 이 질문을 반드시 스스로에게 해봐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 전도자의 출발을 위한 3가지 질문” (Three questions for beginning a preacher’s life to good news) 입니다. 그것은

첫째, “나는 구원을 받았나?” (Am I saved?)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v.13) 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은 전도자를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복음의 능력을 선포함과 동시에 복음증거자의 삶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음으로서 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구원하여 주신 은혜에 대한 진정한 감격과 감사 없이는 전도자의 삶은 시작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나는 사명을 받았나?” (Did I receive calling/ mission?)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크리스챤 들 중에는 ‘사명자’로 사는 것을 하나의 선택사항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으로 보아야 합니다” (고전. 4:1) 라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몇몇 선지자나 초대 교회 사도들 뿐 아니라 우리 모든 거듭난 성도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인 복음을 증거할 명령을 부여 받은 사명자임을 우리는 이해하고 있습니까?

셋째, “나는 순종하는가?” (Do I obey God?)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지시하실 땅에 나아감으로 우리에게 믿음의 귀한 본을 보였습니다 (창. 12장). 만약 여러분이 아브라함의 본을 좇아 순종함으로 사명자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통해 새롭게 하시고 여러분을 다스리시는 은혜를 먼저 누려야 합니다 (겔. 36:26~27). 성령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함으로 육신의 소욕을 좇지 않고 성령의 충만하신 능력으로 아름답게 열매맺는 전도자의 삶을 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사도 바울은 복음전하는 자의 삶이 얼마나 축복된 것인가를 우리에게 밝히며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v.15)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v.13) 는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자의 발걸음이 사람의 눈에는 별 것 아닌 것으로 취급될지 모르나,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심히 아름답게 보인다는 사실 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선하신 눈 앞에서 아름다운 삶으로 인정받기 원한다면, 오늘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 새로운 영적 각성을 주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는 <캠퍼스 복음>을 미션으로 시작된 교회입니다. 새벽 이슬같은 청년들에게 주님의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영광스런 증인의 미션을 맡은 교회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전도자로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우리 크리스챤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라는 것을 선지자 예레미야의 삶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특별히 선택된 하나님의 종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오늘날 복음적 시각에서 볼 때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 (벧전. 2:9) 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모든 성도의 한 사람으로 재발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구원함을 받고 하나님의 복된 아들과  딸이 된 우리 모든 크리스찬은 예레미야와 같이 불타는 가슴과 눈물 흘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포기하지 않고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둡고 절망적일수록 성도들은 더욱 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빛”을 강하게 비춰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빛을 비추는 하나님의 자녀’ (사.60:1)의 아름다운 삶이 오늘 본문 <롬. 10:15>에서 사도 바울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 (v.15)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사도가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v. 15)라고 인용한 원문의 말씀은 <이사야 52장>입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들을찌어다 너의 파숫군들의 소리로다” (사.52:7~8) 라고. 이사야가 여기서 ‘좋은 소식’이라고 묘사한 것은 어떤 소식일까요? 그것은 바벨론으로 상징되는 세상나라가 멸망한다는 소식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계. 14:8)고 계시된 큰 성 바벨론, 세상나라요, 또한 세상나라 임금들을 조정한 악한 영 사단 마귀가 멸망한다는 소식인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구속하신다’ (사.52:9)는 의미인데, 이것은 ‘고난 받는 종’ (사.52~53장)으로 묘사된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사. 52:13, 53:3)고. 여호와께서 보내신 그의 종, 메시야를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징계를 받게 하심으로 악한 영 사단 마귀를 멸하심으로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아름다운 소식을 선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전에 한국에서 청년사역을 모범적으로 잘 하고 있는 어떤 목회자가 한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서 대담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질문자가 그 목회자에게 오늘날 청년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에 대해 묻었을 때, 그분은 이렇게 답변했던 것입니다. “첫째) 청년들은 진리에 대해 목말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청년들은 참되게 사랑하고 사랑받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청년들은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라고 그 목회자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청년들의 모습을 잘 대변해 준 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청년들은 진리에 목말라하고 갈망합니다. 그런데 부조리한 사실은 그들이 도리어 돈과 섹스와 파워를 쫓아다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헛된 것임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또한 청년들은 진실한 사랑을 원하면서도 정작 그들의 삶에서는 조건과 감정에 조정되어 사랑 아닌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의미하며 무가치하다는 것을 그들은 경험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밖의 청년들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자란 청년들까지도 선입관을 가지고 ‘교회는 재미없고 매력없는 곳’이라고 치부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가 이번에 <로마서 10:13~15>말씀으로 설교준비를 하다가 설교자료를 검토하던 중에 그동안 1~2년을 주기로 같은 로마서 본문말씀을 이번에 3번째로 택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발견하고 처음엔 다른 말씀으로 바꿀까?! 라고도 잠시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 봤을 때 이 말씀은 우리 성도들에게 다시한번 꼭 나누어야 하는 말씀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오늘 본문말씀을 과거 제가 전했던 설교 자료를 뒤지다가 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아포슬 교회 성도들이 복음의 선포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 말씀을 주시기를 기도하는 가운데 정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2번의 설교를 찬찬히 살펴보았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 내용이 유사한 점도 있지만, 모두 다른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2번의 설교가 각각 ‘구원받은 자’와 ‘보내심을 받은 자’에 강조점이 있다면, 오늘 메시지는 ‘전도자의 동기는 무엇인가?’라는 관점이 앞의 설교와 차이점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제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고민하며 살펴보기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곰곰히 살펴본 후에 하나님께서 복음을 들고 산을 넘는 자를 아름답다고 불러 주심을 이해 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여러분이 여전히 복음을 전하는 자의 삶을 꺼린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만약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아름다운 삶으로 평가받기 원한다면, 우리는 이 질문을 반드시 스스로에게 해봐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 전도자의 출발을 위한 3가지 질문” (Three questions for beginning a preacher’s life to good news) 입니다. 그 질문은

첫째, “나는 구원을 받았나?” (Am I saved?)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선언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v.13) 라고. 저는 저의 경험으로 미뤄볼 때 성경의 말씀들이 낮설게 느껴지고 저와는 동 뜰어진 이야기로 느껴졌던 지난 순간들을 기억해 봅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철든 자녀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충성된 제자로 살아감에 있어서 많이 부족한 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한가지 분명히 믿고 확신하는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의 모든 죄가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적어도 이것만은 결코 부인할 수 없고 빼앗길 수 없는 진실임을 저는 믿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는 감히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 뿐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의 믿음의 목표는 교회 출석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을 누리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의심하고 그분의 선하심에 대해 흔들릴 때 우리 각자가 무엇보다도 먼저 확인해 보아야 하는 것은 ‘나의 구원’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나를 살리셨음을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나? 하는 것인지를 스스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에 대한 확신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은 언제나 믿음의 첫걸음이자 다시한번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든든한 기초가 된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구원받지 못했다면, 결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을 수도, 그분의 구원의 권능과 지혜를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정말 부끄러운 것은 ‘내가 아직까지도 예수 믿지 못함으로 구원받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했음에도 아무런 심각성을 갖지 못하고 불신 가운데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으셨습니까?!

둘째, “나는 사명을 받았나?” (Did I receive calling/ mission?) 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면 두번째로 질문해 보아야 하는 것은 ‘나는 사명을 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계속 선포합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 (v.14~15) 라고. 지난 주부터 <매일성경> 큐티 말씀으로 <고린도전서>말씀을 시작하면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는 침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전. 1:17)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이 보내심을 받은 이유는 침례를 주고 교회에 영향력을 미치고 리더로 세움 받는 것 이전에, ‘복음을 전하라’는 미션을 행하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어저께 큐티 본문에서도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람은 이와 같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으로 보아야 합니다” (고전. 4:1) 라고 바울은 우리 크리스챤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한사람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모든 크리스챤은 <그리스도의 일꾼> (servants of Christ)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 (stewards of the mysteries of God) 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이라는 자기인식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우리 믿는 자는 <사명을 맡은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죽어서 천국가는 것뿐이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주님은 그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그의 제자이자 일꾼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으로 우리를 부르심으로 ‘사명자’로 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명자로 부르셨는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기 원합니까? 만약 우리 자신이 ‘과연 하나님께서 나를 사명자로 부르신 것일까?’를 이해하기 원한다면, 성경으로 돌아가십시요! 성경 66권은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이런 사명자의 삶이 얼마나 축복된 것인가를 넘치도록 가르쳐 주시고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나는 순종하는가?” (Do I obey God?)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2,000여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의 눈을 밝혀 주셨을 때 ‘주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 (요. 8:56) 라고 우리 주님은 지적하신 바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믿는 자의 조상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약속의 땅에 나아감으로 우리에게 사명자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창세기에서 잘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와 같은 순종의 삶을 살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히. 11:10)라고, 즉 하나님이 온전히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소망하고 바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었던 동기임과 동시에 모든 거듭난 성도의 순종의 이유인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부르심에 대한 깨닫음 뿐 아니라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열매 맺는 삶으로 연결되기 위해서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중요한 한가지는 무엇일까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에스겔을 ‘이스라엘의 파숫군’으로 세우시고 나서, 장차 그의 영 성령을 통해 모든 신자들의 마음에 부드럽고 그의 법을 행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실 것을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겔. 36:26~27) 고 말입니다. 우리 성도가 어떻게 부르심에 합당한 충성된 순종을 행할 수 있을까요? 내 육신에 속한 것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약속하신 성령님께 의지함으로서 그분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성령을 좇아 행할 때,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갈. 5: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복음을 들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자의 발은 아름다운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먼저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셨기 때문이요, 모든 믿는 자를 살리는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자의 삶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지를 깨닫았기 때문이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그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고자 좋은 소식을 들고 그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잃어버린 한 영혼을 향해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곳을 향해 길을 떠나는 복음의 아름다운 발로 사시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