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18, 2021

“담대한 삶” (The Bold Life)

Preacher:
Series:
Passage: 잠언 (Proverbs) 28:1
Service Type:

“담대한 삶”

(The bold life)

7-18-21

본문말씀: 잠언 (Proverbs) 28:1

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The wicked man flees though no one pursues, but the righteous are as bold as a lion)

[설교 요약]

저는 제 자신이 어떻게 담대한 믿음의 삶을 살아 갈수 있을 것인지를 묵상하면서 <잠언 28:1>에 드러난 ‘담대함의 비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담대함은 ‘내가 얼마나 양심적으로 살고 도덕적으로 살 것인가?’를 논하기 이전에 우리 인간 존재 자체가 그것을 결정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내가 ‘악인’인가? 아니며 ‘의인’인지? 를 자문해 보게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악인일까요?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라고 선언합니다. 본질적으로 우리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한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의인입니까? 사도 바울은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고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용서함 받음으로 의롭다고 불리어진 (=칭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의인은 사자처럼 담대한 것일까요?” (Why are the righteous be able as bold as a lion?) 그 이유는,

첫째,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 (Because their sins are forgiven) 입니다: 어떤 우리 인간의 행위로도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존재라면, 그것은 우리 모든 인간은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죄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요. 34).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용서함 받아 죄에서 비로소 자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라고. 예수를 믿음으로 정죄함을 받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첫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 (Because they are fulfilled the Holy Spirit) 입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 중에 ‘나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두려움과 염려가 멈추지 않는 삶을 사는데, 이것은 무엇 때문이죠?!’라고 질문하지는 않습니까? 저는 그 중심에는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의 내면에서 풍성하게 맺게 하시는 ‘성령의 열매’ (갈. 5:22~23)를 통해 우리는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셋째, “세상을 이겼기 때문” (Because they have conquered the world) 입니다: 주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통하여 세상을 이기는 것은 주께서 먼저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어떤 환난 가운데서도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주님 다시 만나는 날까지 주를 믿는 믿음의 반석 위에서 견고하게 서서 성령의 충만한 은혜로 세상을 이기며 담대하게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제 자신이 어떻게 담대한 믿음의 삶을 살아 갈수 있을 것인지를 묵상할 때면, 늘 기억나는 한 스토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존 웨슬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한 사건인데 그가 우리가 사는 조지아 주의 사바나 선교를 별 열매없이 끝내고 영국으로 돌아가는 배의 선상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어느 날 밤에 갑자기 불어 닥친 폭풍우로 인하여 성난 파도가 배를 뒤집힐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폭풍우 가운데 웨슬리는 선상에서 죽음의 공포에 질려 있었는데, 한쪽 갑판 위에 2명의 형제가 마주 앉아 평화로운 얼굴로 함께 찬양과 기도하는 모습을 그는 발견했습니다. 자신은 죽음의 공포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속에서 자신과는 대조적으로 어떤 두려움도 없이 조용히 찬양과 기도를 하는 이들의 모습은 그 폭풍우보다도 더 강하게 웨슬리의 마음에 큰 충격을 주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웨슬리는 이들이 그 당시 유럽에서 <진젠돌프>백작이 이끈 영적 공동체인 <모라비안 공동체>에 소속된 형제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도대체 이 형제들이 가진 신앙이 무엇이기에 그 어떤 죽음의 공포도 그들의 평화를 앗아갈 수 없었을 지를 알고 싶었고, 그 이후 그들과 깊은 교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모라비안 공동체집회에 참석하여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마음 속에 이루시는 변화의 역사’의 부분을 읽다가 “나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했다”는 그 유명한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바로 성령께서 그의 마음에 뜨겁게 역사하심으로 웨슬리는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제 2의 사도 바울’이라 불릴만큼 부패한 영국 교회의 회개운동과 미국의 영적 부흥을 일으키는 복음의 사도로 살아가는 결정적 개기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놀라운 영적 변화는 폭풍우 치던 어느 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행했던 이름모를 신실한 형제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잠언 28장>의 주체는 ‘의인의 담대함’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 ‘악인은 두려움과 불안에 떤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인은 그가 저지른 죄악으로 인하여 양심이 고소 (=정죄)를 받음으로 스스로 두려움에 휩싸이고,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사람을 겁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 곧 의인은 아무리 위태로운 상황을 만나더라도 젊은 사자처럼 담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땅이 요동하고, 큰 물이 휘몰아칠 찌라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이 ‘두려움과 염려’는 성경에서 뿐 아니라, 오늘날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겪는 대표적인 심리현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세상 사람들은 이런 ‘염려와 두려움’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서로의 관계의 복잡성과 주어지는 수많은 일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긴장 가운데 살아가게 됨으로 염려하고 불안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런 불안함과 막연한 두려움에 기인한 긴장은 당연한 것이요, 피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현대 심리학자들은 주장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러나, 성도 여러분이 만약 오늘 성경본문을 자세히 살펴봤다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의 원인과 세상학자들의 주장과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앞에서 살펴봤듯이, 세상 사람들은 인간의 이런 불안과 두려움은 사회의 발전에 따른 자연스런 인간심리(=병리)현상으로 봄에 반해, 성경은 그렇게 진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잠언 본문에서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불안하고 두려워함으로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지만, 의인은 어떤 두려움도 없이 사자처럼 담대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불안과 두려움이 단순한 사회구조의 복잡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상태의 문제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악인>과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누가 ‘악인’이요, 누가 ‘의인’일까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 질문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악인’은 ‘하나님께 반역함으로 죄를 범한 첫 인간, 아담의 죄를 물려 받은 모든 인간’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라고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용서함을 받음으로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는 자’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박국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이렇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고 말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피의 능력으로 죄 씻음 받아 죄 없다고 인정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의인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말씀의 주제로 돌아와서 ‘우리 인간은 어떻게 어떤 상황과 형편에도 관계없이 사자처럼 담대한 삶을 살수 있을 것인가?’를 결론적으로 살펴보기 원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어떤 도덕적이고, 인격적인 고매한 조건을 가짐으로 담대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불리어 짐으로써, 다시 말해 ‘의인’으로 인정받음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의인은 사자처럼 담대한 것일까요?” (Why are the righteous be able as bold as a lion?) 그것은,

첫째,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말씀에서 ‘내가 어떤 삶의 조건에 관계없이 내적 평화를 누리고, 세상이 줄 수 없는 담대함을 누릴 수 있는가?’는 나의 노력과 능력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님을 성도 여러분은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곧 ‘의인’이 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예수 믿음으로 거듭남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거듭나는 의인이 될 때 담대한 삶을 살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더 이상 정죄함을 받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모든 인간이 아담으로 물려 받은 죄로 인하여 그 죄의 힘 아래에서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죄가 우리를 끝임없이 정죄하고 고소함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불안과 두려움에서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롬. 7장).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죄의 힘에서 자유하게 됨을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 8:34~36) 고.

따라서 주님은 ‘우리가 오직 주님의 은혜로써 죄에서 해방시켜 주실 때만 비로소 죄에서 자유할 수 있음’을 영적으로 밝혀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본질적으로 우리를 끝임없이 괴롭히는 죄의 속성들, 즉 죄책감, 정죄의식, (양심의 가책), 염려, 불안, 공포, 두려움…의 굴레에서 자유케 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자유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고 사도 바울이 선언한 것이 정확히 바로 죄에서 자유케 된 성도, 곧 의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지 않고는 결코 그 죄로부터 자유할 수 없고, 우리를 고소하는 모든 정죄의 화살로 인하여 참된 평화와 담대한 삶은 시작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아들을 믿음으로 거듭남으로 자유 하셨습니까? 그 아들의 권세를 통하여 죄사함을 받았습니까?

둘째,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성도 여러분 중에 ‘나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두려움과 염려가 멈추지 않는 삶을 사는데, 이것은 무엇 때문이죠?!’라고 질문하지는 않습니까? 어떤 면에 있어서, 제가 오늘 말씀에서 가장 힘주어 격려하고 도전하고자 하는 성도들이 여기에 해당하는 분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분의 자녀로서 살아갈 때, 죄와 사망의 힘을 이기고 세상의 어떤 염려와 두려움없이 담대함으로 살아가게 된다’ 라고 성경에서 우리 성도들에게 약속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과연 여러분과 저는 이런 담대한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저는 감히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믿는 자녀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약속들이 가능한 것들이 아니라면 그 성경말씀은 거짓이라고 감히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씀이 2,000년전 말씀이든 4,000년 전 말씀이든 그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그 한가지도 예외 없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2021년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에게 동일한 능력과 진리로 함께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음으로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았는데, 여전히 삶 속에서 불안과 두려움에 고통받는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 중심에는 성도들이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충만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청년들과 말씀을 나누며 자주 강조하고 도전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 믿고 거듭나게 되었다는 ‘영적 출생’이 자동적으로 ‘영적 성숙’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거듭났다고 해서 갑자기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전히 육신의 몸을 입고 살아가기에 실수하고 넘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내가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겉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싫어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6~17) 고 사도 바울이 성도들을 도전하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바로 성령에 순종하여 육체의 소욕을 죽여 나감으로 우리는 점점 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성숙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의 충만한 삶은 그 어떤 밖으로 드러나는 다양한 ‘성령의 은사’ (the gift of the Spirit) 이전에 내면속에 임하는 ‘성령의 열매’ (the fruit of the Spirit)를 통하여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금할 법은 없습니다” (갈. 5:22~23) 라고. 바로 이런 성령의 열매가 그 어떤 세상의 유혹과 죽음의 위협을 이기는 강력한 힘임을 우리는 이해하고 있습니까?

셋째, “세상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의인이 사자처럼 담대한 이유는 이들이 세상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세상을 이겼습니까?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의 충만하심으로 세상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해 선포하셨드시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슥. 5:6) 말씀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 성령의 충만을 통하여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도의 승리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에서 더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자신이 가면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마무리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주님은 그를 믿는 우리 제자들에게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입니까? 그것은 주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마귀의 일을 멸하고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살리심으로 세상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분의 제자된 우리 모든 성도의 승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승리, 세상을 이기신 승리를 통하여 가능한 것입니다. 이 주님의 승리가 우리가 당하는 어떤 환난 가운데서도 담대할 수 있는 이유요, 어떤 죽음의 위협 가운데서도 평화로울 수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누리는 평화요, 주님이 이미 세상을 이기심으로 인하여 우리 또한 담대함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삶의 염려와 근심으로 지쳐있는 여러분과 저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말라” (마. 6:25,31)라고. 성도 여러분은 현재 무슨 이유로 염려하고 불안해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결코 염려하지 말고, 도리어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믿음으로 아뢰며 (빌. 4:6) 감사와 담대함으로 사자처럼 살아가는 그분의 제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바라기는 주님 다시 만나는 날까지 주를 믿는 믿음의 반석 위에서 견고하게 서서 성령의 충만한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며 담대하게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