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11, 2021

“용서” (The Forgiveness)

Preacher: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6:14~15
Service Type:

“용서”

(The Forgiveness)

7-11-21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6:14~15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설교 요약]

용서는 크리스챤의 중요한 덕목이지만, 이 용서만큼 실천이 어려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주기도문’을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 6:9~13).

이 기도문을 살펴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의 형태를 통하여 우리가 먼저 실천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님은 강조함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v.12)라고. 형제에 대한 용서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길 구하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과실을 저지른 형제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주석가 <매튜헨리>는 이기적인 우리의 본성은 그 의무에 응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주님은 형제에 대한 용서’를 기도문에 넣으신 것이다. 따라서 그 의무는 계속해서 되풀이하여 다짐해어져야 한다”라고 주석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크게 <하나님의 2가지 용서>가 있음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첫번째 <법률적인 용서> (judicial forgiveness) 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를 그의 피를 통하여 죄 용서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용서받는 죄는 원죄입니다. 즉,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지고 죽음을 가져오게 된 원죄입니다. 그럼으로 모든 사람은 그 원죄를 유전받게 되었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여 주셔서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며, 이것이 법적인 용서인 것입니다.

두번째는 <부모로서의 용서> (parental forgiveness) 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한번 하나님의 자녀의 된 자는 두 번 다시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성도의 견인). 그러나, 이것이 ‘이제부터는 내 마음데로 살아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죄악된 삶으로 사생아처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기에 때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굳은 마음으로 형제의 과실을 용서치 않을 때, 하나님 아버지는 또한 우리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치 않으시면 어떻게 될까요? 약속의 은혜를 받을수 없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누릴 수 없고, 충만을 누리지 못하기에 기쁨이 상실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시. 51:10~11/ 요일. 1:3~4). 이것은 매우 심각한 성도의 적신호임을 우리는 깨닫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허물을 용납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형제를 용서하지 않을 때,

  • 나 또한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참된 상처의 치유’를 경험할 수 없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요일. 4:20)임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 (롬. 12:19)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치유의 은혜로 말미암아 참된 용서와 사랑의 사람이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세상 사람들은 인생을 ‘고해’ (苦海)라고 말합니다. ‘고생과 고통의 바다’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어 그분의 자녀가 됨으로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기에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인생’을 대하는 태도는 세상사람들과 본질적으로 다름을 저는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육신의 몸을 입고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수없이 많은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들을 우리가 크리스챤이라고 해서 모두 피해 나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힘든 상황 가운데 우리는 때로 상처 받기도하고 상처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미성숙과 실수로 말입니다. 저는 오늘 “용서”라는 제목의 말씀으로 성도 여러분과 위로와 회복의 시간을 가지기 원합니다. 그 무엇보다 ‘용서’에 있어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뜻이 무엇인지를 묵상하며, 그 뜻을 따라 행할 수 있는 복된 용서의 사람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8장까지 복음서에서 가장 길 뿐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의 핵심이 되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소위 ‘산상수훈’ (The Sermon on the Mountain)이라고 부르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 산상수훈 가운데 있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이 포함된 <마. 6:5~15>을 통하여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중언부언 (=빈말을 되풀이)하지 않고 은밀한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v.9)고 하시며 직접 기도의 내용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주께서 <마. 6:9~13>까지 우리가 ‘주기도문’이라고 부르는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난 직후에 하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인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v. 14~15) 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무서운 결과에 대한 경고처럼 엄중하게 들립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이미 오늘 본문내용을 기도의 내용에 포함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ors) (v.12)라고. 그런데 주석가 ‘매튜헨리’는 <마태복음 6장>에서 주기도문과 연관된 말씀을 이렇게 주석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이 있는 대부분의 간구는 그 당시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에 의해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문의 형태로서 이미 사용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다섯번째에 있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v.12) 라는 구절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우리 주께서 여기에서 그 구절을 첨가시킨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일에 있어서 우리에게 해를 입힌 자들에 대한 우리의 용서를 특별히 고려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용서를 구할 때, 우리 자신이 먼저 해를 입힌 자를 용서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의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의무의 실천을 다짐하기 위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기적인 우리의 본성은 그 의무에 응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의무는 계속해서 되풀이하여 다짐해야 한다 (v.14~15)]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12절>에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했을 때, ‘죄’라는 단어를 헬라어 원문에서는 <빚> (debts)이라고 표현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연약함과 실수로 하나님 앞에서 저지르는 죄는 하나님께 빚을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일만 데나리온 빚진 자>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기억케 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베드로가 ‘형제가 자신에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해야 하는지?’에 대해 묻었을 때 이런 비유의 말씀으로 주께서 대답하십니다. 어떤 임금님이 그에게 ‘일만 데나리온’ 빚을 진 종을 불쌍히 여겨서 그 빚을 탕감해 줬는데, 그 종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을 진 자를 용서하지 않고 옥에 집어 넣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임금이 일만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해준 종에게 진노하며 ‘나는 너를 불쌍히 여겨서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줬는데, 너도 빚진 자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마땅했다!’라고 말하며, 그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라고 명했다는 것입니다 (마. 18:21~35). 주님은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하시고 나서 이렇게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35)라고 말입니다. 역시 엄중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말씀과 같이 이 비유의 말씀에서도 ‘우리가 먼저 형제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하늘 아버지도 우리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에서 <일만 데나리온 빚진 자>는 바로 <구원받은 성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갚을 길 없는 크나 큰 빚을 하나님으로부터 탕감 받음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제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성경에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2가지 용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무엇보다도 첫번째는 <법률적인 용서> (judicial forgiveness) 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주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몰려서 집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을 때, 4명의 친구들이 중풍병자 친구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고자 지붕을 뚫고 환자를 누운 자리채 집안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Son, your sins are forgiven) (막. 2:5)라고. 다시 말해, 중풍병자의 육신의 병 뿐만 아니라 죄까지도 하나님께로 부터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함으로 우리 모든 인류가 유전받게 된 <원죄> (The Original Sin)인 것입니다. 그 원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죄와 사망이 왕노릇하는 삶을 단 한명도 예외없이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믿음을 통하여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법률적인 용서>라고 말한 것은 여러분과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을 받게 되었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한번 죄의 용서를 받게 된 자는 법률적으로 두번 다시 그 용서가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그의 열 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그들에게 포도주 잔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This is My blood of the New Testament which is for the forgiveness of sins) (마. 26:28).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값을 다 지불하심으로 그를 믿는 여러분과 저는 법률적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어떠한 죄로부터 영원토록 죄 용서함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선언하는 <법률적 용서>인 것입니다.

            두번째는 <부모로서의 용서> (parental forgiveness) 입니다: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결코 갚을 수 없는 죄값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대속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형제가 나에게 행한 작은 빚조차 용서해 줄수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작은 빚”이라고 말씀드린 이유는 우리 각자가 느끼는 상처와 아픔이 작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서 대신 갚아 주신 죄의 빚이 너무도 크고 엄청나다는 뜻입니다. 제가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실 (=죄/허물/실수…)를 용서하지 않으시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라고 질문 했었는데, 그 대답은 우리 각자가 경험하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을 때, 하나님도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존 맥아더’목사는 ‘부모로서의 용서’에 대해 설교하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약 나의 자녀들, 나의 아들과 딸들이 나에게 불순종하는 죄를 지었다고 해서 우리들의 관계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들의 아빠인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마음 가운데는 그들이 나의 자녀이기에 자동적인 어떠한 용서가 저의 마음 가운데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이렇게 말할 때까지는 그 아이와의 친밀한 관계성은 회복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빠, 제가 잘못 했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 친밀함은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의 죄를 범하고서 나단이 그 죄를 지적하였을 때, 그는 눈물의 회개 가운데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 51:10~11)라고. 다윗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죄로 인하여 성령의 소멸됨을 뼈아프게 경험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곧 ‘구원의 즐거움이 상실’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구원의 즐거움’ (the joy of your salvation)입니까? 이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 누리는 친밀한 관계의 즐거움’입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요한 일서>를 쓰면서 밝히는 중심되는 이유입니다. 요한은 <요일. 1:1~2절>에서 ‘자신과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나서 ‘왜 자신이 복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전하는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일. 1:3~4)고.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님의 충만하심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와 사귀어가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와 누리는 친밀함’이며, 이것이 우리 모든 구원받은 그분의 자녀가 누려야 할 ‘구원의 기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의 허물과 실수를 용서하지 못하는 성도가 겪게 되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성이 상실되는 것이요, 그것은 ‘충만한 기쁨의 삶’이라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약속된 가장 복된 특권이 상실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본질적으로 주께서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의 과실을 용서치 않으신다”고 <15절>에서 말씀하신 뜻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기 전에 한가지 점을 여러분과 확인하기를 원합니다. 용서가 필요하고 해야 하는 줄도 알지만, 만약 성도들이 여전히 용서하지 않고 있다면, 무엇이 성도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일까요? 그것은 첫째) 형제를 용서하지 못할 때, ‘나 또한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국의 시인이자 목회자였던 ‘조지 허버트’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건너야 할 다리를 무너뜨리는 것이다’라고 심각하게 도전한 바 있습니다. 나 또한 용서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우리는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 용서는 단순히 ‘잊어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상처의 치유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용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임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신있게 ‘하나님을 사랑합니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지체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일. 4:20)라고 사도요한은 우리의 모순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모순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기에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롬. 12:19)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형제 자매의 실수와 허물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친히 우리의 원수를 갚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선하심을 의심하는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상처를 준 그 누군가를 용서했습니까? 용서는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군가의 잘못으로 인하여 내가 여전히 ‘상처’ (broken heart)로 고통받고 힘들어 한다는 그것이 역설적으로 왜 우리가 적극적으로 그 상처에서 벗어나야만 하는지에 대한 강력한 이유일 것입니다. 바로 용서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실패하고 넘어질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무엇보다 뜨겁게 사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8)고 베드로는 우리를 사랑으로 격려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의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합시다. 때로 우리의 미성숙과 연약함으로 사랑에 실패할지라고 결코 포기하지 말고 다시 도전합시다. 이것이 형제에 대한 용서의 시작이요, 여러분이 지금까지 겪고 있는 상처를 치유하는 진정한 회복의 길이 될 것입니다. 이런 진정한 용서와 치유의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을 통하여 풍성히 누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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