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4, 2021

“참된 예배자” (The True Worshiper)

Preacher:
Series:
Passage: 요한복음 (John) 4:24
Service Type:

“참된 예배자”

(The True Worshiper)

7-4-21

본문말씀: 요한복음 (John) 4:24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설교 요약]

            성도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어집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고 불리어 지는 사람의 대표적인 특성일까요?” 그는 “참된 예배자”라고 저는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께서 만나셨던 <수가성의 여인>은 남편 다섯을 두었고 지금 같이 사는 자도 남편이 아닌 험난한 세월을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그녀의 그러한 험난한 세월을 통한 영적 목마름이 도리어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진정한 예배자로 준비시켰다는 사실입니다.

그녀가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v.20) 라고 말하면서, 어디에서 예배하는 것이 진짜 예배인지를 질문했을 때 주님은 말씁하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v.21)라고.

이제 누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찾으시고 기뻐하시는 예배자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진정한 예배자인가?” (Who is a true worshiper?)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The person is who pursues God): 하나님을 추구한다는 것은, 시편기자와 같이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 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여인처럼 인생의 깊은 목마름 가운데 자신을 구원할 구원자에 대한 간절한 추구가 참된 예배자의 동기요 출발인 것입니다.

둘째, ‘영으로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The person is who worship in spirit): 주께서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고 하신 오늘 말씀에서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본질적으로 ‘성령으로써 예배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빌. 3:3).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만이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것까지도 깨닫아 나갈 수 있도록 예배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고전. 2:9~10).

셋째,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The person is who worship in truth): 그러면, 무엇이 “진리로 예배한다”는 뜻일까요? 이것은 <예배자의 자세/마음상태>를 의미합니다. 밖으로 드러난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의 상태인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롬. 12:1~2). 단순히 주일예배 때 뿐 아니라, 하루 24시간 일주일 7일을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리로 드리는 예배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지금도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는 그의 자녀를 찾고 계십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추구함으로 성령의 충만하심 가운데 거룩한 산제사로 참된 예배를 드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성도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어집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 (혹은 ‘크리스챤’) 이라고 여러분이 불러어지게 되었다면, 무엇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일까요? 거기에 대한 일차적인 대답은 물론 사도 바울이 잘 정의한 바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라고 그는 말합니다. 여기서 사도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사람” 혹은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 (a person who belongs to Christ)이 정확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무엇이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고 불리어 질수 있는 특성일까요?” 저는 그 중심에 그는 “참된 예배자”라고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진정한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가장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참된 하나님을 향한 예배자로 설수 있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서 만나 주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신 여러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서는 오늘 본문에서 주께서 만나셨던 <수가성의 여인>은 여러가지 면에서 돋보이는 인물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돋보인다’라고 그녀를 표현한 것은 오늘 본문말씀이 포함된 <요한복음 4장>에서 두드러진 그녀의 존재감 때문일 것입니다. 그 존재감이 특별한 것은 첫째) 그녀가 <사마리아 여인>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은 특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경멸과 증오’의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원래 남유다 백성들과 동일한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앗시리아제국이 사마리아 땅을 포함한 북이스라엘 왕국을 점령하고 나서 소위 ‘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북이스라엘 백성과 그들 앗시리아인들을 결혼시킴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앗아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북이스라엘 민족과 앗시리아인들 사이에서 출생한 사람들이 사미리아인 입니다. 이와 같이 남유다 민족은 이전의 북이스라엘 민족과의 오래된 국가간의 갈등에 이어, 사마리아인들이 이방민족의 더러운 피가 섞인 혼혈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멸시했고 그야말로 ‘개처럼 취급’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그녀의 과거의 삶은 보통 사람과는 비교될 수 없는 <두드러진 삶>을 살았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물 좀 달라” (v.7) 라고 말을 건내시고 나서,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v.14)라고 선언하시고 나서 느닷없이 “네 남편을 불러오라” (v.16) 고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남편>이라는 단어는 그녀에게 있어서는 ‘아킬레스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대소롭지 않다는 듯이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v.17)라고 대꾸했지만, 주님은 송곳처럼 정확히 그녀가 걸어온 삶을 이렇게 한 문장으로 밝히는 것입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 (v.17~18)라고. 주님의 신성은 그녀의 과거의 그 어떤것도 모르시는 것이 없으시기에 그녀가 다섯번의 결혼과 이혼을 거듭했고, 더군다나 현재 살고 있는 남자는 남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그녀가 지나온 삶의 질곡이 어느정도 컸을지, 그리고 그 과거의 무거운 짐이 현재 여전히 강하게 그녀를 짓누르고 있을지를 짐작케 합니다. 한마디로 부끄럽고 실패한 인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18년간 혈루증으로 심한 고통 가운데 처했던 여인을 치유하실 때 처럼, 오늘 이 사마리아 여인에 있어서도 자신의 가장 부끄럽고 수치를 밝히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녀의 걸어온 과거의 인생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고, 자랑스럽지 못한 힘들고 고통스러운 인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진지한 신앙심>을 소유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과거를 적나라하게 밝히신 후 그녀의 첫번째 반응은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 (v.19)라는 겁니다. 평범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과거를 손금 보듯 한마디로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갑자기 대화의 주제를 <예배> (worship)로 옮깁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v.20) 라고. 이 말은 그들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에 있는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했지만, 유대민족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했음으로, 그렇다면 ‘어느 쪽에서 드리는 예배가 진짜 예배입니까?’ ‘어느 쪽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 예배입니까?’ 라고 그녀는 질문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녀에 대해서 진지한 신앙심을 소유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녀가 예수님을 ‘선지자’로 부른다든지, 혹은 ‘예배’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라는 것은 아닙니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그녀가 유대인들이 상종조차 하지 않는 사마리아인이라는 사실 뿐 아니라, 그들 중에서도 그녀는 더 두드러지는 힘겨운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이 그녀를 더욱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목마름으로 나아오게 한 것이 아닌가 저는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진지한 목마름에서 그분을 향한 간절한 추구함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어디서 예배해야 할지를 묻는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v.21~23)고 말입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뜨거운 한낮의 뙤약볕을 맞으며 물 길러 나온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말을 건내기 시작하신 주님은 어느새 우리 크리스챤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한 그녀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심 산이냐, 예루살렘이냐?’ 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주께서 설명하듯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v.24)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더욱 분명히 이해하기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포함한 <요한복음 4장>에서 주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말씀하신 진정한 예배자의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과연 누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찾으시고 기뻐하시는 예배자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진정한 예배자인가?” (Who is a true worshiper?)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The person is who pursues God): 신학사전에서 ‘예배’ (worship)을 찾아보면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 (praise)과, 경배 (adoration), 감사 (thanksgiving), 그리고 간구 (petition)를 드리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추구한다’는 말은 상당히 포괄적인 표현방식임을 저는 잘 압니다. 이 말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는 ‘내가 영적으로 다시 살아났음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을 내 삶의 목표로 삶고 그 분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 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듯이 하나님을 믿지만 그리고 그분의 자녀라고 확신하지만, 그분을 향한 갈망이 별로 없는 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 믿고 천국가는 것이지, 그 밖의 것은 별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참된 예배자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간절히 추구하는 자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추구는 바로 ‘내면의 목마름’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무슨 목마름입니까? 그것은 ‘인생의 목마름이요, 절대자에 대한 목마름’ 입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사마리아 여인의 그 인생의 험하고 거친 여정은 그녀를 매우 목마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목마른 만큼 자신을 구원할 구원자를 찾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이 오시기 700여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서 주리고 목마른 인생들을 향해 이렇게 조건 없이 그들을 초청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 55:1) 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인생의 깊은 목마름을 느끼십니까? 아니면 세상이 주는 향락과 즐거움에 도취되어 어떤 목마름도, 어떤 하나님을 향한 갈구함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주께서 산상수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3~6)라고 말씀하신 의미가 그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목마르고 갈급한 심령을 통해 역설적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복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 목마름을 통하여 더욱 더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분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둘째, ‘영으로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The person is who worship in spirit):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누가 진정한 할례 받은 자인지를 이렇게 설파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빌. 3:3)라고.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라는 부분을 <표준새번역>에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we are worship by the Spirit of God)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누가 진정한 할례 받은 자인가?’ 하는 것인데, 그는 곧 하나님 아버지를 성령으로 예배하고 예수 그리스도 만으로 자랑하고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영적 할례’를 받은 자로써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은 자’는 뜻입니다.

그럼으로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성령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한다’는 뜻임을 알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성령으로 예배한다’는 의미는 무엇을 뜻 할까요? 솔직히 우리 스스로는 무엇이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예배인지 알지 못함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선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온전히 예배해야 할지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약속하신 영이시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한 예배자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기에 부족치 않도록 날마다 충만함으로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첫번째 편지에서 이런 놀라운 성령의 사역을 밝히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배하신 모든 것은 ~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9~10) 그러므로 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한다는 것은 바로 성령님의 도우심과 충만하심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The person is who worship in truth): 주님은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v.24)고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무엇이 ‘진리로 예배한다’는 뜻일까요? 여기서 “진리로” (in truth)를 “참되게” 혹은 “진정으로”라고 번역한 한글번역판도 있습니다. 이것은 <예배자의 자세/마음상태>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를 읽어보면, 유대민족들의 모세의 율법에 입각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있었지만, 진정한 중심의 제사가 빠진 형식적인 제사임을 하나님께서 준엄하게 꾸짖으심을 보게 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말. 1:8)라고 그들의 중심이 빠진 형식적인 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의 죄악을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예배 드리는 자의 본질적으로 <마음의 변화>를 근거로 시작됨을 알수 있습니다. 이 마음의 변화가 기초가 되어 행동의 변화와 온전한 인격의 변화로 확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성도들에게 도전한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1~2) 사도는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라고 도전하고 나서, 이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런 영적 예배를 드릴수 있을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대, 곧 이 세상의 가치관을 본받지 않는 것’과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하고 참되게, 즉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진리로 예배 드린다는 것은 근엄한 표정과 태도로 예배 드리는 행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모든 날, <하루 24시간> 그리고 <일주일 7일>을 세상을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날마다 변화를 받아 살아가는 것 까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마음의 중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예배하고 있습니까? 이 세대를 본받기를 거부하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중심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지금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그분의 자녀를 찾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참된 예배자를 찾으시는 이유는 이 예배가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과 동시에 예배 드리는 자에게 진정한 복을 주시고자 함인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가운데 임하는, 애통하고 목마른 영혼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를 간절히 추구함으로서 성령을 통해 주시는 충만한 복을 주시고자 함인 것입니다. 이런 참된 예배자가 누리는 은혜를 넘치게 누리는 성도 모두 되시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