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7, 2018

“돌아온 탕자” (Parable of the prodigal son)

Preacher:
Passage: 누가복음 (Luke) 15:20~22
Service Type:

“돌아온 탕자”

(Parable of the Prodigal Son)

10-7-18

본문말씀: 누가복음 15:20~22 (v.11~32)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서 론>

저는 오늘 성도 여러분이 잘알고 은혜받는 주님의 비유의 말씀을 통해 주께서 허락하신 믿음으로 나아가는 소중한 시간되길 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주님의 ‘돌아온 탕자에 대한 비유’의 말씀 입니다. 이 말씀은 주의 말씀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지고 믿지 않는 불신자들까지도 좋아하는 말씀의 하나 입니다. 저 자신도 그동안 이 탕자의 비유에 관한 말씀을 여러번 읽었고, 설교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번에 이 말씀을 다시한번 묵상하면서 내가 잘못 이해하거나 깨닫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를 돌아 보았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주께서 우리 성도들 모두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진정한 메세지는 무엇인지를 깨닫는 시간되길 기대 합니다. 그리고 깨닫을 뿐 아니라 삶으로 실천할수 있는 지혜롭고 성숙된 주의 자녀되기를 소원 합니다.

<본 론>

그동안 저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크리스챤들이 주님의 ‘탕자의 비유’ 말씀에서 많이 강조하고 관심 가진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한없는 용서하시는 사랑’ 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는 ‘탕자의 비유’의 핵심적인 주제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여러분과 제가 탕자의 비유를 통해 주께서 말씀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히 용서하시는 은혜’를 듣고나서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은혜에 우리는 가슴 뭉클하고 감사한 마음 갖지만 그것이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합니다.

제가 오늘 주님의 ‘탕자의 비유’를 통해 성도 여러분에게 묻고 도전 하고자 하는 것은 “왜 집 나갔던 탕자는 돌아왔는가?” 하는 것 입니다. 이점을 우리 크리스챤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때, 이 비유를 통해 감동은 받고 가슴은 뭉클해 지는데, 되돌아서면 여전히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되는 것 입니다. 이것을 옳바로 이해하고 영적으로 깨닫게 될때 오늘날 예수 믿고 크리스챤으로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가치관을 추구하고 영적 능력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많은 거듭난 자들이 명실상부한 <영적으로 돌아온 탕자의 삶>을, <영적으로 거듭난 자의 합당한 삶>을, 살게 될것으로 저는 기대 합니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왜 집 나갔던 탕자는 돌아왔는가?” (Why did the prodigal son come back home?) 하는 질문을 통해 주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탕자비유>의 소중한 교훈을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하기 때문’ (Because his father’s house has bread enough and to spare) 입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보게 되듯이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은 창녀와 함께 재산을 탕진할 뿐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그해에 큰 가뭄으로 인해 먹을 것이 없어서 돼지에게 먹이로 주는 ‘쥐엄 열매’ 라도 먹고 목숨을 부지 하고자 하지만 그것마져 주는자가 없었던 것 입니다. “돼지에게 줄것은 있어도 너에게 줄것은 없다” 는 것 입니다. 말 그대로 돼지보다 못한 인생이 된것 입니다. 그때 그는 굶주림으로 등에 들어붙은 배를 움켜잡고 이렇게 처절하게 외칩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v.17) 집 나갔던 탕자는 이런 먹을것이 없어 굶주려 죽어가는 심히 비참한 상황 속에서 그가 지금까지 한번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아버지께서 계시는 집이 풍족한 곳’이라는 사실 입니다. 아버지의 집이 풍족한 이유는 그 집의 주인이신 아버지께서 그 모든 풍족함을 주실수 있는 분이기 때문 일것 입니다.

굶주림에 죽어가는 이 절박한 상황 가운데 이 탕자가 깨닫게 된것은 그가 아버지 집을 떠나올때 까지, 아니 지금 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순간까지 그는 아버지의 집은 따분하고, 재미없고, 자기의 자유와 기쁨을 통제하는 곳이라고만 언제나 생각했다는 것 입니다. 한번도 아버지의 집이 양식이 넉넉할 뿐 아니라, 내게 있어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풍족하게 채워 주시는 은혜의 장소임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옳바른 권위 아래에서 가정교육과 지도 받는 것을 지겨워할 뿐 아니라, 아버지의 재산이 마땅히 자기의 것인 양 뻔뻔하게 달라고 요구했던 것 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크리스챤들의 문제점이 바로 이것이라 저는 생각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죽어서 가는 천당은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땅에서의 삶은 물질적 풍요와 권력을 줄것같은 세상의 가치관과 교훈에 마음이 빼앗깁니다. 주일 하루는 하나님의 뜻데로, 그러나 평일 6일은 세상의 뜻데로 사는 것 입니다. 왠줄 아십니까? 왜 이런 기형적인 신앙생활을 우리가 행하는줄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 말로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 모든 능력과 권세가 하나님께 있나이다” 고 찬양하지만, 마음은 그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 입니다. 집 나갔던 탕자가 어떻게 다시 아버지 집에 돌아오게 된것 일까요? 그것은 그가 세상을 향했던 허상이, 자신에게 부귀와 명예와 쾌락을 줄것 같았던 세상에 대한 헛된 환상이 깨어지게 되었을때, 자신의 아버지 집은 진정으로 부족함이 없는 풍족한 곳임을 깨닫았기 때문일 것 입니다. 다윗의 아름다운 고백과 같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 하시는도다” (시. 23:1,2) 고 고백하게 되는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함께 거하시는 곳이, 그와 믿음 가운데 살아가는 그곳이 바로 부족함이 없는 곳이요,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풍족한 곳임을 이해 합니까?

둘째, ‘아버지를 인격적으로 신뢰하기 때문’ (Because he respectfully trusted his father) 입니다: 사실 오늘 주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살펴볼때, 돌아온 탕자의 진정한 문제는 ‘흉년이 들어서 먹을것이 없다’ 든가, ‘굶어 죽게 되었다’ 는 것이 핵심이 아님을 이해할수 있는 것 입니다. 물론 극심한 가난이나 배고픔은 인간의 원초적인 고통이기에 이것이 그에게서 얼마나 힘들었을지에 대해선 두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저의 질문은 과연 이것이 그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고자 결심했던 동기였는가? 하는 것 입니다. 저는 그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만약 ‘가난과 굶주림’이 이 아들이 되돌아 온 결정적인 이유였다면 우리가 내릴수 있는 결론은 ‘이 아들은 이 다음에 다시 배부르고 살만하면 또 다시 집을 나갈것이다’ 는 것 입니다. 그는 우선 배고픔을 달래고자 육체의 요구를 채우고자 잠시 아버지 집에 피신온 것 입니다. 더 이상 다른 이유가 없는 것 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늘 본문에서 그가 고백한 것은 거짓말이 됩니다. “ ~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v. 21) 그러나, 이것은 그가 우선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이 아니라, 그의 진정한 고백임을 저는 믿습니다.

둘째 아들의 진정한 문제는 그에게 자유와 성공을 줄것으로 믿고 달려갔던 세상은 그 어느 곳에서도 그것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 입니다. 그가 다시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 오고자 결심한 진정한 동기는 ‘그의 아버지를 떠나서는 살수 없음을 깨닫았기 때문’일것 입니다. 단순히 배가 고파서나 살아 남고자 하는 이유가 아닌 것 입니다. 그가 아버지께 다시 되돌아 와서 했던 첫마디가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v.21a) 라는 것은 그가 아버지를 지금까지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믿지 못했다는 것 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아버지이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그리고 그의 권위 때문에 관계를 맺었지, 진정한 인격적인 신뢰를 통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그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다’고 고백하는 이유인 것 입니다. 단순히 그가 아버지 재산을 탕진 했고, 알거지가 되어서 돌아왔다는 이유가 전부가 아닌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화가 나서 벌을 내리고, 그리고 더 화나게 만들면 나를 생명책에서 지울것이 두렵고 무서운 분이 하나님 입니까? 그의 힘과 권위 때문에 어쩔수 없이 복종하는 관계 입니까? 아니면, 돌아온 탕자처럼 진실로 아버지의 선하심을 영으로 깨닫음을 통해 자발적으로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가고 있습니까?

셋째,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길 시작했기 때문’ (Because he opened his eyes to understand his father’s mind) 입니다: 어쩌면 집 나갔던 탕자가 집으로 돌아온 이 세번째 이유가 성도 여러분과 제가 결코 놓쳐서는 않되는 중요한 주님의 도전이라고 저는 이해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의미는 다르게 표현하면 ‘철든 자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는 말이 될것 입니다. 그전까지 그는 아버지가 하는 말과 행동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잔소리로 들리고, 아버지는 너무 융통성이 없고, 나를 구속하는 것 같고, 고지식해 보였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했다는 것은 이제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그 누구도 그 아버지의 크신 마음을, 그 깊고 넓으신 마음을 모두 측량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 입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의 마음에 눈이 열리었느냐 아니냐는 우리 성도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라고 저는 이해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께서 ‘돌아온 탕자’를 통해 우리에게 도전하시는 점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어디에 그것이 있습니까? 오늘 ‘탕자의 비유’에서 등장하는 또 한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그는 ‘아버지의 집에 있는 첫 아들’ 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의 풍성함 뿐 아니라 그분의 인격과 사랑에 눈을 뜸으로서 집에 돌아 왔을때, 아버지는 그를 입맞추고 기쁨에 겨워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이게 했습니다. 그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이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밭에서 일하고 돌아온 첫 아들은 집 가까이 왔을때 풍악과 춤추는 소리가 남을 듣고 그 소리가 집 나갔던 동생이 돌아왔음을 기뻐해서 아버지가 마련한 잔치임을 알았을때 그가 어떻게 했습니까?

이 첫째 아들은 엄청나게 화가 났습니다. “ ~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는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v. 29,30) 라고. 이 분노와 화는 누구를 향한 것 입니까? 첫째는 자기 멋대로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허랑방탕하게 쓰고 뻔뻔스럽게 집으로 돌아온 동생에 대한 거부감과 분노일 것 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런 자기 멋대로 살다가 돌아온 동생을 아무조건 없이 받아주는 아버지에 대한 못마땅함과 불만 입니다. “아버지가 이러니까 얘가 오늘날 이 꼬라지가 된것 아닙니까?” “지금은 송아지 잡아서 잔치할때가 아니라, 그가 두번다시 그런 행동하지 않토록 강한 징계를 내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라고 이 첫아들은 이런 행동 가운데 강하게 아버지에게 항변하고 있는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제는 오늘날 ‘집에 있는 첫아들’이 너무 많다는 것 입니다. 이 첫 아들은 누구를 의미할까요? 그는 일차적으로 그 당시 ‘율법을 잘 준수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 (v.2) 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 첫째 아들은 오늘날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미 먼저 믿은 크리스챤이 되기도 합니다. 첫째 아들의 진정한 문제는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 입니다. 이들은 자신도 과거에 집 나갔던 둘째아들 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입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판단과 사랑과 긍휼에 넘치는 은혜를 자신의 좁고 인간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비판하고 나무라고 화를 내는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세상의 흉악한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조건없는 은혜에 대해 요나처럼, 그리고 첫째 아들처럼 화를 내고 뾰로퉁해 있지는 않습니까?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적이 언제였습니까? 마지막으로 인격적 신뢰와 사랑으로 하나님께 나아간적이 언제였습니까? 만약 이 시간 한사람이라도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 불신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있다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품안에서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누리실수 있기를 소원 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미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충만하신 은혜로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더욱 맺어 나가고, 그분의 마음을 더욱 깨닫아 나가고 있습니까? 집에 있는 큰 아들과 같이 돌아온 탕자, 즉 동생을 거부하고 그를 품어주는 아버지를 못마땅해 하며 화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삶 속에서 진정으로 돌아온 탕자의 삶의 열매가 맺히길 소원 합니다.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판단하고 비판하는 바리새인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불가운데 타다 남은 나무 조각’ 처럼 건져낸 존재가 바로 나임을 겸손해 고백하며, 날마다 구원의 감격과 감사와 평화가 강같이 삶속에서 흘러 넘치는 성도 여러분의 삶 사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