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25, 2024

“따로 세우라” (Set Apart)

“따로 세우라”

(Set Apart)

3-24-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13:2~3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While they were worshiping the Lord and fasting, the Holy Spirit said, “Set apart for me Barnabas and Saul for the work to which I have called them.”)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So after they had fasted and prayed, they placed their hands on them and sent them off.)

 

[설교 요약]

            우리는 2주전에 <사도행전 11장>의 말씀을 통해 ‘안디옥 교회’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첫 이방인교회이자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어졌던 교회요, 오늘 말씀의 주제가 되는 ‘처음으로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였습니다.

성도들이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말씀하셨고, 그들은 순종함으로 두사람에게 안수하여 이방민족을 향한 첫 복음의 증인으로 그들을 파송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제 앞으로 이어질 이방민족을 향한 복음증거의 역사를 살펴보기에 앞서, 안디옥 성도가 보여준 주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순종하는 삶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첫째) <주를 섬기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섬긴다”는 말씀은 ‘예배 드린다’ (worship)는 뜻을 지닙니다 (NIV). 그리고 이 ‘예배’는 교회에 모여 드리는 공적 예배 뿐 아니라, 우리 각자가 살아가는 모든 삶 전체로 드리는 ‘산제사의 예배’ 곧 ‘영적 예배’ (롬. 12:1)를 뜻합니다.

둘째)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산 제사의 예배’를 가능하게 할까요?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v. 2~3) 오늘 말씀은 안디옥 공동체의 중심에 늘 ‘금식과 기도’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세번째), <성령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성령행전’의 역사입니다. 주께서 약속하셨듯이,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합당한 주의 증인의 삶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 1:8). 주를 섬겨 금식하고 기도함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기에 성도들은 이방민족을 향한 복음의 증인들을 파송할 수 있었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 날마다  날마다 기도와 금식으로 주께 나아감으로 성령의 충만하신 은혜를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시간 <사도행전 12장>의 ‘사도 베드로’가 주의 사자를 통해 탈옥케 되고, 구원함을 얻는 권능의 역사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었고, 더 이상 그의 행적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제 <사도행전 13장>에서부터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이방인 선교사역의 역사가 시작됨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12장>은 마지막절, <25절>에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행. 12:2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행. 11장> 후반부에 선지자 ‘아가보’가 천하에 큰 흉년이 들것을 예언했는데, 이 예언은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이루어져서 안디옥에 있던 제자들이 힘껏 부조 (후원금)을 모아 바나바와 사울 편에 보냈다는 기록 (행. 11:27~30)하고 있고, 이렇게 바나바와 사울이 후원금을 예루살렘교회에 전하고 나서, 오늘 길에 바나바의 조카인 마가를 데리고 다시 ‘안디옥 교회’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이어지는 안디옥교회 스토리가 오늘 본문을 포함한 <사도행전 13장>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복음사역에 쓰임받는 개인과 공동체가 될 수 있기 위한 성도의 자세는 과연 어떤 것인지를 더욱 분명이 깨닫고 적용할 수 있는 시간되기 원합니다.

이제 <사도행전 13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안디옥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하는 시므온과 구레네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사울이라” (v. 1)라고. 여기서 저자 누가가 언급한 안디옥 교회 다섯명의 리더들에 대해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바나바>는 그동안 우리가 구체적으로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의 열두 사도와 더불어 초대교회에서 가장 선한 영향력을 끼쳤던 주의 제자였습니다. 사도들이 지어 준 그 이름의 의미처럼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람’이요, ‘포용하고, 동역자를 세워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니게르’라는 <시므온>은 그 ‘니게르’라는 이름의 뜻이 ‘검다’라는 별명인 것처럼 많은 성경학자들이 그가 아프리카에서 온 노예의 후손일 것으로 추측합니다. 셋째, 구레네 사람인 <루기오>인데, 구레네지역은 현재의 리비아 지역으로서 그 당시 로마문화권에 영향을 받은 자였고, 넷째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입니다. 여기서 ‘헤롯왕’은 침례 요한을 목베어 죽게 한 ‘헤롯 안티파스’를 말하는데, 따라서 <마니엔>은 그의 젖동생으로서 왕족출신이요, 상류신분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째가 <사울>로서 바로 <사도행전 9장>의 ‘다메섹 언덕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의 인생이 극적으로 바뀐 사람이요,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사도 바울>인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번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사울>이라는 이름에서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됨을 언급한 말씀이 바로 <행. 13장 9절>인데, <9절>에 보면,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v. 9)라고 말함으로써 이후에 기록된 말씀에서는 <사울>을 <바울>로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안디옥 교회의 다섯 리더들의 면면을 살펴볼 때 이들의 매우 다른 성장배경과 문화와 신분상태의 다양성을 보게 됩니다. 그럼으로 첫 이방인 교회 안디옥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이런 다양한 배경의 리더를 세움으로 타문화권에 대한 더욱 폭넓은 이해를 가져오게 하고, 이것을 통해 이방민족을 향한 첫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그 토양을 쌓아 나가셨던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하신 세상만방을 향한 구원의 복음이 때가 되어 주께서 ‘이방의 사도’로 세우신 사도 바울과 동역자들에 의해 어떻게 구체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성도가 주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순종하는 길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주를 섬기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를 섬긴다”는 말씀의 영문성경은 <NIV버젼>에서는 “worshiping the Lord”, <KJV버젼>에서는 “ministered to the Lord”라고 각각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 여러분이 잘 아는데로 ‘worship’은 ‘예배하다/섬기다’라는 뜻으로, 그리고 ‘minister’은 ‘사역하다/ 목회하다’라는 뜻으로 쓰여지는데,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그 개인과 공동체가 그 신앙 (믿음)의 출발점을 ‘주를 섬김’에서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께 드리는 섬김, 곧 ‘주를 예배하고, 사역하는 그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단순히 문자 그대로 ‘주일에 함께 모여 주일예배 드릴 때’ 혹은 ‘교회에서 사역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행위를 할 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이런 ‘예배자의 삶’은 우리 각자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을 시작하면서 놀라운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의 은혜와 허락하신 자녀의 영적 특권을 누릴 수 있는 핵심이 무엇인지를 성도들에게 이렇게 선언하는 말씀 속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라고. 이 말씀의 의미는 ‘거룩한 산 제사’ 곧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영적 예배’는 단순히 주일날 가서 드리는 예배가 전부가 아니요, 주중에 성경공부나 전도하는 어떤 ‘신앙적 활동’이 전부가 아니라, 하루 24시간 & 일주일 7일을 성도 각자가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그것은 ‘삶의 순간 순간이 세상의 거짓되고 죄악된 것에 더럽혀지지 아니하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순결하고 영에 충만한 자녀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라고 사도는 우리에게 도전하고 격려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주를 섬기는 삶”의 핵심인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주를 섬겨 ‘영적 예배로 드려지는 삶’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둘째)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섬겨 그분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우리의 삶’의 자세가 영적 예배요, 이것이 우리 크리스챤 개인과 공동체의 믿음과 사역의 첫출발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가 사람으로 비유할 때 <몸통>이라면, 이런 ‘몸된 예배’가 실천되도록 하는 금식과 기도는 <힘/에너지/원동력>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아무리 머리로 (신학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영화롭게 하는 영적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할찌라도, 그런 영적 예배의 삶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예배의 삶을 실제로 누려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인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성도의 금식과 기도’임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v. 2~3) 라고 저자 누가는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금식과 기도’로 주님을 섬겼으며, 중요한 사역의 변곡점마다 금식과 기도를 통해 주님의 신실하신 인도함을 받았는지를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이해해야 하는 것은 ‘기도 (prayer)와 금식(fasting)’하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마치 우리 주께서 바리새인의 외식을 지적하시면서 ‘바리새인 식’의 겉치레와 보여주기 식의 기도와 금식을 강하게 경계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 하느니라 ~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5~6) 주님은 기도의 본질을 가르쳐 주시면서 ‘기도는 하나님과의 개별성과 은밀성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영적으로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이어서 또한 금식을 할 때도 동일한 경계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마. 6: 16~18)라고.

그럼으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기도와 금식>은 어떤 밖으로 드러나는 특정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 거짓없고 진실한 모습으로 나아가서 아버지께 나의 전부를 거짓없이 아뢰고, 아버지의 말씀에 귀 기울려 듣고 순종하는 존재의 상태임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금식’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하고, 또한 먹고 싶은 육신의 요구를 과감하게 거절하는 결단력과 간절함을 담아 ‘기도’와 마찬가지로 은밀함 가운데 하나님께 아뢰고 또한 그분의 뜻을 깨닫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와 금식으로 간절히 나아가는 그의 자녀를 하나님은 거절하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결코 그 자녀가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줄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세번째), <성령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행전 강해설교를 처음 시작하면서, 사도행전은 한마디로 ‘성령 행전’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만큼 사도행전은 그 첫출발점부터 마지막장에 이르기까지 성령에서 출발하여 성령으로 끝나는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시작하는 <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사십일 동안 보이시고 난 다음, 이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그들에게 당부하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주님은 이와 같이 우리가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주의 증인이 될 수 있게 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증인은 아무나 마음만 먹는다고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가로막고 대적하는 세상과 악한 영을 이길 수 있는 성령의 ‘권능/능력/힘’ (power)을 소유해야만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도행전이 그 절반가량 진행되고 있는 오늘 본문의 <13장>에서 볼 때도, 이와 같은 ‘성령충만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안디옥 교회를 함께 섬겼던 두 목회자인 ‘바나바와 사울’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교회를 섬겼고, 또 충만함으로 성령의 지시함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11장>에 보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11:24)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사울’ 또한 구브로에서 복음증거 하는 가운데 악한 영에 사로잡힌 마술사 ‘엘루마’가 사울과 바나바를 대적할 때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v. 9) 그를 책망하고 ‘얼마동안 맹인이 되어 어둠이 그를 덮을 것이라 선언’했음을 보게 됩니다 (v. 10~11).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며 다시한번 ‘성령충만’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이 포함된 <사도행전 13장>에서만 생각해 보더라도, 성령의 지시함을 받은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웠고, 금식하고 기도함으로 성령의 뜻하심과 인도하심을 깨닫음으로 두사람을 안수하고 첫 이방선교사로 파송했던 것입니다. 물론 파송 받은 당사자인 바나바와 사울 두사람도 누구보다도 성령님을 신뢰하고, 순종함으로 성령충만을 받아 이제 구체적으로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 구체적인 사역지로 순종함으로 나아감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이어지는 <4절>말씀입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타고 구브로에 가서” (v. 4)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사도행전 28장 끝까지 이어지는 모든 사도 바울과 동역자들의 복음증거의 역사는 오직 성령충만을 받음으로 그분의 지시함을 따라 철저하게 성령께 순종함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성경학자들은 입을 모아 ‘사도행전’은 바로 ‘성령행전’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주를 섬겨 금식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뜻에 순종함으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안수하고 이방의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여기서 저는 이런 중요한 질문을 해 봅니다. ‘우리 아포슬교회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함에서 시작하여, 기도와 금식을 통해 성령의 충만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믿습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은 그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깨우쳐 주시고, 그 뜻 가운데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끌어 주실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오늘과 같이 주일에 함께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성도들이 열린 마음과 사모하는 마음으로 먹을 수 있도록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힘과 정성을 다해 말씀을 준비해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 성도 각자가 자신의 삶의 자리에 돌아가서 큐티말씀과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말씀의 진리로 삶에 채워 나가고, 기도와 금식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영 성령으로 우리 각자와 교회 공동체를 충만하게 다스리고 이끄실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로서 여러분의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시고, 삶의 순간 순간 기도와 금식의 간절함으로 주께 나아가 그분의 영 성령의 충만하신 은혜와 인도하심을 누려 나가는 복된 우리 개인과 공동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