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24, 2021

“마음의 즐거움” (A cheerful heart)

Preacher:
Series:
Passage: 잠언 (Proverbs) 17:22
Service Type:

“마음의 즐거움”

(A cheerful heart)

1-24-21

본문말씀: 잠언 (Proverbs) 17:22

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A cheerful heart is good medicine, but a crushed spirit dries up the bones)

[설교 요약]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누리는 진정한 복은 구원받은 열매로 인한 마음의 평화와 즐거움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마음의 평화와 즐거움이란 주제를 생각하면서 떠오르는 성경의 두인물은 야곱과 요셉입니다. 야곱은 그 이름처럼 빼앗고 움켜잡고자 평화가 없었고, 형 에서의 보복이 두려워 20년간을 죽음의 공포에 떨었습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고, 그 곳에서도 억울하게 감옥생활을 하지만, 마음의 상처와 쓴 뿌리로 좌절하지 않고 도리어 형들을 용서하고 애굽의 총리가 되어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에 쓰임 받게 됩니다.

우리 크리스챤이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떤 성도는 여전히 불안과 염려로 살아가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 어떤 환경 가운데도 마음의 즐거움과 안식을 누리며 복되게 살아가는 성도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마음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요?” (How are we able to enjoy with a cheerful heart?) 그것은,

첫째,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으로써” (We may enjoy by seeking humbly the mercy of Lord): 예수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붓는 죄 많은 여인을 정죄하는 시몬이란 바리새인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네게 말하노니 ~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눅. 7:47) 주님은 시몬이 죄를 적게 지어서 자신을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많은 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하게 죄 사하심의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마음의 평강을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주를 전적으로 신뢰함으로써” (We may enjoy by trusting the Lord with all our hearts): 사도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 하심이니라” (벧전. 5:7)고 성도들을 권고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불 같은 시련 (벧전.1:17)이 없다라고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길 때 그분의 평강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억함으로써” (We may enjoy by reminding the acts of Lord): (desiring God/the battle to remind) 예레미야는 조국이 멸망한 암담한 상황을 슬픔으로 노래하다가, 갑자기 감사와 소망의 고백을 합니다. “중심에 회상한 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 이니이다” (애. 3:21~223)라고. 왜냐면, 회상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과 행하실 약속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넷째, “성령님의 통치하심에 순종함으로써” (We may enjoy by obeying the rule of Holy Spirit):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요. 20:21~2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통해 자신의 평화와 기쁨을 주실 것임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성령께 순종하는 가운데 겸손히 자신의 죄를 아뢰고,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분께서 행하심과 약속들을 기억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그로 말미암아, 날마다 성령 안에서 흘러 넘치는 즐거움의 생수를 받아 누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누리는 진정한 복은 구원받은 열매로 인한 마음의 평화와 즐거움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세상에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자들을 향해 외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여기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단순히 육체적으로 편하게 된 것뿐 만 아니라, 마음의 평화와 영적 안식까지도 주실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잠언서 기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조언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의 삶을 각자 돌아보는 시간되기 원합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은 복되고 감사한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주께서 약속하신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주님 안에서 평화와 안식을 누리고 있는지 우리는 돌아봐야 합니다. 바라기는 모든 무겁고 얽매인 짐을 주님의 발 앞에 내려놓고 주께서 약속하신 진정한 안식과 마음의 즐거움을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메세지의 주제가 되는 ‘마음의 평화와 즐거움’을 생각하다 보면, 성경의 두인물이 떠오릅니다. 한 명은 ‘야곱’이고 다른 한 명은 그의 아들인 ‘요셉’ 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데로 야곱은 형을 속이고 그의 장자권을 빼앗습니다. 그로 인해 형 에서는 격분해서 야곱을 죽이고자 하고, 이것을 눈치챈 엄마 리브가는 야곱을 에서의 마음이 누그러 들때까지 외삼촌 라반 집에 잠시 피해 있게 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도망자의 삶은 20년이란 긴 세월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는 이 20년이란 긴 세월동안 형으로부터 죽음의 공포에 끊임없이 시달립니다. 이 힘겹고 불안한 심적 고통의 삶은 형 에서를 만나기 전날 밤, 얍복 강가에서 ‘한 천사와 씨름했다’는 성경에서 가장 신비스런 사건의 하나를 경험하고 나서 끝이 납니다. 야곱은 바로 얍복 강가에서 밤을 새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바로 그는 하나님의 임재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서 그 길었던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야곱의 일생을 장악했던 ‘움켜 잡는 자’ ‘빼앗는 자’로서의 야망과 야욕의 마음을 간직했을 때 그의 삶은 언제나 빼앗기는 투쟁과 다툼의 인생이었고, 평화가 없고 안식이 없는 피곤한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12아들 중 한 명이었던 요셉의 삶은 그와 매우 대조적입니다. 요셉은 어린 나이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애굽 상인에게 팔려가서 애굽 시위대장 집에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성실하게 주인의 집안을 관리했고, 주인의 신뢰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인의 아내가 요셉이 준수함을 보고 유혹합니다. 그가 그것을 거절하자 앙심을 품고서 도리어 그가 자신을 겁탈하고자 했다고 모함합니다. 이로 인해, 요셉은 또 한번의 억울한 옥살이를 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그의 인생만큼 억울하고 요즘말로 ‘세상이 왜 이래?!’라고 불만을 토로할 인생도 또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감옥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한번 성실하게 소망가운데 살아 갑니다. 결국 감옥에 함께 있던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을 통해서 바로의 꿈을 해석함으로 요셉은 감옥에서 풀려 날 뿐 아니라, 온 애굽을 다스리고 온 세계를 강타한 심각한 가뭄의 위기에서 구해내는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제가 요셉의 삶에서 여러분과 생가하기 원하는 것은 그의 이런 ‘역전’의 삶은 어떻게 가능 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디로 가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과 더불어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에 대한 ‘믿음의 방식’입니다. 여기서 ‘믿음의 방식’이란 그가 어떻게 뼈에도 사무칠 만큼 자신을 팔아 넘긴 형들의 잘못된 행동을 용서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나중에 형들과 만났을 때 자신이 그들을 복수하지 않을까 두려워함을 보고 이렇게 안심시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음으로 근심하지 마시고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 그런 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십니다” (창. 45:5,8)라고 말입니다. 이런 고백은 결코 쉽게 나올 수 있는 고백이 아닙니다.

인간이 굳게 마음먹었다고 해서, 누군가를 용서하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쌓인 상처와 쓴 뿌리가 결코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하도록 순순히 놔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상황들, 억울하고 답답하고 말로 다할 수 없는 괴로운 심정을 털어 놓고 그분의 선하신 뜻과 능력을 신뢰하고 그분께 자신의 상처와 짐을 내려 놓았던 것입니다. 이런 그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태도가 마음의 상처와 쓴 뿌리로부터 그를 자유하게 했고, 이 모든 환경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 했음을 믿습니다. 이것을 이해했기에, 진정으로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이 아버지 야곱과는 대조적으로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었던 요점일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볼 때, 비록 구체적인 삶의 모습은 다르다고 할찌라도 우리 각자도 야곱과 같은 세상 것을 움켜잡고 빼앗고자 하는 야망이 있고, 요셉과 같이 억울하게 불이익을 당하고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와 쓴 뿌리가 자리잡고 있음을 우리는 인정하게 됩니다. 모두 허물 많고 연약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상처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마음의 즐거움과 근심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되었는지를 대조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즐거운 마음은 좋은 명약과 같이 병들고 피폐한 심령을 소생시키지만, 근심하고 염려하는 마음은 삶을 파괴시키고 뼈가 마르는 참혹한 고통 가운데로 그 사람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도 여러분과 함께 각자의 삶을 돌아보기 원하는 것은 ‘내가 얼마나 실수하지 않고 죄 짓지 않고 살아왔는가?’도 중요하겠지만, ‘내가 지금까지 받은 은혜에 얼마나 만족하고, 기쁨으로 살아 가고 있는가?!’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약속하신 모든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시고 주님 안에서 안식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 각자는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즐거움과 평화의 삶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어떻게 우리는 마음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요?” (How are we able to enjoy with a cheerful heart?) 그것은,

첫째,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으로써” (We may enjoy by seeking humbly the mercy of Lord): 저는 지난주 큐티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시몬이란 바리새인에게 하신 말씀을 곰곰히 묵상해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집에 계셨을 때 몸을 파는 여인으로 암시되는 한 여인이 들어와서 주님께 눈물을 흘리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고,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트려 주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러한 여인의 행동을 못마땅 해 하고 뭔가 불경스럽다고 생각한 시몬에게 주님은 “<500데나리온 빚진 자와 50 데나리온 빚진 자>가 돈이 없음으로 빌려준 자가 둘 다 그 빚을 탕감 받았다면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라는 비유의 말씀으로 질문했고’ 그는 “많이 탕감 받은 자입니다” (눅. 7:43)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그의 대답을 듣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 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눅. 7:47) 그렇다면 주께서 ‘많은 죄를 사함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은 죄를 사함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신 의미가 무엇일까요? 주님께 죄 사함 받은 여인은 죄를 많이 지었음으로 주님을 많이 사랑하고, 집 주인인 시몬은 상대적으로 죄를 적게 지었음으로 주님을 적게 사랑하는 것이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역설적으로 시몬이 자신이 얼마나 주님께 그의 많은 죄를 용서함 받아야 하는 죄인인 줄 깨닫지 못했음을 도전하시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네가 나를 적게 사랑하는 이유는 네가 죄를 적게 지어서가 아니라, 네가 그 누구보다 더 많은 죄 용서함을 받아야하는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주님의 뜻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평화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나의 의로운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겸손히 나의 허물을 주께 아뢰고 그분의 용서하여 주심을 구하는 통회하는 심령 가운데 임함을 믿습니다.

둘째, “주를 전적으로 신뢰함으로써” (We may enjoy by trusting the Lord with all our hearts):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그들을 격려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 하심이니라” (벧전. 5:6~7) 사도 베드로는 우리 크리스챤의 삶이 결코 고통도 없고, 고난도 없는 삶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우리 성도가 받게 될 고난은 불과 같은 시련 (벧전. 1:7)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7)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성도들을 향해 “그러므로 ~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권고하는 이유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의 <믿음의 싸움>은 ‘나는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 그로 말미암아 ‘주님을 기뻐할 수 있는가?’의 영적 싸움이라고 믿습니다. 솔직히 현재 우리가 겪는 아픔과 고통의 중심에는 주님께서 이런 상황 한가운데 계심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주님은 이런 나를 홀로 내버려 두고 멀리 계신다고 느끼기 때문은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의 모든 신실한 신앙의 선조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우리를 도전하고 격려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라’ ‘너의 길을 주께 맡기라’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억함으로써” (We may enjoy by reminding the acts of Lord): (desiring God/the battle to remind)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엄청난 핍박과 고난을 겪은 대표적인 선지자의 한명으로 일컬어지는 <예레미야>는 바벨론 제국에 의해 남유대가 멸망되고 나서, 동족 유대민족의 죄악을 자신의 죄처럼 가슴으로 안고 슬픔과 통회함으로 ‘예레미야 애가’를 지었습니다. 그는 죄악된 유다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타락한 예루살렘에 임하신 주의 엄중한 심판을 슬픔과 회개의 마음으로 슬픔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3장>에 가서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애. 3:19~20)라고 낙심가운데 슬픔의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그의 심령은 그 다음순간 놀라운 역전을 보입니다. “중심에 회상한 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 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애. 3:21~23)라고. 어디에서부터 그의 심령 가운데 이런 역전이 시작된 것일까요? 그것은 <21절>에 그 열쇠가 있습니다. “중심에 회상한 즉” 바로 예레미야가 그의 마음 중심에 다시 회상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요? 그가 여호와의 행하심을 기억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 그분의 행하심 뿐 아니라, 장차 행하실 선하신 회복의 약속까지 기억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게 되었을 때, 주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을 넘치도록 이해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이런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아침마다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성실하심이 심히 크심을 감격 가운데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 “성령님의 통치하심에 순종함으로써” (We may enjoy by obeying the rule of Holy Spirit): 우리 주님은 잡히시던 날 밤, 제자들의 먼지 묻은 발을 씻어 주시고나서, 이후로는 서로의 발을 씻어 주라 명하셨습니다. 서로의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얼룩진 발을 씻어주고, 서로 사랑함으로 종노릇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먼저 행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기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 15:9) 먼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왜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명하신 것인지, 그리고 ‘왜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시는 것인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11)라고. 주님은 우리 안에 자신의 기쁨을 넘치게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의 영, 성령을 통해 이루시는 역사인 것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의 하나가 사도 요한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보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요. 20:21~22)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말씀은 주의 12제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님을 믿습니다. 주님을 믿는 모든 그의 제자들, 바로 여러분과 저에게 하신 명령이자 축복의 말씀임을 믿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하시고자 함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주께서 무거운 짐진 우리의 심령을 주님의 멍에로 가볍게 하시고, 마음의 평화와 안식으로 쉬게 하실 수 있는지를 잘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통해서 참된 마음의 평화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현재 성도 여러분이 겪는 마음의 무거운 짐과 고통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현재 겪고 있는 삶의 무게와 어려움의 정도에 관계없이 제가 한가지 확신하는 것은 우리 주님은 그 어떤 여러분의 짐도 가볍게 하실 수 있으며, 자유케 하실 수 있는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라기는 성령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더욱 겸손히 주님께 나아가 자신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시고,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시고, 그분께서 행하신 일과 행하실 약속들을 기억하셔서 주님의 기쁨 안에 거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날마다 성령 안에서 주께서 약속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기쁨의 생수를 마시고, 그 배에서 흘러 넘치는 즐거움의 생수의 강을 누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