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17, 2021

“징계받는 자” (The persons who are being chastened)

Preacher:
Series:
Passage: 고린도전서 (1 Corinthians) 11:30~32
Service Type:

“징계받는 자”

(The persons who are being chastened)

1-17-21

분문말씀: 고린도전서 (1 Corinthians) 11:30~32

30 이르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For this cause many are weak and sickly among you, and many sleep.)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 하려니와 (For if we would judge ourselves, we should not be judged.)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But when we are judged, we are chastened of the Lord, that we should not be condemned with the world.)

[설교 요약]

            오늘 메세지는 지난 주 “성소에 들어 갈 담력을” 이라는 제목의 말씀과 대조되는 말씀입니다. 즉 지난주가 성도가 누릴 권세와 특권의 삶을 다뤘다면, 이번주는 성도가 받게 되는 징계에 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의 성찬식을 범하는 삶의 모습들을 통하여 그것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 가운데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한” (v.30) 원인인데, 바로 주님께 징계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밝히는 것입니다 (v.32).

우리가 성찬식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하는 중요한 사실은 ‘성도들이 성찬식에서 죄를 범하는 중심에는 단순히 성찬식을 경건하게 드리지 않는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각자가 성찬식에 참석하기 전에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살지 않았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범했다는 죄를 생각하면서, “<성도의 죄>가 본질적으로 무엇인지? 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지 않는 것’ 입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벧전. 4:13)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한다는 것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죄악된 삶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거부함으로 죄의 강력한 힘 아래 놓이게 된 때문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능력>을 받지 않는 것’ 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요. 6:51) 이 말씀은 실제로 자기 살과 피를 먹으라는 뜻이 아니라, 그의 말씀 가운데 장차 성령을 통해 부어주실 충만한 능력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만약 성도가 성령을 불신하고 그분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한 성도의 죄인 것입니다.

셋째, ‘<성도의 연합>을 행치 않는 것’ 입니다: 만약 성경 모두에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가장 중대한 명령을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사랑하라’는 명령임을 깨닫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 22:34~46). 서로 사랑하지 않는 죄는 실로 심각한 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계속해서 이와 같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저지르는 성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 대답은 주께 징계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v.32). 그러나 성도의 약함과 질병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세상과 함께 그 자녀를 멸망치 않게 하시고자 하는 주의 은혜의 징계임을 우리는 이해하고 있습니까? 바라기는 성령의 능력로 육신에 속한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자랑스런 자녀로 날마다 성장하는 성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지금까지 신앙생활해 오면서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성경의 가르침 중 하나가 ‘구원받은 자의 삶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원받은 자가 죄를 범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죄악된 삶에 대해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하느냐를 제가 이해하기 힘들었던 대표적인 문제점으로 인식하는 이유는 크리스챤의 심각한 영적 문제가 이런 성경의 가르침 (=교리)를 알지 못하거나 오해한데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음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성도의 죄’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을 받지 못할 때, 성도 개인의 영성에서 뿐 아니라, 신앙공동체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력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은 ‘약한 자와 병든 자 그리고 잠자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겸손히 우리 각자를 살펴보며 영적 게으름과 어리석음 가운데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히는 죄악된 삶을 모두 성령의 능력으로 벗어버리고, 성숙된 하나님의 자녀로 날마다 자라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고린도전서>의 전체 ‘주제’는 <교회의 문제들>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문제점들은 교회 안의 분쟁과 음행의 문제와 그것을 어떻게 포용하거나 권징 (=치리) 할 것인지와, 성도의 법적 소송과 우상제물에 바쳐진 음식의 문제, 성찬식, 성령의 은사와 부활 등에 관한 잘못된 이해에 대해 사도는 언급하고 바른 영적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말씀은 교회에서 행해지는 ‘성찬식’에 관련된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은 주께서 명하신 성찬식을 행함에 있어서의 문제점인데, 성찬식을 범함으로 그 결과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밝히고 있는 것과 같이 <성도들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와 잠자는 자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러한 원인을 한마디로 <주께 징계받은 것> (the chastisement by the Lord)이라고 지적합니다. 물론 성도가 겪는 모든 <연약 함>과 <질병> 그리고 <잠자는 것>으로 표현된 ‘죽음’이 죄의 결과는 아닌 것입니다. 왜냐면,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는 성도에게도 육체의 연약과 질병과 죽음은 예외 없이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본문말씀을 결코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은 거듭난 성도가 저지르는 죄의 문제는 앞서도 설명 했드시 자신의 영적 상태뿐 아니라, 신앙공동체에 있어서도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은 일차적으로 주께서 제정하시고, 행할 것을 명하신 <성찬식>의 정신을 훼손하고 변질시킨 자들이 받게 되는 주님의 징계이지만, 이런 징계는 성찬식을 범한 것과 같은 어느 특정한 죄의 경우 뿐 아니라 모든 여타의 크리스챤의 죄의 결과에서도 해당하는 징계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성만찬을 주께서 명하신 의미’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나서, 성도와 죄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찬식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주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주의 12제자들과 행하신 성만찬은 바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유월절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월절은 무슨 날 입니까?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애굽 왕 바로를 치셔서 그의 장자를 비롯하여 그에 속한 모든 애굽 백성과 종들의 장자, 그리고 그들 짐승의 첫 숫컷 새끼까지 죽게 하시는 재앙을 내리심으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 내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념하는 절기인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집 문설주에는 어린 양의 피를 바름으로써 하나님의 죽음의 사자가 ‘넘어 감’으로 (pass-over) 이스라엘의 장자는 한사람도 죽음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유월절의 근거요 이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이 유월절 만찬을 행하시면서 우리가 잘 의식하고 있던 하지 못하던 관계없이 성경 전체에 있어서 심대한 <변화의 의식>을 제자들과 맺으신 것입니다. 아니 그 분을 믿는 모든 성도들과 맺으시는 것입니다. 이 의식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그를 믿는 모든 자를 그의 피로서 살리실 것을 <새언약>으로 약속하시고, 의식으로 확증하시는 것입니다.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의 장자를 구원하였다면, ‘성찬식’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의 피는 단번에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의 죄를 대속하심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세기에서 “여자의 씨가 뱀의 머리를 쳐 부술것” (창. 3:15)을 선언하신 이후,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오실 것이라 약속하신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취되는 사건인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유월절을 기념하시며 무교병 떡을 떼서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눅. 22:19)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포도주를 잔에 부어 주시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눅. 22:20)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밤에 유월절을 통하여 상징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진정한 구속의 역사, 하나님의 어린 양 그의 독생자의 피를 통해 이루실 구원의 역사를 선언하시고, 새언약의 체결식으로 맺으신 것입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v. 26)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성찬식’을 통해 새언약의 백성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그의 피로 구원하시는 뜻을 이해한다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의 여러가지 죄악된 삶에 있어서 유독 ‘성찬식을 범했음으로 인해 주의 징계를 받게 되었다’ (v.32) 고 주장하는 이유를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찬식을 범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와서 성찬예식을 잘못 드린다는 것보다도, 성찬식을 통해 성도들과 주님의 피로 맺으신 새언약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믿음으로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아왔는가 가 ‘성찬식을 범했느냐?’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성찬식에 참예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하라고 권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v.28~29)고. 성찬식을 행하기 전에 각자 자신을 먼저 돌아보기를 권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가 “주의 몸을 분별치 못하고 먹고 (마신다)”라는 뜻은 단지 성찬식에 와서 행하는 성도들의 태도 이전에, 성도 각자가 성찬식에 임하기까지 주님의 대속의 살과 피의 은혜를 어기고 죄악가운데 살았다는 뜻이요, 그럼으로 주님의 몸을 더럽혔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범했다는 죄를 생각하면서, “<성도의 죄>가 본질적으로 무엇인지? 에 대해 한걸음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지 않는 것’ 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무엇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상태인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고, 그와 함께 장사되고, 그리고 그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고, 즉 부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 6:4~5) 여기서 사도가 우리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면, 또한 그와 함께 부활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선언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는 점은 크리스챤 신분에 대한 하나의 영적인 상징성이 아닙니다. 비유도 아닙니다. 거듭난 모든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고, 함께 장사되고, 또한 3일만에 그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영적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것을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머리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다시 부활하신 사건은 그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일하게 누리게 되는 영적 진리요, 승리라고 사도 바울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우리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베드로가 말하기를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3)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그분의 고난에 참예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럼으로 우리 성도가 죄악된 삶을 살아가는 첫 출발은 내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고,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 죄에 대해서 죽은 (=죄에서 자유하게 된) 존재임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제 주님의 십자가에 함께 참여해야 하는 존재임을 거부했기에 죄의 강력한 힘 아래 다시 끌려 다니게 되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능력>을 받지 않는 것’ 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느 날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 (요. 6:51) 그때 그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52)라고. 그 말을 들으시고 주께서 이렇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 6:55,57)라고.

혹시 우리 가운데는 주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명하심을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실수 있을까?’라고 반문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물론 우리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은 교회에서 행해지는 ‘성만찬’은 신학적으로 ‘떡’과 ‘포도주’가 정말 주님의 몸과 피가 되는 것이 아니라 비유임을 믿습니다. 로마 카톨릭교회에서는 ‘화체설’이라고 하여 이 떡과 포도주를 먹는 순간 그것이 정말 주의 몸과 피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그렇게 주장할 근거가 없습니다. 성만찬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새로운 은혜와 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통해 생명과 능력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찬식에 한정되지 않고 우리 성도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서 우리 속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능력으로 살아가지 못할 때 육신의 정욕과 세상의 유혹에 넘어갈 수 밖에 없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할 때, 우리는 죄에 끌려 갈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성도의 연합>을 행치 않는 것’ 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언급하기에 앞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우리 성도상호간의 관계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은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고전. 10:16~17) 사도는 우리가 함께 성찬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아니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피로 세우신 새언약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면, ‘우리는 주 안에서 한 몸의 지체가 아니냐!?’ 라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몸의 각 부분임’ (고전. 12:27)을 명심하고, 서로 사랑으로서 연합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믿음으로 참여하지 않고, 그분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받지 않고, 성도 안에서 연합하여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지 못할 때, 우리의 삶은 필연적으로 죄 가운데 끌려 다니는 매우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본문 앞 절 <27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고 말한 의미라고 믿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이렇게 질문하고 싶은 분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계속해서 이와 같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저지르는 성도는 어떻게 되나요?’ 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오늘 본문에서 말하듯 “주께 징계를 받게 (되는 것)” (v.32) 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주님의 징계의 결과입니까? 그것은 ‘약함과 질병과 죽음’이라고 사도는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크리스찬에게 경험되는 모든 질병이나 죽음이 죄로 인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그것이 하나님의 징계로 인한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다루시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 것을 생각하면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히. 12:6,8)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사생아와 같이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 반드시 징계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징계하십니까? 그들이 망하지 않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망한다는 것은 멸망한다는 뜻이요, 영원한 죽음, 곧 지옥불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성도가 주의 징계로 인해 약해지거나 병들거나 심지어 죽게 되는 경우에 이른다면 그것은 매우 안타깝고 우리가 늘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 까지도 주님의 선하신 은혜의 결과임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징계로 인한 죽음까지도 우리가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곧 ‘멸망의 심판’을 받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극단적인 자녀를 향한 사랑의 징계 (=조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이 구원에 감사 하십시요! 그러나 구원받는다는 올바른 성경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때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몸을 범하고 성령을 근심시키는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히 있음을 오늘 말씀은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철들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하는 것이 하나님의 징계인 것입니다. 더 이상 성령을 근심케 함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자초하는 부끄러운 삶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와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을 날마다 깨닫아 나감으로 철든 그분의 자녀로 성장해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허락하신 자녀의 모든 특권과 하늘의 유업을 넘치게 누리는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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