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28, 2019

“복음이란” (What is the gospel?)

Preacher:
Series:
Passage: 로마서 (Romans) 1:16,17
Service Type:

“복음이란?”

(What is the gospel?)

4-28-19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1:16~17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I am not ashamed of the gospel, because it is the power of God for the salvation of everyone who believes: first for the Jew, then for the Gentile.)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For in the a righteousness from God is revealed,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 just as it is written: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설교 요약]

우리 모든 교회멤버들에게 있어서 현재 가장 시급하게 들어야 할것은 ‘복음’입니다. ‘복음’이라는 말의 원어인 헬라어 ‘유앙겔리온’이 뜻하는 바와 같이 이 복음이 여러분에게 ‘기쁘소식’ (good news)이 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무엇이 문제 입니까?저는 이제 이런 질문에 대해 생각해 봄으로서 좀더 가까이 복음에 접근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왜 복음은 우리에게 기쁜소식이 못되는가요?” (Why is the Gospel not being as ‘the Good News’ for us?)라는 질문에 대해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 (Because we take our salvation for granted, if we believed Jesus) 입니다: 우리 크리스챤들 중에는 사도바울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v.17) 고 선언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살리는 것은 믿음이야! 우리는 믿음을 통해 의롭다하심을 받고, 믿음을 통해 살게 되는거야!’라고 잘못 이해한다는 것 입니다. 이런 잘못된 믿음에 대한 이해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음에 대한 기쁨과 자랑이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곧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생명이지 우리의 믿음이 아닌 것 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복음에 대한 이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까?

둘째, ‘신앙성숙이 자동으로 된다’고 여기기 때문 (Because we regard our faith to grow automatically) 입니다:  오늘날 신앙성숙이 자동으로 된다고 생각하는 크리스챤들이 의외로 많은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고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도전 합니다. 예수 믿으면 자동으로 그 믿음이 우리를 성화하게 한다는 것 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몸을 산제사로 드림으로 가능한 것 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음’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삶을 통해 나타냄’ (롬. 12:2)으로서 우리는 구체적인 영적 성숙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는 것 입니다.

            셋째, ‘복음을 다 안다’고 여기기 때문 (Because we consider the Gospel as being known already) 입니다: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5)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는 하나님을 지금까지 귀로만 듣는 수준의 믿음이었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하나님을 영의 눈을 열어 보게 된것 입니다. 내가 다안다고 여겼던 그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얼마나 얇고 낮은 수준의 지식인지를 이순간 욥은 통렬하게 깨닫은 것 입니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회개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 42:6) 라고.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 처음 믿을때보다 더욱 기뻐하고 감격하지 못하는 이유는 복음에 대해 너무도 무지하기 때문은 아닙니까? 우리는 복음을 다안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복음의 은혜와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소원 합니다. 이 복음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를 아는 지식에서 날마다 자라남으로 자녀에게 약속하신 충만한 열매를 맺어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소원 합니다.

 

[설교 전문]

            오늘 말씀을 통해 현재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허락하신 복음’을 더욱 분명히 깨닫는 시간되길 기대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할뿐 아니라 복음의 충만한 은혜와 능력으로 열매 맺으며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원 합니다.

우리 모든 교회멤버들에게 있어서 현재 가장 시급하게 들어야 할것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것은 ‘복음’입니다. ‘복음’을 영어로는 ‘The Gospel’ 혹은 ‘Good News’ 입니다. 제가 여기까지 말씀드리면, 여러분 중에는 ‘나는 이미 예수님을 믿어 영접했는데요?’ ‘나는 크리스챤이 된지가 이미 오래됐는데요?’라고 반문할 분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영적 상태에 관계없이 여기 참석한 모든 분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우리가 가장 시급하게 들어야 될것이라고 말하는 것 입니다. 물론 저 자신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자신이 가장 먼저 이 복음을 다시듣고, 다시 배우고 깨닫아야하는 자임을 깊이 공감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바울은 복음중에 복음이라는 ‘로마서’를 누구에게 썼는지 하는것을 생각해 보면 잘 알수 있습니다. 즉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가 바로 로마서인것 입니다. 따라서, 이 로마서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그분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말할것도 없겠지만, 1차적인 이 편지의 수신자는 이미 주님을 영접한 로마교회 성도라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롬. 1:15) 고요. 이런 사도바울의 선언을 통해 우리가 이해할수 있는 것은 복음은 믿지 않는 불신자들 뿐 아니라, 믿는 신자들에게도 계속해서 들어야할 가장 우선적인 메세지라는 것 입니다. 예수믿고 영접했으니, 구원 받았으니, ‘나는 복음을 다안다. 더 들을 필요가 없다!’가 아니라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그만큼 깊고 넓고 광대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남으로 믿는자를 구원시키시는 그분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살펴볼때, 이 복음은 계속해서 우리 가운데 선포되어져야 하고, 깨닫아 나가야 하는 진리임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무엇이 복음인지?’하는 것을 탁월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 ‘복음’‘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 (롬. 1:2) 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아들’은 누구입니까?
  • ‘그의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시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이 인정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롬. 1:3,4) 라는 것 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복음의 능력인지?’에 대해선,
  • ‘복음의 능력’‘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롬. 1:16)이 됩니다. 그리고, ‘이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이유?’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 (롬. 1:17a) 입니다. 그 유명한 선언과 같이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b) 는 것 입니다. 복음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통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을 얻는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 입니다.

자, 저는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밝힌 ‘무엇이 복음인가?’에 대해 간추려 설명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제 충분히 무엇이 복음인지에 대해 이해가 되십니까? 정말이지, ‘복음’이라는 말의 원어인 헬라어 ‘유앙겔리온’이 뜻하는 바와 같이 이 복음이 여러분에게 ‘기쁘소식’ (good news)이 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무엇이 문제 입니까? 복음이 사실 대단한 것도 아니고, 별로 신통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서 문제일까요? 아니면, 우리는 기쁨의 놀라운 소식을 선포하는 복음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 문제일까요? 그리고 복음이 문제가 아니라,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문제라면, 저는 이제 이런 질문에 대해 생각해 봄으로서 좀더 가까이 복음에 접근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왜 복음은 우리에게 기쁜소식이 못되는가요?” (Why is the Gospel not being as ‘the Good News’ for us?)라는 질문에 대해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 (Because we take our salvation for granted, if we believed Jesus) 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은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구원 받았음을 확신하는 순간, 기쁨이나 감사는 어디론가 사라진다는 것 입니다. 이제 더이상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구원의 감격은 없다는 것 입니다. 이제 내가 구원받은 것은 ‘당연하다’는 것 입니다. 여러분은 왜 이런 내면의 상태가 되는지를 아십니까? 저는 그 중심에 우리의 ‘믿음’ (faith)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v.17) 고 선언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살리는 것은 믿음이야! 우리는 믿음을 통해 의롭다하심을 받고, 믿음을 통해 살게 되는거야!’라고 이해한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에 대한 이해는 적절한 이해라고 볼수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가능한 것 입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여기서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않되는 사실은 이런 우리의 믿음은 ‘이 믿음 자체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 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의 믿음은 하나의 도구라는 것 입니다. 이것을 잘 설명하는 비유중 하나는 ‘주사기 바늘과 약’ 입니다. 우리가 큰 병에 걸려서 병원에 갔을때, 의사는 우리에게 주사를 놓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 우리가 낫게 되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해합니까? 여러분은 의사가 우리몸에 주사한 약이 효력을 발생해서 병이 낫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주사기바늘 때문에 나았다고 생각 합니까? 주사기 바늘이 우리를 낫게 한것이 아니라 주사기 바늘을 통해 우리몸에 들어간 약의 효력이 병을 치료한것 입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내가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으니, 내 믿음이 나를 구원했다’고 여깁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믿음이다’는 것 입니다. 이런 잘못된 믿음에 대한 이해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음에 대한 기쁨과 자랑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귀하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사용하시지만 그 믿음은 도구 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곧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생명이지 우리의 믿음이 아닌 것 입니다. 이것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 (v.16a)라고 선언한 이유 입니다. 단순히 부끄러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복음을 대단히 자랑하고 기뻐하고 감격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면, 이 구원은 결코 당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크신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기 때문 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복음에 대한 이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까?

둘째, ‘신앙성숙이 자동으로 된다’고 여기기 때문 (Because we regard our faith to grow automatically) 입니다: 21세기의 뛰어난 신학사상과 성경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통해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크리스챤 사상가의 대표적 인물로 인정받는 제임스 패커목사는 청년시기에 매우 방황하는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 가운데서 방황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청년시절부터 신실한 기독교단체에 몸 담으며 믿음의 성장을 기대했던 것 입니다. 그런데 패커는 당시 유행하는 신학사상이었던 ‘자동성화’ (automatic sanctification) 라는 잘못된 가르침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 <자동성화사상>은 ‘내가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 있다면, 그 믿음 자체가 나를 성화시켜 준다’는 가르침 입니다. 믿음 자체가 나의 성화를 보장해 준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패커는 자신속에 무언가가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거짓없이 믿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내면적 빈곤과 영적 목마름으로 인해 거의 미칠지경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의 이런 영적 방황속에서 헤메다가 마치 사막에서 오와시스를 만난것 처럼 발견한 책이 청교도의 대표적인 신학자 ‘존오웬’이 쓴 ‘죄 죽이기’ (Mortification)이라는 책 입니다. 청년 제임스 패커는 이 책을 통해 비록 우리 크리스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할찌라도, 우리가 더 깊은 크리스챤의 영적 성장을 하는것은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죄와 싸워 이겨나가는 구체적인 삶 가운데 이런 영적성장은 가능한 것 입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사도바울이 <로마서 12장>을 “그러므로” (therefore)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는 이유인 것 입니다. 그는 무엇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을 통해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신 <기쁘고 은혜로운 복음>인지를 그 앞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나서, ‘그러므로’라고 하는 것 입니다. 이것은 ‘그렇기때문에 여러분과 저는 이제 이렇게 합시다!’라는 것 입니다. 무엇을 할까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만약 우리가 예수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자!’는 것 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자’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삶을 통해 나타내자’ (롬. 12:2)는 것 입니다. 영적 성장은 단순히 자동으로 되지 않는 것 입니다. 인격적인 결단을 통해 이런 구체적인 영적 훈련의 시간들이 쌓여갈때, 여러분은 이 복음이 얼마나 기쁜소식인지를 성령의 충만하신 가운데 날마다 고백하게 될것 입니다.

            셋째, ‘복음을 다 안다’고 여기기 때문 (Because we consider the Gospel as being known already) 입니다: 구약의 욥기를 보면 욥기의 마지막장, 42장에서 욥은 이렇게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5)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욥이 많은 고난가운데 처했을때 그는 심한 신앙적인 방황을 합니다.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라면, 도데체 왜 내게 이런일이 생기느냐?’는 것 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벌을 받을만큼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 입니다. 억울하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뭔가 자신에 대해 잘못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드디어 욥기가 끝나갈때 쯤, 하나님은 폭풍가운데 나타나셔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자연 만물가운데, 생명의 주관자로 역사하시는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욥.38~41장). 그때 욥은 깨닫게 된것 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잘안다고 생각했는데,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엄청난 자신의 착각임을 깨닫게 된것 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안것은 단순히 귀로 듣는 수준이었습니다. 방금 하나님께서 폭풍가운데 말씀하신것과 같은 권능과 위엄의 하나님의 실존을 지금까지 한번도 이해하거나 경험해보지 못한 것 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지금까지 귀로만 듣었지 눈으로 뵙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하나님을 영의 눈을 열어 보게 된것 입니다. 내가 다안다고 여겼던 그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얼마나 얇고 낮은 수준의 지식인지를 이순간 욥은 통렬하게 깨닫은 것 입니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회개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 42:6) 라고. 우리는 때로 욥처럼 하나님께 대해 섭섭해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까? ‘내가 열심히 양심껏 살고 있는데 왜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하고 말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 처음 믿을때보다 더욱 기뻐하고 감격하지 못하는 이유는 복음에 대해 너무도 무지하기 때문은 아닙니까? 우리는 복음을 다안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복음의 은혜와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소원 합니다.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분이 있다면, 그를 영접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믿는 자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선물을 받으시길 소망 합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영접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을 살린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이 지금도, 아니 날이가면 갈수록 여러분의 자랑이자 기쁜소식 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처음 예수 믿을때 뿐 아니라 주님 만나는 그 순간까지 우리 구원받은자의 삶에 있어서 더욱 풍성하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v.16) 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능력인 이 복음을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깨닫아 나감으로서 구원의 감격과 은혜를 날마다 누리시기를 소원 합니다. 이 복음안에 드러나 이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지식에서 날마다 자라남으로 자녀에게 약속하신 충만한 열매를 맺어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소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