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8, 2022

“부모와 자녀” (Parents and Children)

Preacher:
Passage: 에베소서 (Ephesians) 6:1-4
Service Type:

“부모와 자녀” (I)

(Parents and Children)

5-8-22

본문말씀: 에베소서 (Ephesians) 6:1-4

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Children, obey your parents in the Lord, for this is right.)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Honor your father and mother” – which is the first commandment with a promise--)

3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that it may go well with you and that you may enjoy long life on the earth.”)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Fathers, do not exasperate your children; instead, bring them up in the training and instruction of the Lord.)

[설교 요약]

            오늘 저는 먼저 사도가 크리스챤 자녀들에게 그 부모들에 대해 행해야 할 바를 가르치는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는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v.1)라고 권고합니다. 그렇다면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순종하라는 뜻이요, 곧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 순종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종교적 이유로 부모에게 불효해도 좋다’는 면제부를 준다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막. 7:11-13).

둘째 ‘주님의 성령충만 안에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에베소 6장>을 시작하는 본문은 <엡. 5:18>의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사도의 가르침에 직접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부모에 대한 진정한 순종은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부모에 대한 공경은 하나님의 가장 큰 계명이라 불리는 <십계명>중에서 다섯번 째 해당하는 계명, “내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 20:12)을 인용합니다. 그리고 “~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v.2-3) 고 말합니다.

바로 부모 공경은 명령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계명 중에서 축복으로 약속하신 첫번째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해가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성가 ‘헨리 라우웬’은 <상처 입은 치유자/ The Wounded Healer>라는 그의 책에서 현대인의 3가지 특징으로써 1) 내향성 (inwardness), 2) 강박증 (convulsiveness), 그리고 3) 아버지 상실 (fatherlessness)라고 지적했습니다. 오늘날 현대 청년들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는 아버지 권위의 상실이요, 곧 진정한 ‘부모 권위의 상실’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능력으로 만이 오늘날 청년들을 모든 거짓된 철학과 정욕과 물질로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공중권세 잡은 자, 사단 마귀와 싸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부모님을 공경함으로 약속하신 복을 누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저희는 크리스챤 부부의 관계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지난 시간 살펴본데 이어서, 이번 주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사도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묵상하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서두에 잠깐 언급했듯이, 가족은 한 인간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 사람 가장 가까이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기관인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에 있어서 부부관계 뿐 아니라, 피로 맺어진 부모자식의 관계에 있어서도, 단순히 그들이 가장 가까운 혈연관계라고 해서 실제적을 더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경험합니다. 우리 크리스챤을 뿐 아니라, 세상 대부분의 가족들도 이 가족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더 깊은 관계성으로 맺어가길 노력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잘 되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그를 믿는 크리스챤 부모와 자녀들에게 원하시고, 그들을 이끌어 가시고자 하는 복된 영적 원리는 무엇일까요? 무엇이 주 안에서 더욱 존중과 사랑 가운데 맺어져 가는 크리스챤 가정의 모습일까요?

오늘 말씀에서 보면, 먼저 사도는 크리스챤 자녀들에게 권고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v.1)라고. 사도는 자녀들에게 먼저 권고합니다. “너희 부모를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부모를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 뿐 아니라, 특별히 우리 한민족을 포함한 동양권 문화에서는 유교의 영향으로 이런 효도라는 것이 인간의 행해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오랫동안 여겨져 왔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자식의 도리라는 가치관은 인류역사가 시작되어온 이후로 이어져 내려 온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주를 믿는 크리스챤들에게 그들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분명히 이해하고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이해할 것은 사도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v.1a)고 말했는데, 여기서 “주 안에서” (In the Lord)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말은 ‘주 안에서 순종해야지, 주 밖에서 순종해서는 않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도가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그 당시 불신자였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에베소 교인들이 아직까지 주님을 믿지 않는 그들의 부모에게 대해서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지를 영적으로 지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순종하되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라는 뜻이며, ‘신앙 양심이 어긋나지 않는 한도 안에서’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가지 면을 동시에 경계하심을 기억해야합니다. 첫째는 오늘 사도의 말처럼 ‘주 안에서’ ‘신앙 양심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마. 10:37)라고 주님은 때로 매우 직설적으로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한다’는 근본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동시에 신앙을 가장한 불효에 대해 강하게 경고하십니다. “너희는 이르되 ~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막. 7:11-13)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아니면 정신적인 것이든 종교를 가장한 불효를 주님은 강력하게 경고하십니다. 주님의 결론은 무엇일까요? 진심으로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조건과 예외사항을 내세워 불순종하려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진정으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 주님의 가르치심 아닐까요? 비록 우리의 부모가 아직까지 믿음이 없는 불신자라 할찌라도 말입니다.

사실 자기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한다는 것은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종교유무를 막론하고 인간의 보편적인 도리임을 우리 모두는 인정하지만, 사도는 특히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임을 사도는 오늘 말씀에서 영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v.2)라고. 사도는 지금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명하신 <십계명>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제 1계명>에서부터 <제 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향한 계명이라면, 사도가 지금 언급하듯이 <제 5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 (출. 20:12a)는 계명은 그 이후 <제 10계명>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계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 첫째되는 명령하심이 바로 ‘부모에 대한 공경함 (=순종)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그리 놀랍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부모에 대한 공경’을 명하실 뿐 아니라, 이 계명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첫번째 복이라고 사도는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서 20장>에 보면 “내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 20:12)고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첫번째로 축복의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v.2)라고 출애굽기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명령으로 주실 뿐 아니라, 축복의 조건으로 약속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만큼 부모에 대한 공경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저는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명하시는 ‘부모에 대한 공경’의 그 기초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공경 곧 경외함’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도 요한이 성도들에게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요일. 4:20)라고 도전하듯이, 보이는 부모에게 조차 사랑이나 순종치 않는 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기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어머니에게서 피덩이로 태어나서 선악을 분별하기도 전에,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영적으로 눈을 뜨기도 전에 부모의 보호와 사랑 가운데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가정에서 자라가는 자녀들이 먼저 그 부모에 대한 올바른 신앙적 권위와 공경함을 어려서 부터 배워나가지 못한다면, 그가 자라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공경과 순종으로 이어지기는 결코 쉽지 않음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고 그 권위에 온전하게 순종할 수 있게 되는 1차적 책임은 바로 그 부모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자녀들에게 있어서 특별히 부모들로부터 받은 부정적인 영향이 그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를 인격적으로 존중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결혼관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게 되는 경우입니다.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았다던가, 심한 꾸지람이나 모멸감을 받은 경우와 같이 절제되지 않고 비인격적으로 대우받으며 자란 자녀들의 경우는 많은 경우 그들이 이미 성인이 되어서도 그가 받았던 상처와 아픔이 그 부모와의 화해와 용서함의 치유를 경험하기 전까지는 해결되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입니다. 비록 신실한 크리스챤이 되었음에도 이런 과거에 부모로부터 받았던 이런 상처로 인하여 진실로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적지 않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기쁜 소식은 사도는 크리스챤 자녀들에게 그들의 부모가 믿는 부모이든, 믿지 않는 부모이든, 혹은 자신에게 고통과 상처를 입힌 부모이건 아니건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 (6:1)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충만’ 함으로써 임을 사도는 영적으로 밝혀주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제가 다시한번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오늘 본문말씀을 포함해서 계속해서 연결되어지는 ‘주제 절’이 <엡. 5:18>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그렇습니다.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빛된 자녀가 되었다면 성령의 충만을 받음으로, 아내는 남편을 경외하고 남편은 자신을 내어 주신 주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며 부모는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서로 간의 아름다운 관계의 열매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음”으로서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이 개인적 차원에서의 ‘부모를 공경’하는 것 뿐만 아니라 사회적 현상의 차원에서 이 ‘공경’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20세기의 뛰어난 영성가이자 신부였던 ‘헨리 라우웬’ (Henri J Nouwen)의 책, “상처입은 치유자” (The Wounded Healer)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라우웬은 먼저 ‘피터’라는 26살 청년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의 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 <단절된 세상에서의 사역>이라는 소제목에서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피터라는 청년을 그는 묘사하면서, “그의 몸은 연약해 보입니다. 긴 금발에 감싸인 얼굴은 창백한 도시처럼 야위었습니다. 그의 눈빛은 부드러우면서도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한 우울함을 내뿜습니다. ~~ 말할 때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 달라는 어조가 역력합니다” 그는 피터와 이야기를 나누고나서 또한 이렇게 그를 설명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많은 경계들이 점점 모호해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피터의 삶은 통제력을 상실한 채 표류하는 것처럼 보였고, 많은 환경적 요인들에 의해 삶이 결정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 때때로 그는 혼란스러웠습니다.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몰랐습니다. 그는 작은 악마들이 자신의 머리 속에 침입해서 고통스럽고 참기 어려운 혼란을 일으키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자주 듭니다. ~~ 자신과 환경 사이, 환상과 현실 사이, 해야 할 것과 거부해야 할 것 사이에 명확한 구분 없이 피터는 현재의 포로가 되어 현재에 붙잡혀서 과거나 미래와 적절한 연관성을 갖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 그는 자신이 사는 이유와 자신이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그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피터에 대한 설명의 중심되는 이유는 한명의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환자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피터의 상황은 여러가지 면에서, 전형적인 현대인의 상황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작가 나우웬은 말합니다. 그는 피터에게서 찾아 볼수 있는 현대인의 상황을 소위 ‘핵 인간’ (nuclear man)이라고 부르는 상태의 고통스런 상황’이라고 표현합니다. 나우웬은 계속해서 ‘핵 인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설명해 나가는데, “핵인간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핵전쟁 같은 새로운 위험이 미래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미래라는 것이 결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역사 심리학자 ‘로버트 리포톤’의 말을 인용하면서 핵 인간의 두드러진 특징은 “역사적 단절, 단편화된 이데올로기, 새로운 불멸에 대한 추구 등”이라는 것입니다. 피터는 지난 수년간 매우 엄격하고 순종적인 카톨릭 신학생이었지만, 어느 시점부터 그의 삶은 바뀌기 시작했고, 그는 주일 미사에도 참례하지 않고, 다른 학생들과 술을 마시고 놀며 밤을 새우고, 여자 친구와 동거했고, 하나님이나 신앙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우웬은 피터라는 한 청년을 통해 현대인의 전형적인 상태를 투영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대인에게서 나타나는 3가지 특성을 그는 ‘내향성’ (inwardness) ‘강박증’ (convulsiveness) 그리고 ‘아버지 상실’ (fatherlessness)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거시적으로 볼 때, 근대 서구사회에서 인류문명의 발전, 특별히 철학과 과학문명의 발전으로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며 돌진하던 인류가 제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인류가 나아가는 방향을 어느 순간에선 가 상실하고 그것에 대해 본질적인 회의를 하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아버지의 상실’로 상징화되는 ‘권위의 상실’입니다. 서구사회의 경우, 그 대표적인 권위의 상실은 ‘기독교 권위의 상실’이자 ‘성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1,2차 세계대전을 지나며 특별히 서구사회의 젊은이들은 기존의 시대정신을 거부하면서 ‘반전운동, 반핵운동, 자연주의의 회기’와 같은 슬로건을 내걸고 소위 ‘히피문화’와 같은 기존질서에 반항하는 현상들이 열병처럼 번져갔던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우리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권위주의의 상실과 함께 동성연애와 포스트 모더니즘처럼 절대적 진리의 거부등과 같은 이런 권위의 상실과 가치관의 혼란을 현시대의 청년들이 매우 강하게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여겨집니다.

개인적인 가정에서나, 혹은 집단적인 사회전체적으로 보더라도 ‘참된 부모의 권위’는 이제 더 이상 그의 자녀를 단순히 낳았다는 데서 찾을 수 없고, 부모로서 어떻게 그 자녀를 양육하고 그들에게 올바른 영향력을 미쳤느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현재의 자녀이며 미래의 부모라면 이점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청년 여러분도 언제나 자녀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또 한명의 부모로 변화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말씀의 결론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 여러분의 부모님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해 나갈 때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의 부모님을 더욱 존중하고 순종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부모님께 대한 존중으로 변화된 만큼, 미래에 여러분의 자녀들 또한 여러분의 모습 속에서 참된 크리스챤 부모의 권위와 믿음을 배움으로써 여러분을 공경하는 자녀가 될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 땅에 가정을 창설하시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허락하셨습니다. 이 부모님의 헌신과 사랑으로서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어버이날을 맞아 부모님의 사랑과 헌신에 감사하고 그분들을 진정으로 공경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명하심을 더욱 순종해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모든 아름다운 복을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