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4, 2019

“분노 조절” (Anger Control)

Preacher:
Passage: 에베소서 (Ephesians) 4:26~27
Service Type:

“분노 조절”

(Anger Control)

8-4-19

본문말씀: 에베소서 (Ephesians) 4:26~27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말고” (In your anger do not sin”: “Do not let the sun go down while you are still angry,)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and do not give the devil a foothold.”)

 

[설교 요약]

오늘날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는데 실패함으로서 가족과 대인관계를 파괴하고 엄청난 고통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봅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 크리스챤들 가운데서도 이 ‘분노의 문제’로 인해 신앙에 크고 작은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분노란 매우 극심하고 강한 불유쾌함, 적대감, 혹은 격분하는 감정인데, 이것은 ~ 위협을 당하거나, 모욕감, 좌절감이나 부당한 대우를 당함으로 인해 생기는 감정이다’ 라고 찰스 스탠리 목사는 분노를 정의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중요한 <감정조절의 영적 원리> (the spiritual principles for anger control)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첫째> ‘우리 크리스챤도 감정조절에 실패한다는 사실을 인식’ (We should recognize that Christians also may fail to anger control)하는 것 입니다: 꽤 오래전 제가 한국에서 살때 “내 탓이로소이다”라는 크리스챤들 사이에서 하나의 영적 운동처럼 고백된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내탓입니다. 이 감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솔직하고 용기있게 ‘내 탓’임을 인정할수 있어야만 합니다.

<둘째> ‘분노가 죄로 연결되는 것을 차단’ (We should cut the processing from an anger to sin)하는 것 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이해할점은 분노의 감정이 발생했을때 이것을 솔직히 나의 허물이라고 인정하고 더 나아가 그것이 의로운 분노라 할찌라도, 이 감정이 더 이상 죄로 연결되지 않토록 차단해야 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의로운 분노’라 할찌라도 그것은 자칫 ‘미움’과 ‘원수맺음’ 혹은 ‘복수심’과 같은 인간본성의 비뚫어진 감정으로 왜곡될수 있는 것 입니다.

<셋째> ‘마귀는 우리의 모든 감정을 교활하게 이용하는 존재임을 인식’ (We should be aware that the devil uses our all emotions trickily for his purpose) 하는 것 입니다: 마귀는 처음으로 하나님을 거역한 존재요, 거짓의 아비 입니다. ‘마귀에게 틈을 준다’는 말은 ‘기회를 준다’는 뜻 입니다. 사도바울의 핵심적인 메세지는 <마귀에게 틈을 주어서 죄 짓는 자리로 끌려가지 말라’는 것 입니다. 그리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음으로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않을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라기는 선하신 성령님의 은혜가 성도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 잡으시고 통치하셔서 분노의 감정에서 벗어나 바람직한 인간관계와 각자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름다운 열매 맺을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오늘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함으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특별히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는데 실패함으로서 가족과 대인관계를 파괴하고 엄청난 고통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 크리스챤들 가운데서도 이 ‘분노의 문제’로 인해 신앙에 크고 작은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많은 경우, 이런 감정을 처음부터 드러내진 않는다 할찌라도 조금만 외부의 자극에 쉽게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형태로 인간관계와 자신의 신앙생활을 파괴한다는 것 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는 바람직한 감정조절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나는 분노라는 감정에 사로잡혀 나자신과 이웃의 삶을 황패화시키고 있지는 않는지?각자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런 말씀을 통한 성찰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분노를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참된 평화와 만족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저는 지난해 “화가 나셨나요?”라는 제목으로 ‘분노’를 주제로한 설교를 한적이 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16:32)는 잠언의 말씀과 같이, 메세지를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감정에 휘말리기 쉬운 존재이며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존재인지를 성찰하면서 성령의 다스리심 아래 결단함으로서 어떻게 이 감정의 문제를 영적으로 해결해 나갈수 있을것인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찰스스탠리 목사는 그의 ‘분노를 다스려 나가기’라는 시리즈설교에서 이렇게 분노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분노란 매우 극심하고 강한 불유쾌함, 적대감, 혹은 격분하는 감정인데, 이것은 자기 자신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떤사람이 상상 혹은 실제로 위협을 당하거나, 모욕감, 좌절감이나 부당한 대우를 당함으로 인해 생기는 감정이다’ (찰스 스탠리/ Charles Stanley) 라고. 저는 오늘 말씀을 살펴봄으로 우리가 크리스챤으로 살아가면서도 때로 피할수 없는 이 분노의 감정을 어떻게 다스려나가고, 감정에 사로잡혀 죄짓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다스려나가며 마귀에게 틈을 주지않는 지혜로운 삶을 사도바울의 지혜로운 충고를 따라 살것인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중요한 <감정조절의 영적 원리> (the spiritual principles for anger control)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우리 크리스챤도 감정조절에 실패한다는 사실을 인식’ (We should recognize that Christians also may fail to anger control)하는 것 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v.26a) 라는 말자체가 이미 감정조절에 실패함으로 분노한 상태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는 말인 것 입니다. 우리 크리스챤 자신이 얼마나 허물많고 부족한 자들인가를 스스로 겸손하게 되돌아보지 못할때, 우리들은 얼마나 자주 감정이 격동하는 상황 가운데 내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 입니다. 그리고나서, 이 모든 문제는 상대방 탓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 입니다. 그 문제의 원인에서 나 자신은 쏙 빠져 버리는 것 입니다. 이것은 결코 나의 감정조절, 더 나아가 영적 성숙으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바람직한 자세가 아닌 것 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모두는 때로 감정조절에 실패하기도 하는 것 입니다. 분을 내는 것 입니다. 이 현실을 직시하고 회피하거나 남의 탓으로 돌리려 해서는 않될것 입니다.

꽤 오래전 제가 한국에서 살때 “내 탓이로소이다”라는 크리스챤들 사이에서 하나의 영적 운동처럼 고백된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내탓입니다. 남의 탓이 아니라 내 탓인것 입니다. 우리 크리스챤들 가운데서 이렇게 ‘내탓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할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궁금 합니다. 이 감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솔직하고 용기있게 ‘내 탓’임을 인정할수 있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에베소성도를 권면합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엡. 4:29) 내가 화난 감정에 휩싸인 원인을 상대에서 찾지말고 오직 덕을 세우고 은혜를 끼치도록 힘쓰라는 것 입니다.

<둘째> ‘분노가 죄로 연결되는 것을 차단’ (We should cut the processing from an anger to sin)하는 것 입니다: 사도바울이 오늘 말씀에서 우리 성도들에게 주는 중요한 영적 교훈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 (In your anger, do not sin) 는 것 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수 있는 사실은 ‘분노’ 자체가 항상 악한 것이 아니다는 것 입니다. 사도바울은 ‘분노와 죄’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했지 “분을 내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여기엔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첫째, 앞에서 언급 했드시 우리 크리스챤들도 모두 연약한 자들임을 사도바울이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 입니다. 마치 ‘실수해선 않된다’ ‘완벽하라’고 말하는 자체가 비현실적인 주장인것 처럼 말 입니다. 이 말이 ‘화내도 상관없다’는 말이 아니며, 육신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화/분노’는 반드시 다스려 나가야 하는 것이지만 오늘 말씀에서는 그 자체를 정죄하지는 않는다는 사실 입니다.

(2)둘째, ‘분노에는 의로운 분노도 있는 것’ 입니다. 지난번 제가 잠깐 언급했드시,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돈벌이에 눈이 어두운 종교지도자들의 탐욕을 보시고 의로운 분노를 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강도의 소굴을 만들려는 인간의 죄악을 결코 못본척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이 느끼는 ‘분노’의 감정에는 때로 이와같이 의로움에서 비롯된 분노함도 있는 것 입니다. 따라서 악한 현실을 보고, 이웃이 탄압받는 부당한 현실을 보고 의로운 분을 품지 않고, 반대로 ‘내일 아니다’고 무관심 하는 것은 그 자체가 결코 크리스챤으로서 합당하지 않는 모습이자, 죄악된 삶임을 성경은 주장하는 것 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분명히 이해할점은 나의 바람직하지 못한 분노의 감정이 발생했을때 이것을 솔직히 나의 연약함과 허물이라고 인정해야만 하고 더 나아가 그것이 의로운 분노라 할찌라도, 이 감정이 더 이상 죄로 연결되지 않토록 차단해야 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의로운 분노’라 할찌라도 그것은 자칫 ‘미움’과 ‘원수맺음’ 혹은 ‘복수심’과 같은 인간본성의 비뚫어진 감정으로 왜곡될수 있는 것 입니다. 따라서 이 감정이 어떻게 형성되고 원인이 무엇인지를 나 지신이 먼저 분별할뿐 아니라, 그 감정이 죄를 짓는 도구로 연결되지 않도록 신속히 차단해야 하는 것 입니다.

<셋째> ‘마귀는 우리의 모든 감정을 교활하게 이용하는 존재임을 인식’ (We should be aware that the devil uses our all emotions trickily for his purpose) 하는 것 입니다: 완전하게 창조된 첫 인간부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의심하고 반역케 한 존재가 바로 사단 마귀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하나님을 거역한 존재요, 거짓의 아비 입니다. 그가 얼마나 교활하고 강력하게 우리 인간을 속이고 죄 짓게 하는지에 대해서 제가 일일이 다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멀리갈것도 없이 우리 각자를 돌아본다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살고자 원하면서도 큰죄 작은 죄 가릴것 없이 어느샌가 그 죄의 한복판에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 입니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것 입니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요? 왜냐하면 마귀에게 틈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틈을 준다’는 말은 ‘기회를 준다’는 뜻 입니다. 마치 적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는데, 성벽사이에 아주 작은 틈이 발견되면 적군은 그 틈을 헤집고 들어가 방어선을 무너트리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챤의 경우에 이렇게 마귀에게 틈을 주어 죄 지었다고 해서 이것이 <롬.7장>에서 사도바울이 묘사한 ‘죄에 굴복당하고, 죄의 법 아래 사로잡힌 존재’가 크리스챤이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과 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통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롬. 8:2)된 존재이기 때문 입니다. 때로 우리 크리스챤들이 죄를 저지르는 연약과 실수를 저지른다 할찌라도 그로말미암아 ‘스스로 죄없다 아니하고 우리의 죄를 자백하는 것’ (요일.1:9) 입니다. 계속해서 죄에 끌려 다니고 죄에 지배 당하는 존재가 우리 크리스챤이 아닌 것 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할때, 하나님은 진실하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해 주실것’ (요일.1:9)을 믿기 때문 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의 핵심적인 메세지는 <마귀에게 틈을 주어서 죄 짓는 자리로 끌려가지 말라’는 것 입니다. 만약 마귀에게 틈을 주어 죄 짓게 될때 나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허락하신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갈수 없게 되는 것 입니다. 바로 두발로 일어서서 어두운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하는 빛의 자녀의 영광스런 삶을 살수 없는 것 입니다. 죄 짓게 될때마다 마귀는 이렇게 우리를 정죄 합니다. “네가 그렇게 성질부리고 죄지으면서 무슨 남을 돕고 하나님을 전한다는 거냐?! 부끄럽지도 않냐? 너나 잘해!" 라고. 마치 날개 부러진 새처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로서의 능력과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 입니다. 자라지 않는 영적 어린아이가 되어 땅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 입니다. 허락하신 은혜와 비젼의 드높은 창공을 날아 오르지 못하는 것 입니다. 죄로 인해 두날개가 꽁꽁 묶여 버렸기 때문 입니다.

이제 저의 마지막 질문 이것 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을수 있을까요?”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마귀의 꾀임에 빠지지 않고 그에게 틈을 주지 않을수 있을까요?사도바울은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v.26b)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말라”는 뜻은 우리가 충분히 예상할수 있드시 분을 하루가 지나도록 품지 말라는 것 입니다. 언짢고 불편한 감정으로 잠자리에 드는 것이 얼마나 정신위생상 좋지 않은지는 세상 사람들도 잘 압니다. 화가 난 상태에서 잠자리에 들게될때 정신과 육체 모두에 있어서 얼마나 나쁜 영향을 주는지는 과학자들이나 의사들이 임상실험을 통해 증거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크리스챤들에게는 이렇게 분을 품고 잠자리에 든다는 것이 분을 품은 대상과의 관계성에 있어서 뿐 아니라, 자신의 영적 상태에 있어서도 치명적으로 해롭다는 것이 오늘 사도바울이 주는 강력한 경고임을 우리는 깨닫아야 합니다.

여기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말라’는 뜻이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과 어떤 다툼으로 인해 분을 품게 되었을때, 상대와 해가 지기 전에 화해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언제나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이 다툼으로 인해 여전히 닫혀 있을수 있기 때문 입니다. 그 화해의 방법에는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는 것 보다 좀더 시간을 두고 조금씩 다가가는 것이 바람직 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에서 이해해야 할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너는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나님은 사도바울을 통해 분명히 명하고 있다는 사실 입니다. ‘상대방이 마음 풀렸으면 나도 풀것이고, 상대가 아직 풀리지 않았으면 나도 않 풀거야!’라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않된다. 너는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런 옳지 못한 분한 감정에 사로잡혀 하루를 넘길때 (시간을 지체할때), 사단에게 틈을 주게 되기 때문 입니다. 이런 어지럽고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정신상태를 악한 영이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마귀는 너무도 쉽게 우리의 마음을 죄 가운데로 이끌며 장악할수 있기 때문 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분을 품음으로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사도바울이 우리 크리스챤에게 경고한 이유일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떤 이유에서건 분한 감정에 휩싸였을때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고자 힘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해가 지도록 감정에 자신을 맡기며 마귀에게 틈을 주고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중에 ‘나는 해가 지도록 분은 품지만, 마귀에게 틈을 주지는 않아요?’라고 속으로 말하는 분은 없습니까? 그러나 그런 말자체가 모순됨을 우리는 이해해야만 합니다. 내 머리에 불쑥 떠오른 생각들이 성령의 통체를 받지 않고 ‘마치 새가 내머리 위에서 계속 집을 짓드시’ 육신적인 감정에 휩싸이도록 나를 내버려 둘때, 그 생각과 삶의 결과는 악하고 죄 짓는 삶으로 연결될수 밖에 없다는 것이 오늘 사도바울의 경고의 말씀을 통한 경고임을 우리는 이해해야만 하는 것 입니다.

우리 육신의 생각과 감정은 결코 선하지 않기 때문 입니다. 내가 어떤 기질과 교육과 성장배경을 가졌든지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선하신 통제하심과 은혜의 다스림 받기를 거부할때 우리 모두는 육신에 속한 죄악된 열매를 거둘수 밖에 없기 때문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분노의 감정에서 자유롭습니까? 그 분노의 감정을 성령의 통제하심과 인도하심을 통해 다스려 나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분노의 감정이 여러분을 지배하고 다스려나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원하든 원치않든 때로 이런 분노의 감정에 노출되어 갈아 갑니다. 그러나 이 감정이 죄 짓게 하는 도구로 전락되지 않도록 분명히 그 끈을 끊어야만 합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음으로 마귀에게 틈을 주어서는 않될것 입니다. 이것은 곧 성령의 다스림에 순종함을 뜻 합니다. 나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곧 인격적으로 성령님의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 분명히 육신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 입니다. 바라기는 선하신 성령님의 은혜가 성도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으시고 통치하셔서 분노의 감정에서 벗어나 바람직한 인간관계와 각자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름다운 열매 맺을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Top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