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11, 2022

“서로 용서하라” (Forgive One Another)

Preacher: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18:21-22
Service Type:

“서로 용서하라”

(Forgive One Another)

9-11-22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18:21-22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리이까 (The Peter came to Jesus and asked, “Lord, how many times shall I forgive my brother when he sins against me? Up to seven times?”)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Jesus answered, “I tell you, not seven times, but seventy-seven times.)

[설교 요약]

            베드로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v.21)는 질문에 주님은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v.22)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이런 도전적인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서를 명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 용서할 때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4)고 말씀하시고 나서,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마. 5:45)라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 아버지의 선한 형상을 닮은 자녀의 삶의 특성인 것입니다.
  • 용서할 때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이 포함된 <마태복음18장>을 이렇게 마무리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v.35)고. 내가 형제의 허물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나의 죄를 용서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 용서할 때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서 5장>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셔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전에 한 장소에서 이스라엘민족의 할례를 다시 행하게 하시고, 그곳 이름을 ‘길갈’이라 하셨습니다. ‘길갈’은 ‘굴러 보내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400년 종살이하면서 굴욕과 고난의 시간을 모두 굴러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용서’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형제를 용서할 때, 성령으로써 마음의 쓴 뿌리를 제거해 주시고, 모든 상처를 치유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중심으로 형제 (=지체)의 허물과 죄를 용서함으로 하나님의 크신 용서를 경험할 뿐 아니라, 우리 마음의 모든 상처가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함을 받는 복된 주의 자녀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 뿐 아니라,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도 결코 쉽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용서’ (the forgiveness)가 아닌가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챤들은 예수 믿고 구원받았음에도, 그리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내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성경말씀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순종하기) 힘든 말씀 중의 하나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4)고 우리 크리스챤들을 도전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왜 우리에게 용서를 명령하시는 것일까요? 여전히 목에 걸린 가시처럼 쉽게 넘기지 못하고, 실천 못하는 ‘용서’의 문제를 성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말씀 가운데 용서에 담긴 하나님 아버지의 그의 자녀를 향한 뜻과 그 깊은 은혜를 한걸음 더 깨닫아 나감으로 그분의 용서를 실천해 나갈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이 용서를 통해 우리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마음의 상처가 치유함 받고 사랑의 아들과 딸로 살아가는 축복된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먼저 그의 제자들에게 형제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15절>에서 “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이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시면서 어떻게 그 잘못을 저지른 상대방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도록 도와 줄 것인지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형제의 허물을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도전의 말씀을 듣고나서,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리이까” (v.21)라고 말입니다. 이와 같은 베드로의 질문에는 ‘상대의 잘못에 대해 내가 몇 번까지만 용서해 주면 충분합니까?’ 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유대교 전통에서 기인되는 질문인데, 구약의 율법적인 전통에서 볼 때는 3번까지 용서가 그 한계선으로 여겨져 있었습니다.

예를 든다면, <아모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 여러 민족들의 죄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시면서 거듭해서 ‘서너가지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다메섹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 가사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 두로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 에돔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암. 1:3-11) 그들의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시겠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욥기 33:29>에서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 세번까지 기회를 주셔서 생명의 빛을 주시고자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럼으로 동일한 죄악을 네번 이상 반복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진노, 곧 그분의 죄에 대한 심판을 가져오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번 용서가 마지막 마지노선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에 근거해서 유대인에게 있어서 전통적으로 3번까지가 용서 (=인내)의 한계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한계 3번을 두번 반 정도식 더 용서한 ‘일곱번’씩이나 용서를 설정하고 나서, “이정도면 어떨까요?”라고 주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주께 칭찬을 기대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그의 질문에는 베드로 자신도 지금까지 7번씩이나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 준 적이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 여러분의 경우도 누군가를 동일한 잘못으로 7번씩 용서해 준다는 것이 현실적으로도 결코 쉽지 않음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 오늘 <22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v.22)고 말입니다. 베드로가 일곱번이라는 최고치로 용서의 상한선을 말했을 때, 주님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숫자를 제시하시면서 그렇게 용서하라고 도전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끝없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이와 같은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우리가 함께 이해해야 할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서를 명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용서할 때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바로 앞에서 베드로의 용서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의 대답이 매우 도전적이고 놀라움을 말씀드렸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할수 있는 최대치로 일곱번 용서를 말했는데, 예수님은 일곱번을 열번 곱한 70번을 다시 일곱번 곱한 만큼 용서하라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70번을 7번 곱하면 얼마인가요? 490입니다. 그렇다면, 491번째부터는 형제가 잘못하면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죠! 이것은 계속해서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끝없는 용서입니다. 물론, 여러분과 저의 반응을 주님은 아십니다. “와우! 그건 불가능해” 그렇습니다. 어떻게 본다면 그런 무한정한 용서는 우리 인간의 능력과 의지로는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한정의 용서는 오직 한 분, 하나님 아버지만 행하실 수 있는 용서임도 우리는 잘 압니다. 아마도 그분의 그 끝없는 용서가 없었다면 여러분과 저는 오늘 이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앞의 <마태복음 5장>에서도 보면, 주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4)고 말씀하시고 나서,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마. 5:45)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말로 만이 아니라, 어떻게 그분의 자녀의 합당한 삶을 살수 있을 것인지를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이와 같은 용서를 놀랍게 행한 두사람을 저는 기억합니다. 첫번째는 우리 예수님인데, 십자가에서 목박혀 죽으시면서도 그를 못박고 손가락질하고 욕하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라고. 또 한사람은 기독교의 첫 순교자 스데반 집사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에 의해 죽어가면서 이렇게 또한 크게 외쳤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행. 7:60)라고. 스데반 집사가 이렇게 자신을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도리어 용서하며 눈을 감을 수 있었던 그 마지막 순간을 누가는 “스데반이 성령충만하여 ~” (행. 7:55)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스데반이 그의 인간적 노력과 능력을 초월한 성령의 힘으로 그의 원수들을 용서할 수 있었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할지라도, 하나님이로서는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70번의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이것이 곧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지는 참된 모습이라고 말입니다.

둘째, 용서할 때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 말씀하시고 나서, 한가지 비유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이 <v.23-34>까지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자신은 임금으로부터 무한한 자비를 큰 빚을 탕감 받았음에도, 자기에게 조금의 빚을 진 사람은 것은 탕감해 주지 않은 악한 자가 결국 받게 될 벌’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빚을 탕감해준다’는 것은 결국 ‘형제의 허물을 용서해준다’는 것임을 주님의 마지막 말씀에서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v.35)고.

사실 이런 주님의 말씀은 우리 성도들에게 도전의 말씀임에 분명한데, 그 이유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아버지의 한량없는 사랑과 용서로 살아가고 있고 또 지금도 그 용서를 구하면서도, 그것과 비교할 수도 없는 아주 작은 형제의 허물에 대해서는 너나 할 것없이 예민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v.35)는 주님의 말씀은 진정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2)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을 전제’하고서 ‘하나님 아버지께 그런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는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만 용서를 구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우리는 이런 주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셋째, 용서할 때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서 5장>을 읽어보면, 이제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 땅 정복을 눈 앞에 두고 요단강을 건너서 한곳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먼저 출애굽기간 중 할례 받지 못한 자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시고 나서, 그곳을 ‘길갈’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수. 5:9) 여기서 ‘길갈’은 히브리어로 ‘굴러간다’ 혹은 ‘제거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 정복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직전에 먼저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의 표시인 할례를 행하게 하실 뿐 아니라, 그동안 400년 애굽 종살이했던 치욕과 고난의 역사가 굴러가게 하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영적으로 그 부끄러움과 아픔의 시간들을 더 이상 껴안고 있지 말고 흘려보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길갈’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 크리스챤들은 아직도 과거의 수치와 아픔의 역사를 흘려버리지 못한다는 분들이 너무도 많은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영적 길갈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신의 상처를 부여잡고, 고통 가운데 신음하며 아프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막. 2:17)고. 물론 이 말씀은 근본적 (1차적)으로 주께서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셔서 구원하여 주심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주께서 자신을 ‘의원’ (the physician)이라고 부르시는데는 단지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 뿐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회복됨을 함께 말씀하시는 것임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유일하신 구세주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참되신 의원이심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주님의 전능하신 치유의 능력과 선한 목자되신 주님의 깊은 사랑을 신뢰할때, 우리의 그 어떤 상처와 어려움, 특별히 마음의 상처를 주께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용서하는 것이 소극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매우 적극적인 치유로 나아가는 최선의 길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누군가를 중심으로 용서함으로 나의 모든 내적 상처를 모두 주님 손에 맡길 때, 비로소 주님은 내 속에 깊이 남아 있는 쓴 뿌리를 제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약속하신 그분의 기쁨과 성령의 열매를 회복된 우리의 심령 속에 넘치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 ~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 61:1)라고 우리를 향한 자신의 신실한 메시아적 사역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되고 갇힌 자에게 자유를, 그리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사역인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에게 용서가 왜 그토록 놀라운 능력이 될 수 있는 가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우리의 적극적인 용서의 행위를 통해 주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상한 마음을 고쳐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신실하신 치유의 역사를 통해 약속하신 주의 기쁨을 누려 나갈수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중심으로 형제와 자매의 허물을 용서함으로 주께서 허락하신 영적 길갈을 경험하며, 주의 충만한 은혜 안에 머무는 축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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