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4, 2022

“치유하시는 하나님” (The Lord Who Heals You)

Preacher:
Passage: 이사야 (Isaiah) 61:1
Service Type:

“치유하시는 하나님”

(The Lord Who Heals You)

9-4-22

본문말씀: 이사야 (Isaiah) 61:1

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설교 요약]

            오늘 본문 말씀이 포함된 <이사야 61장>은 바벨론의 전쟁포로로 잡혀 가서 절망속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말씀입니다. 바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그들이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 가게 하여, 상한 마음이 고침을 받고 갇힌 자가 자유케 되는 은혜의 회복을 선포하십니다.

한편 이 본문말씀이 우리 크리스챤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가르치신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회당에서 읽고 나셔서, 사람들에게 “이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눅. 4: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의미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여호와의 성령의 임하심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약속하신 메시야가 바로 나다”고 주님은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메시야’ (=구원자)의 사역이 무엇임을 잘 설명해 줍니다.

주께서 요한복음에서 자신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설명하면서 밝히셨듯이 (요. 10:10), 첫째) 우리에게 ‘영생’을 주심 (“양으로 생명을 얻게”)이요, 둘째) 상한 마음을 고치시고,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심 (“더 풍성히 얻게”)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영생을 얻게 된 것은 복된 영적 생명의 시작이지만, 이것으로 그쳐서는 안되고 상한 마음이 고침받고 포로된 자가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과 성경에서 상한 심령이 치유를 경험한 인물의 사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 구약의 ‘요셉’ 입니다: 창세기에서 보듯이, 요셉은 형들의 미워함으로 인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는 비극적인 신세가 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고, 형들을 만났을 때에 보복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 하사 ~” (창. 39:21)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뜻은 그의 억울함과 상처를 여호와께서 만져 주시고, 강력하게 영적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그분의 은혜로운 손길이 함께 하셨다는 뜻입니다. 또 한사람의 사례는
  • 신약의 한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예수께서 수가성이라는 지역에서 한낮에 물 길러 나온 한 여인을 만나셔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셨습니다 (요. 4장). 주님은 그녀가 ‘남편 다섯이 있었지만 지금 있는 자도 그녀의 남편이 아님’을 아셨기에, 그녀 속에 있는 육신의 목마름보다 더욱 강한 영혼의 목마름을 아셨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영접했고, 그 상한 마음의 치유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성도가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상한 마음을 고쳐 주시고, 얽매이고 눌린 영혼을 자유케 하심을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바라기는 우리 안의 모든 마음의 상처와 고통이 주의 선하신 능력으로 고침바 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복된 여러분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제가 목회를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여러 청년들을 만나서 그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점점 더 이해하게 되는 한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찌라도 모든 성도 한사람 한사람에게 있어서 각자의 상처와 고통을 안고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때로 이런 상처가 표면적으로 별 문제없는 듯 여겨지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 한 그것을 결코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전히 고통을 겪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지 알지 못하면서 상처를 재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좀더 진지하게 이 문제를 받지 못할 때, 우리는 여전히 치유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상처가 쓴 뿌리가 되어 우리의 신앙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는 점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각자의 상처는 무엇인지 성령의 도우심으로 좀더 올바르게 직시하고, 나아가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능하신 손으로 치료함을 받는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포함된 <이사야 61장>은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의 전쟁포로로 잡혀가 있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에게 말씀으로 선포하시는 약속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들을 다시 고국 땅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여, 자유와 복된 자녀의 삶을 회복케 하시고자 하심인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하나님의 소망과 새로운 출발의 언약은 먼저 앞장 <이사야 60장>에서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사. 60:1)라고 이사야는 <사. 60장>을 시작하며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죄와 사망의 그늘에 앉아 좌절과 절망에서 사로잡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 빛을 발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계속되는 오늘 본문의 <사. 61장>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이런 이스라엘의 회복과 자유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인지를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라고 하는 1인칭 주어의 문장을 통해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스라엘민족의 포로생활의 귀환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장차 모든 인류에게 약속하신 메시야를 통해 구원하여 건져 주시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바로 ‘죄로부터 놓임’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과 심령과 영을 사로잡는 사단 마귀와 육신에 속한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입는 것입니다.

한편 오늘 이 본문말씀이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고향동네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면서 인용한 첫 구약의 말씀의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 이사야의 말씀을 이라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주님은 오늘 이사야 본문의 말씀을 펼치셔서 낭독하시고 나서 이렇게 가르침을 시작하셨습니다. “이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눅. 4:21)라고. 여기에서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을 <표준새번역>에서 보면 “이 성경 말씀은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라고 예언한 그 말씀의 ‘내게’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고 주님은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주인공’이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주장이 그 말을 듣는 유대인들을 놀라게 한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오늘 본문말씀에서 말하는 “주 여호와의 신이 임하게 될 자”가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누굴까요? 그는 “메시야”입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그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낼 자가 바로 구원자, 메시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이 예언을 하고나서 700여년이 지난 후 나사렛 동네의 목수였던 예수라는 사람이 그의 글을 읽고나서 ‘오늘날 이 성경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너희가 그토록 기다리는 메시야, 그리스도이다’ 라고 예수님은 선언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한가지 사실은 그 자리에 있었던 유대인들은 그 당시 예수님이 목수 요셉의 아들이란 이유로 그분의 메시야 되심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편견과 선입관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렇게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을 때 심지어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주님을 밀치고자 했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비뚫어진 시각에 사로잡혔는지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일례가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마음이 상한 자가 고침을 받고, 포로 되고 갇힌 자가 자유케 되는 언약을 선포’하고 나서 긴 기다림의 터널을 지나 마침내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날이 도래했음을 그의 기름 부은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 각자는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곰곰히 되돌아 보아야 함을 도전받습니다. 구원은 성도가 죽어서 하늘나라 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오늘 말씀에서 선포되듯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마음이 상한 자가 고침을 받고, 포로 되고 갇혔던 자리에서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삶을 이 땅에서 살아가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사역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우리 주님께서 허락하신 영생은 선물을 받음으로 상한 마음이 고침을 얻고 포로 되고 갇힌 그 자리에서 놓임을 받는 약속하신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과 이점을 좀더 집중적으로 살펴보기 원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의 제목과 같이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먼저, 저는 성도 여러분이 구약성경에서 잘 아는 성경인물인 ‘요셉’에 대해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요셉의 성장배경은 어떻습니까? 그는 야곱의 12아들중 11번째로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사랑했던 라헬의 아들로 노후에 태어난지라 형들과는 달리 값비싼 채색 옷을 아버지 야곱이 지어 입혔고 각별한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랐습니다. 이러한 편애는 필연적인 형제간의 갈등을 유발하게 되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무척 미워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어린 요셉이 자신이 꾼 꿈, “형들의 곡식단이 자기의 단을 둘러서서 절한다”고 그리고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였다”고 형들에게 얘기했을 때, 형들은 기름에 불을 붙인 격으로 그를 더욱 더 미워함에 절정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창. 37장). 그리하여 형들은 아버지가 요셉을 심부름 보낸 틈을 타서 그를 지나가던 상인에게 팔아 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용어로 한다면, ‘인신매매’를 한 것입니다. 형들이 그 동생을 돈을 받고 누군가에게 팔아 넘긴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끔찍한 잘못된 일인지는 제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 이후 요셉의 파란만장한 삶은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한가지 확인코자 하는 것은 이렇게 자기 친형들에 의해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어떻게 애굽 왕의 전적인 신임을 받는 총리가 되고, 애굽 뿐만 아니라 세상 여러 나라를 7년간의 극심한 가뭄에서 구원하는 놀라운 구원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요셉은 그의 ‘상한 마음’이 치유되어야 했습니다. 무슨 상한 마음입니까? 어느 날 형들의 미움으로 인해 넉넉한 집안의 그야말로 사랑받는 아들에서 애굽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 이 상황, 그를 이렇게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형들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 그로 인해 깊은 상처가 얼마나 클지는 짐작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런 깨어지고 상한 마음이 먼저 고침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창세기에는 이런 그의 상처받은 마음과 절망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이 절망의 상황을 오뚜기처럼 일어나는 요셉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요셉이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열심히 일했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그의 출중한 외모를 보고 유혹했고, 요셉이 이를 물리치고 그 자리를 벗어났을 때, 이에 앙심을 품은 그 여자가 요셉을 모함하여 그가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상을 원망하고, 어쩌면 하나님을 원망하며 자포자기해도 별 할말이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요셉은 절망하고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 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창. 39:20b-21)라고. 성경은 짧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 속에서 그의 억울함과 상처를 만져 주시고, 강력하게 영적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이 그를 회복시키셨음을 저는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잘 알수 있는 장면이 마지막 형들과 극적인 상봉을 할 때 나타납니다. 가나안지방의 극심한 가뭄으로 양식을 사러 애굽으로 간 형들이 총리가 되어 있는 요셉을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요셉은 의도적으로 형들에게 억울한 상황을 만들어 과거 자신을 팔아던 그들의 죄를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그들이 팔았던 동생 요셉임을 밝혔고, 형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자신을 이미 진심으로 형들을 용서하였음을 말하고 도리어 형들을 위로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창. 45:5,8)고. 물론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을 밝히기 전에 그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인간적인 감정이 때로 북받쳐 올라 한번씩 얼른 밖에 가서 눈물을 훔치고 다시 되돌아오기도 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팔아 넘긴 형들을 용서한다는 것이 결코 말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요, 인간적으로는 자신이 받은 상처가 치유되기 쉽지 않음을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 은혜를 경험했기에 형들을 온전히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형들에 대한 맺힌 원한을 풀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 이 모든 상황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애굽의 노예에서 총리로 영광스럽게 이끄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그가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진정한 치유를 경험했을 것으로 저는 믿어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그의 상한 마음은 고침을 받고, 도리어 형들을 위로하는 놀라운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한 명의 상한 마음이 치유함을 받았던 성경의 예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어떤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어느날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매우 경멸하고 상대조차 하지 않았던 사마리아인의 지방을 제자들과 함께 지나가셨습니다. 그때 수가성이라 불리는 지역의 어느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납니다. 그녀가 어떤 상태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구체적인 설명이 없지만, 그녀의 행동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종합해 볼 때 험한 인생을 살았을 것임을 이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중동지역의 대낮의 뜨거운 태양빛 아래 홀로 물 길러 나온 것을 볼 때, 왠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다녔던 여인이었을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뭔가 사람과의 시선을 회피하고 싶은, 왠지 남들에게 업신여김 받을 수 있는 그런 삶을 그녀가 살았다고 나 할까요?! 이것은 주님의 말씀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 (요. 4:18)고.

그녀의 과거와 현재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이시기에, 그녀가 과거 다섯번의 결혼생활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것과 현재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님을 주께서 적나라하게 밝히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남 앞에서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녀의 이러한 삶을 쉽게 판단하고 비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단지 요셉의 경우와 여러가지로 상황과 형편이 달라 보이는 이러한 사마리아 여인의 삶이지만, 마찬가지로 제가 관심가지는 것은 그녀의 마음의 상처와 얽눌리고 갇힌 삶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남은 평생 그 누구도 이 한 많은 삶의 굴레에서 자신을 구원할 사람이 나타나리라고 기대하지 못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유대인 남자인 나사렛 예수님은 전혀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자신에게 나타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마치 그녀속을 꿰뚫어 보듯 드러내 보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게 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3-14)는 것입니다. 그녀는 이제 자신과 대화하는 분이 자신이 고대했던 메시야 곧 그리스도임을 깨닫고,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요. 4:29)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녀의 행동을 통해 제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깊은 상한 심령은 주로 인해 치유함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녀의 영적 목마름은 주님의 영생하는 샘물로 인해 해갈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토록 갈구했던 영혼의 구세주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교회 안에서도 이런 내적 상처의 치유가 중요함을 느끼고 사역을 집중한 여러 사역자들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봅니다. 특별히 어릴적 시기에 겪은 마음의 상처가 나중에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깊은 내면속에, 무의식 속에 남아서 쓴 뿌리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로인하여 비록 크리스챤으로 살아가면서도 어릴적 형성된 내면의 상처가 신앙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 영성을 방해한다고 이런 내적 치유를 통해 중점적으로 사역을 행하는 영적 리더들은 말합니다. 예를 든다면, 한국에서 사역하고 있는 주서택 목사의 “내 마음 속에 울고 있는 내가 있어요”라는 저서가 그것입니다. 이 책에서 주목사는 상한 마음의 다양한 유형과 그 치유의 성경적 원리와 방법을 잘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분이 오랜기간 C.C.C. 대학생선교단체에서 청년들을 사역하면서 그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과 영적 성장과는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은 것이 주목사님이 이런 치유사역에 집중하게 된 동기라고 합니다.

물론 저도 청년들을 섬기고 학생교회의 목회자로써 제가 할수 있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런 내적 상처를 치유하고 온전한 영성으로 청년들이 성장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저는 가까운 시일에 좀더 구체적인 내적 치유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함께 살펴 나가는 시간 갖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가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치유의 시작과 끝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상한 마음을 고쳐 주시고, 얽매이고 눌린 영혼을 자유케 하심을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에서 상처받고 인생의 무거운 짐으로 낙심된 영혼을 향하여 이렇게 참된 영혼의 안식으로 그들을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고 말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신뢰하며 그분께 순종함으로써 날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겸손하고 온유하신 주님을 배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할 때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태복음 11:29)라고 약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상한 마음은 치유함을 얻고, 지친 영혼은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아직 아물지 않은 마음의 상처와 여러분을 얽매고 있는 떨쳐 버리기 원하는 육신의 연약함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상처와 연약함이 주님의 크신 능력과 은혜로 온전히 치유되기를 원합니까? 예수님은 그분의 사역을 시작하시며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게 하려함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주님의 온전하신 치유의 은혜가 여러분의 신실한 믿음을 통해 역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을 얽매였던 모든 상처와 고통이 주의 선하신 능력으로 고침바 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복된 여러분 되시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