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28, 2022

“여호와를 송축하라” (Bless The Lord)

Preacher:
Series:
Passage: 시편 (Psalms) 103:1,4-5
Service Type:

“여호와를 송축하라”

(Bless The Lord)

8-28-22

본문말씀: 시편 (Psalms) 103:1,4-5

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성호를 송축하라 (Praise the Lord, O my soul; all my inmost being, praise His holy name.)

4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who redeems your life from the pit and crowns you with love and compassion,)

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who satisfies your desires with good things so that your youth is renewed like the eagle’s.)

[설교 요약]

            다윗의 <시편 103편>은 그의 인생 말년에 썼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시편에는 그의 젊은 날에 원수에 대한 미움과 보복의 끓는 피도 없고, 실족하고 좌절한 영혼의 탄식도 없으며, 오직 모든 죄악과 파멸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크신 능력에 대한 감사와 찬양만이 충만합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다윗의 <시. 103편>은 수없이 많은 성도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참된 경배로 나아 감에 있어서 깊은 영적 감동을 주어 여러 찬송곡을 만들게 했습니다.

먼저 다윗은 자신을 향하여 외칩니다. “내 영혼아” (v.1,2) 혹은 “내 속에 있는 것들아” (v.1b)라고. 왜 외칩니까? 그것은 ‘잠자는 자신의 영혼’을 흔들어 깨워 크신 하나님을 찬양코자 하는 것입니다.

이점을 ‘존 파이퍼 목사’는 이렇게 잘 설명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찬양하기를 즐거워하는데, 그 이유는 단순히 기쁨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기쁨을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연인들이 서로에게 계속적으로 아름답다고 말하는 찬사를 보내는 것은 단순히 서로를 칭찬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며, 이러한 찬사의 표현을 통해 진정으로 기쁨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표현되기 전에는 기쁨은 불완전합니다.” 입술로 표현하기 전까지는 그 기쁨이 완전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본질적인 이유일 것입니다. 어떤 종교의식이나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잠에서 깨어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나갈 때 우리는 기쁨으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아 나가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v.2)라고 다윗은 자신의 영혼에게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은혜를 깨닫는 중심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나가는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v.13)라고 다윗은 하나님의 깊고 넓은 긍휼의 마음을 점점 더 알아 나갔던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잠자는 영혼이 깨어나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선하심을 맛보아 알아 나감으로 기쁨의 감격으로 서로 함께 만방을 향해 그분의 영광을 찬송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다윗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성호 곧 ‘그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라” (v.1)라고 말입니다. 왜 다윗 한사람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그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하는 것일까요?! 왜 온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며 그분을 즐거워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분 나빠하시고 토라지시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를 택하여 자녀 삼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 성도의 당연한 의무이기 때문일까요?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중심엔 분명 ‘죄사함 받고 그분의 자녀’된 이유가 자리잡고 있지만, 이것이 ‘의무감’때문에 행한다면 전혀 본질에서 벗어난 종교적 행위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오늘 제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통해 나누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의무감이 아니라, 자발성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이유를 깨닫아 나갈 때 단순히 우리가 죄사함 받는 것 뿐 아니라, 그것을 능가하는 은혜의 바다에 점점 더 우리 성도는 몸을 담그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크신 이름을 찬양하는 그 자체가 우리 인간의 최대의 행복이요 축복인 것을 우리는 영적으로 점점 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진정한 복된 자의 삶을 누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오늘 <시편 103편>을 다윗이 그의 인생 말년에 썼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시편 103편>만큼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기쁨과 만족,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 채워진 다윗의 시편은 없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다윗의 젊은 날에 원수에 대한 미움과 보복의 끓는 피도 없고, 실족하고 좌절한 영혼의 탄식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 영혼을 만족케 하시고, 모든 죄악과 파멸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크신 능력에 대한 감사와 찬양만이 충만합니다. 바로 선하신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순전한 영혼의 예배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 베푸심에 대한 신뢰와 감사는 그의 젊고 혈기 넘치는 시절보다는 오히려 그의 긴 인생 여정을 마무리해가는 인생 노후에 더욱 강하고 깊이 느끼게 되었을 것이라고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추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다윗의 <시. 103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하는 <시. 23편>과 함께 수없이 많은 성도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참된 경배와 예배로 나아 감에 있어서 깊은 영적 감동을 주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회사에서 여러 유명한 찬송가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 시편 103편을 기초로 한 찬송가들이 여럿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든다면,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에 의해 영향을 받고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인 <요한 그라우만/ Johann Graumann>이 1525년에 지은 찬송가 “내 영혼아 이제 너의 창조주를 찬양하라” (My soul, now praise your Maker)를 지었고, <요아힘 네안더/ Joachim Neander>이 1680년에 쓴 “다 찬양하여라” (Praise to the Lord, the Almighty), 그리고 <아이삭 왓츠/ Isaac Watts>가 1719년에 지은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영혼아” (O bless the Lord, my soul)과 같은 영감이 넘치는 이 곡들이 바로 오늘 본문이 속해 있는 <시편 103편>에서 영감을 받아 지어진 곡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가 잠깐 살펴볼 것은 큰 그림에서 볼 때, 총 150편에 다다르는 시편말씀은 다섯단원으로 나눠서 분류되는데, 오늘 본문의 <시. 103편>은 그 네번째 단원의 마지막 ‘송영’ (doxology)부분 (시. 103-106편)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시편에서는 이 다섯단원의 시편에서 각각의 단원이 끝날 때 마다 오늘 본문과 같은 ‘송영/송축’으로 마무리되도록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눈 여겨 볼 것은 다윗이 찬양을 시작하면서 자기 자신을 향해 몇번씩 거듭해서 외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내 영혼아” (v.1,2) 혹은 “내 속에 있는 것들아” (v.1b)라고 스스로를 불러 일깨우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마치 잠자는 자기 자신을 흔들어 깨워서 ‘내 영혼아 너는 지금 무엇하고 있는 거니?! 지금 이렇게 정신없이 잠만 자고 있어서 되겠니!!’라고 도전하는 듯합니다. 그러면 다윗이 이렇듯 자신을 일깨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다윗은 크신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회당에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거나, 우리 크리스챤들이 교회에서 또한 찬송을 하는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더욱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내영혼의 찬양과 경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이요 일깨움인 것입니다. 우리 주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왜 우리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를 기뻐해야 하는 것일까요? 제가 말씀을 시작하면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이것이 우리들의 의무이기 때문이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기 때문입니까? 이점에 있어서 ‘존 파이퍼 목사’는 <성도가 찬양하는 근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잘 설명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찬양하기를 즐거워하는데, 그 이유는 단순히 기쁨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기쁨을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연인들이 서로에게 계속적으로 아름답다고 말하는 찬사를 보내는 것은 단순히 서로를 칭찬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며, 이러한 찬사의 표현을 통해 진정으로 기쁨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표현되기 전에는 기쁨은 불완전합니다.” 존 파이퍼 목사는 우리 인간은 우리의 입술로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전까지는 그 기쁨이 완전해지지 않았다고 진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C.S 루이스’는 이렇게 잘 표현한바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것을 참으로 가치 있다고 여기면 자연히 그것을 칭송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함께 그것을 칭송하도록 권고합니다. ‘그녀는 참 사랑스럽지 않니? 그것 참 영광스럽지 않았니? 그것 참 장엄하다고 생각하지 않니?’라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진실로 그 무엇에 대해 감동하고 기쁨에 충만할 때는, 내 속으로만 긍정하는 것으로 그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꼭 누군가에게 이것을 함께 공유하고 그 찬사와 감동을 격하게 나누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런 기쁜 사실을 그 누구에게와 나누기 원하는 것이 우리 인간존재의 강력한 행동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 자신 곧 내 영혼에 대해서 우리가 다윗처럼 이렇게 외친다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닐까요!?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참된 기쁨과 은혜에 충만해 있다면 말입니다.

저는 오늘 다윗의 시편을 통하여 우리 성도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찬양으로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길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기억’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영혼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v.2)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 곧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억할까요?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 (v.3-5)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를 포함한 우리 크리스챤들이 얼마나 심각한 ‘영적 건망증’에 걸려 있는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베푸신 수없는 은혜는 기억하지 못하고, 되돌아서면 바로 잊어버리는 영적 건망증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러분 스스로 이 증상은 없는지 자가진단 하는 법을 한가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 중에서 10가지’만 한번 기억해 보십시오! 열가지는 너무 많다고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베푸신 은혜에 대해 열가지도 생각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미 영적 건망증에 걸려 있음을 우리는 스스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이나 사람으로부터 받은 섭섭하고 상처받은 마음에 대해선 좀처럼 잊지 않고 가슴에 새겨 두게 됨을 봅니다. 어느 목사님의 말처럼,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는데, 도리어 우리는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다윗이 자신에게 선언함을 봅니다. 여기서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신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 성도가 독수리처럼 새롭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물론 독수리는 용맹하고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임을 상징할 것입니다. 그러나 ‘독수리’의 생태적 특징 중의 하나는 ‘독수리는 매년 자신의 털을 모두 새로 간다’고 조류학자들은 지적합니다 (???). 해마다 완전히 털갈이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독수리처럼 새롭게 되어진다 라고 묘사하는 중요한 근거가 아닌가 하고 저는 생각해 봅니다. 다시 말해서, 독수리가 자신의 해묵고 상한 깃털을 완전히 떨쳐 버리고 윤기나고 튼튼한 깃털로 자신을 무장하듯,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나 영적 강건함을 지켜 나갈수 있도록, 아니 더욱 강건한 영적 능력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시. 103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매우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를 아우르는 말씀이 있다면 그것은 <13절>에 나타나는 <아버지의 마음>일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v.13) <시편 103편> 뿐 아니라, 성경 전체를 꿰뚫고 흐르는 <하나님의 마음>은 ‘자식을 끝까지 사랑하는 선한 아비의 마음’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이 <시편 103편>에 대한 ‘옥한흠’목사님의 설교를 듣었는데, 그분은 하나님이 ‘아버지의 심정’으로 우리를 대하시는 대표적인 말씀구절을 <삼하. 18:28-19:8>에 내오는 ‘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부짖는 다윗의 마음’을 예로 들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솔직히 이런 예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다윗의 왕위를 찬탈하고자 교활하게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고 온 나라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압살롬이 죽었다고 다윗은 대성통곡을 하며 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요압과 유대장군들은 ‘만약 다윗왕이 계속해서 압살롬만을 위해 슬퍼한다면, 이제 왕을 따르던 모든 자가 오늘밤에 왕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고 경고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로 인해 전쟁에 승리한 다윗의 군사들이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해 도리어 죄인취급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다윗이 너무 공정성을 잊고 매우 편파적인 처신을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유대 모든 장군들과 군사들이 목숨을 걸고 반란군을 진압했는데, 다윗은 자기를 배반한 아들 한 명 때문에 도리어 모든 군사를 부끄럽게 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과연 압살론보다 나은 존재인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던)” (사. 53:6) 존재가 저와 여러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그의 사랑을 보이셨다면, 어쩌면 하늘의 천군천사들은 다윗의 장군들보다도 더 강력하게 하나님을 향해 항의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왜 하나님은 저런 반역하고 죄악된 인간을 위해 이토록 끝없는 사랑을 보이십니까!?’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다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아버지가 그 자식을 불쌍히 여기듯이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다윗은 자신의 평생의 삶을 통해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니까? 그냥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찬양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감사와 기쁨의 찬양을 올려 드립니까?! 만약 아직까지 이 영혼 깊은 곳의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없다면, 그 이유는 하나님이 넉넉히 주시지 않아서 가 아니라, 이미 주신 수많은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이 진정으로 그 어떤 것을 가치 있다고 여기신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감탄하고 칭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입술로 고백하고, 영혼으로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여호와를 송축한 이유요,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깨닫은 모든 그의 자녀의 외침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사랑의 노래가 영혼 깊은 곳에서 넘쳐흐르는 축복된 성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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