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7, 2023

“성도의 교제” (The Fellowship Of Believers)

Preacher:
Series:
Passage: 사도행전 (Acts) 2:42
Service Type:

“성도의 교제”

(The Fellowship Of Believers)

5-7-23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2:42

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They devoted themselves to the apostles’ teaching and to the fellowship, to the breaking of bread and to prayer.)

[설교 요약]

            오순절날 주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합심하여 기도할 때, 성령이 불의 혀같이 임하였습니다.

이때 베드로 사도가 성령 충만하여 나사렛 예수가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 이심을 증거했을 때, 3천명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벌어졌고 이것이 예루살렘 교회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교회의 형성과정을 살펴보게 될 때,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써 이스라엘 온 집을 구원하시고 나서, 50일째되는 ‘오순절’에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지만 그들은 안타깝게도 그 율법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천오백년의 긴 세월을 지나며 하나님은 그의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과 새 언약을 맺으실 것, 곧 시내산에서 돌 판에 새겼던 옛 언약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판에 새기는 새 언약을 맺으실 것’임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렘. 31:31-33).

이러한 새언약은 바로 ‘오순절날 성령강림사건’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예루살렘 교회인데, 그렇다면 무엇이 예루살렘교회의 영적 특징일까요? 그것은

첫째, “올바른 성경적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먼저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라고 밝힙니다. 오늘날 대형교회는 많지만, 말씀이 말씀으로 선포되는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말씀이 흥왕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행. 6:7).

둘째, “서로 깊은 교제”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서로 교제하며 떡을 (뗄)” 뿐 아니라, 더욱이 성도들이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고 뜨겁게 사랑으로 섬김으로 깊이 교제했던 것을 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행. 2:44~47a) 공동체의 하나됨을 누려나갔습니다.

셋째, “기도를 힘쓰는 공동체”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또한 “기도하기를 전혀 (힘쓴)” 공동체였습니다. 베드로의 권면처럼 기도 가운데 성령의 신령한 젖을 사모하고 넘치게 공급받았습니다 (벧전. 2:2).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의 작은 관심과 섬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생명을 전하는 아름다운 주님의 몸된 아포슬 공동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제가 이해하기로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들이 가장 이루고 싶은 영적 공동체의 롤모델의 하나가 신약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서로 사랑하며 믿음과 선행을 격려하는 모습,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대표적인 말씀의 하나인 것입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v.42)라고 말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 아포슬이 더욱 분명히 추구하고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영적 공동체의 모습은 무엇이며, 그 특징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실패 (시행착오)를 겁내지 않고 날마다 시도해 나가며, 주님의 아름다운 몸으로 연결되고 자라나는 아포슬 공동체 되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크리스챤 공동체는 신약성경에서 등장하는 첫번째 초대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이 예루살렘교회는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오순절날 120여명의 주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의 명하심과 같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모여 합심하여 기도에 전혀 힘썼을 때, 성령이 불의 혀같이 임하심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모인 사람들 위에 강력히 임했을 때 그들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기 다른 지방의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임을 알지 못했던 어떤 사람은 이러한 현상이 마치 ‘사람들이 낮부터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독한 새 술을 마신 것이 아닌가?’하고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사도 베드로가 일어나서 이 놀라운 사건은 바로 구약의 여러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 성령으로 충만케 하실 약속의 성취임을 밝혔습니다.

곧 구약의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며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행. 2:17-18)라고.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베푸셔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오리라고 예언한 메시야가 곧 나사렛 예수님임을 증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백성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고 고발합니다. 바로 율법 없는 로마인들의 손을 빌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목박아 죽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몇주전에 저희들이 함께 살펴보았듯이 다윗이 <시편 16편>에서 선포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v.27)라고. 여기서 다윗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장차 그의 후손 가운데 그리스도가 오실 것과, 그가 고난당하여 죽을찌라도 하나님께서 썩음을 당치 않게 그분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목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v.36)고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그때 그 말을 듣은 자들이 마음에 찔려 이렇게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묻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v.38)라고 말입니다. 이로 인하여 그의 선포하는 말을 듣고 그날 하루 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침례를 받게 되는 놀라운 구원의 사건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바로 앞절 <41절>까지의 내용인데, 앞서 말씀 드린데로 최초의 초대교회인 ‘예루살렘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정확히 확인시켜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상세하게 최초의 신약교회인 <예루살렘교회>의 출발에 대해서 설명 드린데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첫 초대교회가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회심한 자들이 함께 공동체를 이룸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점이 중요한 것은 ‘왜 교회가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교회의 존재목적은 무엇인지?’라는 본질적인 물음에 대해서 첫 초대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출발이 잘 답해주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의 충만하신 임재로 죄씻음 받아 구원함을 얻은 성도가 연합함으로 세워진 공동체가 교회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은 적어도 ‘무엇이 교회인가?’에 대한 신학적 (교리적/성경적0 정의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가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듯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는 것입니다. 우리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같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이렇게 나사렛 예수를 믿는 자들이 함께 모여 믿음의 공동체를 이룰 때 이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되듯이 <예루살렘교회>는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모인 공동체’일 뿐 아니라, 더 구체적인 영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루살렘교회의 영적 특징일까요? 그것은

첫째, “올바른 성경적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라고 밝혀줍니다. 제가 그동안 여러 번 성도 여러분께 강조하고 도전했던 것 중의 하나는 우리 주위에 얼마나 악하고 교활한 기독교 이단들이 들끓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 이단집단들은 오늘 이 시간에도 바로 캠퍼스에서 흥미롭고 매력적인 동아리의 탈을 쓰고 유혹하는가 하면, 혹은 여러분들의 집 주위 공원이나 식료품 가게 앞에 진을 치고 전단을 돌리고, 아니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죽을 힘을 다해 그들의 거짓되고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전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 5:8)라는 베드로 사도의 강력한 경고의 실체가 아니면 또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성경적인 가르침과 정통 교리를 가졌다고 자랑하는 우리 침례교단 그리고 장로 및 감리교단을 포함한 정통보수 교단들은 여전히 이 심각성을 잘 깨닫지 못하는 듯 그냥 영적 잠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한마디로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성도들을 말씀으로 훈련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 자신도 젊은 시절 잘못된 성경 가르침으로 인해 많은 영적 혼돈에 빠진 적이 있었기에, 이것이 얼마나 그 사람의 삶 전체를 혼돈과 침체에 빠트릴 수 있음을 저는 잘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예루살렘교회는 기존의 120명의 주님의 제자들에 더하여 오순절날 성령강림으로 인하여 하루만에 3천명의 거듭난 성도들로 이루어진 ‘3,120명’에 이르는 대형교회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물론 교회 성도들이 늘어나고,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은 복음전파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위해 모두가 힘써야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늘어나면 날수록 자칫 목회자가 받는 유혹은 소위 ‘프로그램’으로 많은 교인들을 관리하고자 하는 영적 메너리즘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는 이 공동체의 중심에 말씀이 선포되고 가르쳐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영적 아들인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격려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 4:2)라고. 물론 주님의 몸이 건강하게 자라고 복음의 열매가 맺힌다는 관점에서,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공동체에 올바른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이 성도들에게 영적 각성과 바른 영향력을 주고 있는가는 더욱 더 중요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중심엔 살아 계신 주님의 말씀이 그분의 세우신 사도들로부터 날마다 선포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둘째, “서로 깊은 교제가 있었습니다: 사실 신앙공동체이든, 혹은 세상의 어떤 형태의 그룹이 되었건 그 모임이 발전하고 성공적이 되기 위해선 멤버 상호간의 끈끈한 유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들이 ~ 서로 교재하고 떡을 떼며”라고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밝히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성도들이 그 당시 함께 나눈 교제가 얼마나 깊고 사랑으로 충만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뒤에는 이렇게 더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뉘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행. 2:44~47a)라고.

어떤 분들은 이 말씀에서 보듯이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라고 했을 때, 이런 행태가 마치 ‘공산주의체제’처럼 개인의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 안에서 서로의 필요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고, 그러한 서로를 향한 구체적 관심과 섬김이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함께 나누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관용과 사랑으로 섬기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소외되고 가난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시듯, 하나님의 자녀들 또한 서로를 향한 관심과 사랑으로 섬겨 나가야 한다는 것이 성도가 교제함의 깊은 영적 핵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나눔은 단순히 물질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기심과 자아를 죽임으로 시간과 따뜻한 마음으로 옆에 있는 형제 자매에게 관심가지고 서로 다가가는 것이 더욱 깊고 풍성한 나눔임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이런 깊고 풍성한 교제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셋째, “기도를 힘쓰는 공동체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예루살렘교회’의 마지막 두드러진 영적 모습을 밝히고 있습니다.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언젠가 ‘존 파이퍼’목사가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것은 그분이 여러해 전에 신학생시절, 자신을 가르쳤던 한 교수님이 한가지 중요한 영적 상태에 대해 도전한 말씀입니다. “자기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 볼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신학관이 어떻게 기도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 도전의 뜻은 ‘내가 아무리 대단한 신학과 교리를 섭렵하고 남을 가르치기까지 한다 할찌라도 자신이 믿는다고 하는 말씀의 진리를 기도로 하나님께 그대로 아뢰고 기도로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 신학은 무용지물이라는 도전일 것입니다. 그 학생시절, 파이퍼 목사는 함께 신학공부 했던 아내와 매일 함께 기도하면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 시작 부분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9)의 기도와 마지막 부분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강력하게 우리의 영혼을 다스리고 복된 영향을 주는지를 직접 경험했음을 간증한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단지 파이퍼 목사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거듭난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기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요, 깊고 넓은 그분의 은혜의 바다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물론 우리 크리스챤이 말씀을 묵상하고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눔으로 교회를 이루어 가겠지만, 기도는 이 모든 것을 떠 받쳐주는 영적 기초석과 같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기도 가운데 영적 생명을 살찌우고 성장해 나가는 자양분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지 못한다면, 저는 단언컨대 여러분은 더 깊은 영적 진리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 가운데 성령께서 주시는 신령한 영의 젖 (벧전. 2:2)을 받아먹지 못할 때, 영적 생명은 간신히 유지할찌라도 결코 독수리가 창공을 치고 올라가는 영의 힘과 능력은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벧전. 2:2)고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기도 외에는 결코 진정한 주께서 약속하신 권능으로 육신의 질병과 악한 영과의 영적 싸움에서 싸워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의 권세는 누릴수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향한 중보기도로써 아름답게 연결되는 모습도 기도가 없을 때 찾아 볼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꿈꾸고 희망하는 믿음의 공동체는 어떤 모습입니까? 비록 이 지상에 아직까지 완벽한 교회는 완성되지 않았다 할찌라도 이것이 우리를 낙심시키거나 포기하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의 주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요, 주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그의 교회를 완성시켜 나가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 16:18)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직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을 향한 신뢰와 충성 그리고 서로를 향한 순전한 사랑이 아닐까요?!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의 작은 관심과 섬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생명을 전하는 아름다운 주님의 몸된 아포슬 공동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