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20, 2022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 (The Unity of The Spirit)

Preacher:
Passage: 에베소서 (Ephesians) 4:1~4
Service Type: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

(The Unity of The Spirit)

2-20-22

본문말씀: 에베소서 (Ephesians) 4:1~4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As a prisoner for the Lord, then, I urge you to live a life worthy of the calling you have received.)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Be completely humble and gentle; be patient, bearing with one another in love.)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Make every effort to keep the unity of the Spirit through the bond of peace.)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There is one body – just as you were called to one hope when you were called --)

[설교 요약]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4장을 시작합니다. 그것은 전반부 <에베소 1~3장>을 통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영적 진리으로 이해했다면, “그러므로” 이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 것인가를 사도는 후반부 <4~6장>에서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가 도전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 (v.1b)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복음의 진리를 적용하기 위하여 몇가지 사실들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 누가 부르십니까?: 오직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그분의 택하신 족속으로,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벧전 2:9).
  • 하나님은 누구를 부르십니까?: 하나님은 목회자나 선교자 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그의 자녀를 부르십니다. 이것이 ‘교회’의 헬라어 원어가 ‘에크레시아’ 곧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에 합당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성도들이 실천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2절에서 16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따라 행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무엇이 성령의 사역입니까?’

  • ‘거듭나게 하는 사역’ 입니다: 오직 물과 성령으로만 우리는 거듭나게 됩니다 (요. 3:5)
  • ‘은사를 주시는 사역’ 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은사’를 주셔서 혹은 목사로, 교사로, 병고치는 자로, 돕는 자로 세우셔서 교회에 유익을 끼치게 하는 것입니다 (고전 12:28).
  • ‘열매를 주시는 사역’입니다: 사도는 오늘 본문 <2~3절>에서 언급하는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과 평안으로 매는 줄로 하나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사역입니다.

사도는 <서로 하나되라>고 말하지 않고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라> (v.3)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성령으로만 겸손과 온유와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성령으로만 우리를 하나로 매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님의 하나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함께 자라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가 그 사람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게 될 때 동일한 행동이라 할찌라도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됨을 보게 됩니다. 이를테면, 책상 앞에서 오랜 시간 앉아서 책을 볼찌라도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이 뻔한 것입니다. 결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 공부가 하고 싶었으나 이런 저런 이유로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이제 시작하게 되어서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온 정신을 집중하여 공부한다면 그 결과를 여러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크리스챤의 삶도 이와 같지 않은가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벌받지 않기 위해, 천국 갈려고 마음에는 없으면서도 마지 못해 어쩔 수없이 하는 율법적인 신앙생활 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사랑을 점점 더 깨닫아 나감으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같은 ‘크리스챤’이라 불리지만 그 삶의 결과가 엄청날 것임을 저는 의심치 않습니다. 비교할 수 없는 ‘영적 열매’을 맺을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없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가 4장을 시작하며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도 바로 이런 ‘성도의 삶의 실천’이요 ‘영적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도전입니다.

사도는 에베소를 시작하면서 <1장>에서 <3장>까지 ‘우리 크리스챤이 누구인지?’를 영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바로 ‘교리’ (영적 진리)를 통해 밝힌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오늘부터 시작되는 에베소서 <4장>에서 이어지는 마지막 <6장>까지 그 교리를 ‘’실제적인 삶에 적용’할 것을 에베소 성도들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다시 한번 “그러므로”라는 <접속사/Conjunction>로 4장을 시작합니다.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사도는 <에베소 1~3장>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영적 진리를 통해 탁월하게 설명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우리를 그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 부르시고 하늘에 속한 것들과 땅에 속한 모든 것들을 교회로 통일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비밀이신, 예수의 사랑 안에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비하신 신령한 복을 풍성히 누려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속사람을 강건케 하시고, 주의 사랑을 우리 심령 가운데 뿌리내리게 하시고 날마다 자라나도록 인격적 결단함으로서 입니다. 이러한 영광스러운 성도의 신분을 영적으로 이해했다면, “그럼으로” 이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 것인가를 사도는 도전하는 것입니다. 전반부 3장은 ‘교리’이고, 후반부 3장은 ‘삶의 실천’입니다.

제가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신앙생활이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진정한 깨닫음으로 확신 가운데 하는 것이냐?’는 그 결과가 천량지차 일 것입니다. 사도는 에베소 성도들을 향해 ‘만약 성도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얼마나 복된 그분의 몸으로 지으심을 받았는지를 이해한다면’ “그럼으로” 이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영적 논리로 촉구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촉구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v.1)라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사도는 <3장>을 시작하면서 와 마찬가지로 <4장>을 시작하면서도 자신이 감옥에 갇힌 몸이 된 것을 다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갇힌 내가”라고. 그 뿐 아니라, 그는 이 편지를 마감하는 마지막 <6장>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6:20)라고. 바울은 왜 몇 번씩 자신이 감옥의 죄수가 된 것을 언급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가 강조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자신의 죄수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기뻐하고 영광스럽게 여길 것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방의 사도로써 세계의 심장부인 로마에 죄수의 몸으로 갇힌 것이 도리어 복음의 비밀을 편만하게 전하는 지름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수의 몸이 된 것이 어떤 자유의 몸으로 활동하는 사람들보다도 성령의 강력한 능력으로 구원의 도구로 주께서 사용하시는 지를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사도가 “그러므로”라고 선언하고 나서 에베소 성도들을 격려하는 구체적 내용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v.1)라고 그는 말합니다. ‘너희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사도는 성도들을 도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살펴볼 것은 첫째 ‘에베소 성도들은 누구의 부르심을 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가 우리를 부른 존재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은 언제나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를 부르십니까?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할 때, 흔히 ‘신학교’를 가거나 ‘사역자’가 되고자 결심할 때, ‘저는 부르심 (calling)받았습니다’ 라고 말하곤 합니다. 마치 평신도로 살아가는 것은 ‘부르심’을 받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들을 어떤 교회나 선교를 위한 특별한 사역자가 되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구원받은 성도를 본질적으로 ‘부름 받은 자’라고 말씀함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성도들에게 편지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여기서 너희는 특정 교회리더가 아니라, 모든 교회성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6)라고 사도는 고린도 성도 모두를 향해 ‘하나님께서 너희를 부르셨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 사역자나 교회 리더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예배에 함께 참석한 우리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존재임을 이해하십니까?

그리고 두번째로는 사도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라고 했을 때 “합당하게”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합당하게” (worthy)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악시오스>인데 ‘저울 추가 평형을 이룬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적당하게 어울리는 태도’가 ‘합당하게’라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가 되어 복음의 진리를 증거할 수 있는 놀라운 존재로 부르셨음을 깨닫는다면, 이제 우리는 저울 추가 평형을 이루듯 이 신분에 걸맞는 태도로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사도는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극히 마땅한 바라고 사도는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갈 것’을 1절에서 격려하고나서, 이어지는 <2절>에서부터 <16절>에 이르기까지 무엇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인지를 한걸음 더 구체적으로 묘사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의 편지의 구성은 로마서, 빌립보서, 갈라디아서 등 대부분의 그의 서신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전반부에서 영적 원리 곧 교리에 대해 설명하고 나서, 후반부에 그 원리 (=교리)에 합당한 실천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는 오늘 본문 <2절~4절> 그리고 계속해서 <16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성도로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영적으로 풀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2~16절>의 주제를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으로 잡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16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에서 사도는 무려 9번씩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있기에 에베소서의 전체주제가 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만물이 통일된다’는 엄청난 역사가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그분의 몸이 된 교회 안에서 여러분과 제가 하나로 연결되게 하시는 분이신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의 탁월하고도 영광스러운 사역인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놀라운 사역이 이어지는 16절까지 이어지는 4장 전반부의 내용인 것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v.2~3)고 사도는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가 여기서 언급하는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사랑 가운데서 용납하고 평안으로 하나되는 이 모든 귀한 덕목은 사실 우리 스스로가 노력한 만큼의 결과물이 아니라, 성령의 강력한 사역인 것입니다. 이것은 에베소 1장을 시작하면서 사도가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 1:13)라고 선언한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이루신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의 은혜를 이제 성도들의 삶 가운데서 성령의 인치심으로 삶에 적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확실하게 도장을 찍으셔서 우리의 육신의 소욕에 이끌려 가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도록 강력하게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령의 사역입니까? 물론 성령의 가장 첫번째요 중요한 사역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일 것입니다. 주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고 말씀하셨듯이, 성령이 아니고는 그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역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두번째로 성령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에서 계속적으로 절대적인 사역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은사’ 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의 구체적으로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사역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주는 말씀의 하나가 <고린도전서 12~14장>일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다양하게 ‘사도로, 선지라로, 교사로, 능력을 행하는 자로, 병고치는 자로, 그리고 각종 방언을 말하는 자로 성도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고전. 12:28~30). 그리고나서 그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 12:31)라고. 그리고 나서, 그 유명한 ‘사랑 장’이라 불리어 지는 <고전 13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각종 다양한 성령의 은사들을 그의 뜻을 따라 성도들에게 주시지만, 그 어떤 은사 보다도 중요하고 또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은사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의 은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분별해야 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일반적인 성령의 은사들’, 즉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행하는 자, 병고치는 자, 방언하는 자들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들은 말 그대로 ‘선물’ (gift)로 주신 것으로서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서로 다양하게 영적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엡. 4:11~12). 모든 성도가 동일한 은사를 받는 것이 아니요, 각자가 서로 다른 은사들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본질적으로 이런 은사와는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행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그런 것이 아니라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많은 신학자들은 ‘사랑은 다양한 종류의 성령의 은사중의 하나’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로 불리어져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성령의 열매입니까?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성령의 열매로서 사랑을 비롯한 ‘기쁨과 평화와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선함과 신실함’과 같은 인격의 모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고 사도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언급하는 것들 곧 “모든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 사랑으로 용납 그리고 평안의 줄로 하나되는 것”은 우리 성도들의 인격 가운데서 맺어 나가시는 <성령의 열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잘 말해주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도 각자의 다양성과 기질에 따라 서로 다른 영적 능력 (=선물)을 성령께서 그 뜻대로 주시는 것’이라면,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 성도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반드시 추구하고 맺어 나가야 할 영적 열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각자가 오늘 말씀에 묘사된 “겸손과 온유, 사랑으로 오래 참음과 서로 용납”이라는 성령의 참된 열매를 맺어 나가고 있다면, 우리 교회는 반드시 평화의 매는 줄과 같은 성령으로 하나되는 통일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사도는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곰곰히 묵상하는 가운데 지난 주 큐티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우리 주께서 십자가의 임박한 죽음을 앞두시고 이렇게 그의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 13:34)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주께서 ‘내가 너희를 권한다’ 혹은 ‘당부한다’라고 말씀하지 않고, ‘계명을 준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명령한다’ (I command you)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요? “서로 사랑하라” (Love one another)는 것입니다. 저는 성령께서 우리 주님의 몸된 성도 한사람 한사람을 하나되게 하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 것인지를 가장 핵심적으로 밝혀주는 것이 주께서 그분의 제자된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명령하신 “서로 사랑하라”에 있다고 이해합니다. 우리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점점 더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그 귀한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맺어주시는 사랑의 열매인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서로를 사랑함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5)고 사도는 선언합니다. 성령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되게 하심을 통해 함께 그리스도의 몸으로 자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내가 죄 지으면 하나님께 벌받을까 봐 무서워서 마지못해 신앙생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복음의 진리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을 더욱 더 깨닫아 나감으로 감격과 기쁨 가운데 신앙생활하고 있습니까?’ 바라기는 예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더 깊이 뿌리내림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우리 아포슬 공동체 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안에는 이 사랑이 없지만, 성령 안에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함으로 함께 자라가는 주의 몸된 공동체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