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22, 2018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 (Faith that the world cannot afford)

Preacher:
Series:
Passage: 히브리서 (11:38~40)
Service Type: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

(Faith that the world cannot afford)

7-22-18

본문말씀: 히브리서 11:38~40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 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 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서 론>

저는 지난주 성도 여러분과 함께 무엇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 인지를 함께 살펴 보았습니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 를 ‘주’ 로 고백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것을 믿는 믿음’ 이라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9,10>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 이라는 제목으로 성도 여러분과 은혜를 나누길 원 합니다. 누가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을 소유한 사람일까요? 그는 바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 가운데 계속해서 영적으로 성장하고 주님을 날마다 따르는 자’ 일것 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아포슬교회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그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믿고 그의 제자로 살아 감으로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주의 제자로 승리하는 삶 살아갈수 있기를 소망 합니다.

<본 론>

오늘 본문이 포함된 <히브리서 11장> 은 우리가 잘 아는데로 ‘믿음장’으로 유명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 11장에서 우리가 인정할수 있는 모든 믿음의 용사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 명단에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아벨에서 시작하여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뿐 아니라 요셉, 모세, 기생 라합과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같은 믿음의 거장이 총 막라되 있습니다. 이런 이름들이 다 열거되고 난 다음에 히브리서 기자는 <33~40절> 까지에서 이들은 어떤자들 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고 약속을 받기도 하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였다는 것 입니다. 또한 이들은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더 나아가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이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을 받았다는 것 입니다. 기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이 당한 불의 시험을 계속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아 다니며 배고픔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히. 11:33~37> 까지의 내용인 것 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다)’ (v.38a) 라는 것 입니다. 어떤 한 목사님은 오늘 본문말씀을 설교하면서 크리스챤은 2 종류로 나눠 지는데 한 그룹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고, 다른 한 그룹은 ‘세상을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 이라는 것 입니다. 그 밖의 그룹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그냥 가만히 놔두는 크리스챤은 없기 때문 입니다. 세상이 여러분에 의해서 패배 하든지, 아니면 여러분이 세상에 의해 패배 하든지 둘 중 하나인 것 입니다. 한글로 본다면, 조사 ‘이’ 와 ‘을’ 의 작은 차이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가 되는 것 입니다. 세상이 도저히 감당할수 없는 사람인가? 아니면 세상에 의해 완전히 지배당하는 사람인가?의 엄청난 차이인 것 입니다. 여러분이 크리스챤으로 합당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누구도 ‘세상을 감당히 못하는 그런 무기력한 크리스챤’으로 살아가길 원치는 않을 것 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진실은 만약 여러분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가 되지 못할때, 여러분은 세상을 감당치 못하는 세상에 지배 당하는 자로 살수 밖에 없다는 불편한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 입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의 믿음장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이 바로 그것일 것 입니다.

이제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어떻게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으로 살수 있을까?” (How do we live by the faith that the world cannot afford?) 를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세상의 핍박에 넘어지지 않는 믿음으로 사는 것’ (We can live by the faith that world’s persecution cannot afford) 입니다: 말할것도 없이 하나님 없는 세상은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 크리스챤들을 미워 합니다. 할수만 있다면 모든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서 예수 믿는 자들을 괴롭히고 핍박하는 것 입니다. 왜일까요? 그 목적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떠나게 하고자 하는 것 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히브리서 11장> 에서 언급된 그 수많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 믿음을 소유했던 자들은 구약의 성도들 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39,40절) 에서 보드시, 그들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새언약’ 의 약속을 받지 못했고 더 좋은 것을 하나님께서 예비 하신 온전함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이들은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을 통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삶을 감당했던 것 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 자들이었던 것 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으로 인해 구약의 성도들이 겪었던 엄청난 핍박은 희롱과 채찍과 결박과 옥에 갇힘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의 죽음과 짐승 가죽을 입고 떠돌아 다니며 배고픔과 환난과 학대를 받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실로 심한 핍박 입니다. 이 핍박과 고난은 또한 신약시대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한 성도들이 받았던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임을 우리는 잘 알수 있는 것 입니다.

제가 이 시간 성도 여러분에게 한가지 질문하기 원하는 것은 이것 입니다. 과연 이런 극심한 고난이 여러분에게 닥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답은 아무도 알수 없다는 것 입니다. 베드로에게서 보듯이 주님을 향해 죽기까지 충성을 맹세했던 그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서 한 계집종의 말에 겁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 합니다. 누구도 미래를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용사들 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신실한 성도들, 바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으로 살았던 성도들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진리는 그들의 현재가 미래를 증거해 주었다는 것 입니다. 다시말해, 먼 훗날의 삶을 다짐하고 맹세할수는 없다 할찌라도, 현재 내게 주어진 ‘믿음의 싸움을 나는 어떻게 싸우고 있느냐?!’는 것 입니다. 현재 나는 나의 현실적인 작은 이익이나 편리함 그리고 즐거을 놓치기 싫어서 믿음으로 사는 길을 주저하거나 연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현재의 작은 핍박과 아픔을 피하고자 신앙의 양심을 저버리지는 않습니까? 믿음으로 승리했던 우리의 선배들은 언제나 현재를 지켰습니다.현재의 핍박 앞에 무릎을 꿇치 않았습니다. 내일이 아니고, 내년이 아니라, 오늘 주어진 ‘선한 싸움을 회피하지 않고, 세상과 부딛쳐 싸워 나갔던 것’ 입니다. 이런 자에게 주님은 그의 영 성령을 통해 장차 닥쳐올 어떤 불의 시험 가운데서도 넉넉히 이길 힘과 용기를 주시는 것 입니다.

둘째,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믿음으로 사는 것’ (We can live by the faith that world’s temptation cannot afford)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현재 신앙생활 함으로서 세상으로 부터 어떤 심각한 핍박을 겪고 있나요?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미국이나, 조국 한국에서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어떤 심각한 핍박이나 차별대우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볼수 있습니다. 물론, 현재까지도 기독교가 심각하게 탄압 받는 공산국가나 모슬렘 국가는 예외일 것이지만 말입니다. 따라서, 성도 여러분 중에는 세상으로 부터 받는 핍박이니, 고난이니 하는 말을 듣게 되면 전혀 나의 얘기가 아닌 남의 얘기처럼 들릴수 있음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그의 마지막 편지를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쓰면서 밝혔드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 3:12) 고 선언한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것 입니다.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핍박이 있을 것이란 사실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진리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것 입니다.

우리는 400여년 전에 오늘 히브리서 본문을 주석했던 탁월한 주석가 <메튜헨리>의 다음과 같은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에 얼마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있었고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굳건 했는가를 생각 할때마다 기뻐해야 할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믿음의 법도가 완전하고 확실하게 드러난 복음의 시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에 비하여 믿는 자의 수효가 너무나 적고 믿음도 또한 연약함을 보고 슬프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할것이다.” 라고 말 입니다. 400여년이 지난 오늘날이 메튜헨리가 살아 있을 당시보다 더욱 믿음에서 굳건하여 지고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우리가 한가지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오늘날 특별히 <미국이나 한국, 그리고 여러 서방 자유국가에서 살아가는 크리스챤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성경에서 고발하는 핍박과 고난은 없다>고 여긴다는 점 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핍박이 있습니다. 그 핍박은 어디서 부터 오는 것일 까요? 그것은 바깥에서 부터 오기도 하겠지만, 더 크고 강력한 것이 내 속에서 부터 오는 것 입니다. 왜 기독교가 보장되고 자유를 만킥하는 미국과 한국에서 점점 더 믿음이 식어가고 있을까요? 외부적인 핍박 때문 입니까? 아닙니다. 내부적인 유혹 때문 입니다.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자, 사단 마귀는 결코 바보가 아닙니다. 때에 따라서 믿는 자를 실족시키는 강력한 무기는 칼과 죽음의 위협 보다도 달콤한 유혹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습니다. 돈맛을 알면 서서히 그 사람이 부패해 가드시, 사단은 내 속에서 ‘그렇게 고지식하게 살지마라, 너만 잘 믿냐, 너도 풍요로운 삶을 살수 있다’ 고 유혹 합니다. 그는 ‘십자가를 거부’하게 만듭니다. ‘신앙의 양심’ 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막연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우리의 믿음을 서서히 침체에 빠트립니다. 이것이 가장 강력한 21세기의 성도들을 향한 핍박임을 우리는 깨닫아야 합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내 내면의 육신의 소욕과 악한 영들의 유혹을 깨닫아 물리쳐야 하는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성도의 믿음이기 때문 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알아가는 믿음으로 사는 것’ (We live by the faith to know God) 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장, 11장을 전개해 나가면서 무엇이 <믿음의 정의> 인지를 이렇게 선언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1) 라고 말 입니다. 이것을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물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 입니다” 라고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이 이런 역할을 할수 있는가?’ 를 아주 짧고 간결하게 <3절> 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 라고 말 입니다. 이것이 전부 입니다. 그리고 나서, 히브리서 기자는 <4~ 37절> 까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감당치 못한 사람들을 구체적인 보기를 들어가며 설명하고 있는 것 입니다. 도데체 믿음이 무엇이기에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삶을 살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해서 이 <믿음장> 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 의 설명은 사실 의외로 간단 합니다. 바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알게 (된다)” 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의 내용이 무엇 입니까? 그것은 ‘성경의 하나님이 유일한 창조주이심을 믿는다’ 는 것 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은 무였고, 하나님께서 그 무한하신 능력의 말씀으로 유를 창조하셨다’ 는 것을 믿는 것 입니다. 보이는 물질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 없이 만들어 진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믿는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을 소유하기 원하십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이 믿음 갖기 원한다면 무엇이 필요 할까요? 더 많은 성경공부와 더 많은 기도와 헌신… 그것 일까요? 그것이 결코 필요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내 믿음과 함께 성장해 나가야 하는 것 입니다. 그러나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는 것 입니다. 더 이상 미룰 필요가 없는 것 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과 저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알게 되는’ 믿음인 것 입니다. 이것이 전부 입니다. 이 하나님에 대한 순전한 믿음 입니다. 이 믿음은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이 믿음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고, 약속의 아들 이삭을 드리고자 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이 믿음은 어떻게 내가 존재하게 되었고, 죽을수 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구원 받은것에 만족하지 않고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을 바라보고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현재 주어질 고난과 핍박을 이기고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복되고 소망스러운 삶인지를 놀랍게 설명해 주는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런 놀라운 하나님을 알아가는 믿음을 소유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이 믿음이 여러분을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승리의 삶으로 반드시 인도할 것 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인자가 올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 18:8) 고 말씀 하셨음을 우리는 기억 합니다. 점점 더 믿음이 식어가는 세상이기 때문 입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들이 ‘세상을 감당하지 못하는 연약하고 침체된 믿음’으로 살기를 원치않고,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살아 있는 믿음’ 으로 살기를 소망한다면, 더 많은 성경공부와 헌신과 기도를 드릴때 까지 더 이상 기다리고 지체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지금‘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 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지어진 줄을 알았다면, 그 믿음이 여러분과 나의 어떤 노력이나 행위 이전에 그의 능력과 선함으로 죄와 사망과 사단의 능력을 이기고 반드시 승리할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 입니다. 지금 이 선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늘 하루를 그 믿음으로 적용하고, 믿음으로 증명하고, 믿음으로 증거해야 하는 것 입니다.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입니다. 이렇게 오늘 하루를 하나님을 믿는 온전한 믿음으로 싸워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기대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허락된 남은 날들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세상이 어찌할수 없는’ 하나님의 장성한 자녀의 삶을 사시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