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3, 2022

“세월을 아끼라” (Making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Preacher:
Passage: 에베소서 (Ephesians) 5:15~16
Service Type:

“세월을 아끼라”

(Making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4-3-22

본문말씀: 에베소서 (Ephesians) 5:15~16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하여 (Be very careful, then how you live—not as unwise but as wise,)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making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because the days are evil.)

[설교 요약]

사도는 오늘 말씀에서 “지혜 있는 자 같이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성도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지혜로운 덕목의 하나로서 “세월을 아끼는 것”이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무엇일까요? 잠언서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 9:10)라고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출발점이요, 하나님을 알아 나가는 것이 지혜의 근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까지 여러분이 동의하신다면, 이제 남은 말씀은 더욱 분명할 것입니다. 사도는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이 성령의 도우심과 은혜로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가기 원한다면 그 무엇보다도 세월을 아끼야 만 합니다’고 사도는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가 도전하는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은 <KJV>에 “redeeming the time”입니다. 곧 ‘시간 (=기회)을 돈을 주고 되찾아라 (사라)”는 뜻이 됩니다. 이 말씀은 ‘시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그분의 뜻에 따라 사용해야함을 뜻합니다.

만약 이제까지 내가 시간을 허비하였다면 나는 갑절로 부지런히 노력함으로써 그 잃어버렸던 시간을 되찾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월을 아끼는 이런 지혜로운 성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출발점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적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합니다. 이것이 사도가 오늘 본문 바로 앞 14절에서 성도에게 촉구하는 바입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v.14)고.

사도는 우리 크리스챤이 예수 믿고 영적으로 출생한 것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깊은 영적 잠에서 깨어나 그리스도의 빛으로 세상을 밝히는 진정한 빛의 자녀가 되어야 함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뜻이요, 우리를 빛의 자녀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인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영적 각성’을 통해 영원하신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세월을 아껴 나가는 지혜로운 빛의 자녀들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지혜’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오늘 말씀에서 “지혜 있는 자 같이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성도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지혜로운 덕목의 하나로서 “세월을 아끼는 것”이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지혜롭지 못하게 살아가고 있는 성도가 많은지를 도전하는 말씀은 아닐까요? 역설적으로 ‘세월을 아끼고, 허비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크리스챤이 결코 많지 않음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함께 살펴본 대로 사도는 5장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자고 격려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본받는 그 구체적인 삶을 “빛의 자녀가 되라”는 말로 도전하였습니다. 사실 사도는 8절에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성도를 도전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빛의 열매인지? 그리고 무엇이 빛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어둠에 참예하는 것인지를 13절까지 이어지는 본문에서 밝히고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는 이렇게 14절에서 여전히 어둠에 거하는 성도들을 향해 외치는 것입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v.14)고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는 오늘 말씀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v. 15-16)고. 제가 지난 주에 말씀드렸듯이 <에베소서 말씀>은 이제 5장을 들어서면서 말씀을 서서히 마무리하는 후반부의 국면에 들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다시 한번 주의를 환기시키기 원하는 것은, 모든 성경이 그러하지만, 특별히 사도 바울의 말씀은 깊은 영성은 말할 것도 없을 뿐 아니라 매우 조직적이고 논리적이어서 그 말씀의 의미를 따로 때내어서 해석할 때는 전혀 엉뚱한 해석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서신서를 공부해 나가면서 취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방법의 하나는 사도의 ‘영적 논리의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럼으로’나 ‘그런즉’ 이라는 접속사로 연결되는 <앞의 말씀>과 <뒤의 말씀>을 논리적으로 이어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계속해서 기억해야 할 한가지 사실은 5장의 주제가 되는 “빛의 자녀답게 행하라”는 그의 도전은 오늘 말씀에 있어서 여전히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왜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해야 하는지?” “왜 어리석은 자처럼 살아서는 안되고, 오직 지혜 있는 자와 같이 살아야 하는지?” 하는 근거 (출발점)이 ‘너희는 하나님의 빛된 자녀이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빛된 자녀의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성도의 미션이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 (=논리적 흐름)을 이해했다면, 이제 생각해 보기 원하는 것은 사도가 말하는 ‘지혜 있는 자’ (the wise)가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제가 말씀을 시작하면서 ‘지혜’의 사전적 개념을 말했는데, 성경은 지혜를 무엇이라고 정의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성구사전에는 ‘지혜’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아는 지식으로써, 따라서 무엇이 진리인지 혹은 거짓인지를 기초로 하는 것이다. 이 지혜는 하나님의 특성(=성품)과 성령의 은사(=선물)을 의미한다” (사. 11:2; 엡. 1:17)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이 지혜는 인간의 자질과 능력을 넘어선, 하나님의 성품이요 성령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기에 성경은 이 점에 있어서 결코 모호하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분명하게 누가 지혜로운 자인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말씀의 하나가 잠언 9장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 9:10)라고. 그렇습니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출발점이요,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아 나가는 것이 명철함이라고 선언하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시편에 보면, 지혜에 관련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런 말씀을 보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 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 14:2-3)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 인간의 연약함과 죄성을 말합니다.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단 한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스스로 지혜를 선택하지 못하는 본질적인 한계를 드러내는 말씀인 것입니다. 설령 머리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천사처럼 잘 이해한다 할찌라도 결코 그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치우쳐 악을 택하고야 마는 어리석은 인간의 본질인 것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인간 스스로의 능력(노력)으로 하나님께로 부터 ‘지혜롭다’고 평가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잠언서에서 ‘지혜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진리와 시편의 ‘모든 인간은 스스로 선을 택하는 지혜로운 자가 단 한명도 없다’는 사실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 것일까요? 이 둘은 어디에서 만나서 인간 안에서 행해질 수 있는 것일까요?

그 대답은 사도가 에베소서를 시작하면서 선언했듯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1:4-5). 이것이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보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빛된 아들과 딸로 택하심으로’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지혜는 세상 철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혜도 아니요, 오랜 인생을 살아감으로서 얻게 되는 지혜도 아니요, 그 어떤 인간의 노력과 연구의 결과물이 아니요, 오직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으로 그분을 경외하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지혜를 얻고자 하는 마음을 성령을 통해 주시지 않으면, 이 지혜 얻기는 불가능 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구원받은 성도만이 성령을 통해 가질수 있는 지혜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는 4장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4:30)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여러분이 이해하시고 동의하신다면, 이제 남은 말씀은 더욱 분명할 것입니다. 사도는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이 성령의 도우심과 은혜로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가기 원한다면 그 무엇보다도 세월을 아끼야 만 합니다’고 사도는 도전하고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원어성경에 가장 가깝게 번역된 <KJV>은 “redeeming the time”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직역하면 “시간 (=기회)을 돈을 주고 되찾아라/ 사라”는 뜻이 됩니다. 이 표현은 사도 바울 당시, ‘상거래나 무역하기 위한 적절한 때를 부지런히 살펴서 잘 이용하는 상인들이나 무역업자들’로부터 취한 (빌려온) 은유법인 것입니다. 이것은 선한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시간을 아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그분의 뜻에 따라 사용되어져야만 귀한 결과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제까지 우리의 시간을 허비하였다면 우리는 갑절로 부지런히 노력함으로써 그 잃어버렸던 시간을 되찾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세상이 우리의 시간을 앗아가고자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월을 아낀다’ 혹은 ‘시간을 아낀다’는 이런 정신자세에 있어서는 솔직히 말해 하나의 밖으로 드러난 행동만으로 보자면, 교회 다니지 않는 세상사람들 중에서 더욱 열심인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은가 하고 저는 이해합니다. 가만히 보면, 자신이 스스로 세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월별로 달별로 중간평가를 하고, 하루동안 시간단위로 자신을 점검하고 엄격하게 채찍질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시간을 아끼는 끝판 왕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심지어 크리스챤들 조차도 은근히 부러워하고 내심 따라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계획을 실천하고자 평상시 말씀보고, 큐티하고, 기도하는 시간도 아까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일날 예배오는 것조차도 시간사용의 이유로 부담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결코 성경에서 말씀하는 ‘시간을 아낀다’는 의미가 아님을 성도 여러분은 아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여기에 우리 성도가 놓치지 말아야 할 성경의 중요한 진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성도가 ‘시간을 (세월을) 아끼기 위해선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 각성’입니다. 이 ‘영적 각성’이 우선되어야 세월을 아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지금 세상사람들, 곧 불신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성도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믿는 성도가 시간을 아끼는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영적 각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사도의 <롬. 13장>말씀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롬. 13:11-12)고 말입니다. 앞서 14절을 통해 잠깐 살펴봤듯이 사도는 깊은 영적 잠에 빠진 성도들을 향해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v.14)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것입니다. 빛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찬란한 빛을 비춰 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사도는 로마서에서 무엇이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는 것인지를 계속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13-14)라고. 제가 지금 성도 여러분과 확인하기 원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사도는 과연 무엇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아끼는 지혜로운 자의 삶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않고 음란하지 않고, 다투거나 시기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음으로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고) 낮에 와 같이 단정하게 행할 수 있는 삶이 시간을 아끼는 삶이요, 지혜로운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세상에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이 결코 흉내 내거나 본받을 수 없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을 따라 깨끗하게 행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는 삶이 어리석게 보이고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결코 대단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음이 이방인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이고, 유대인에게는 걸림이 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오직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빛된 자녀가 된 자들에게는 이것이 지혜로운 삶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으로 인해 그런 지혜로운 삶을 다 살아가지는 못한다 할찌라도 이것이 복된 삶임을 깊이 인식하고 그렇게 살아가길 열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자요, 복 있는 자인 것입니다. 모세는 시편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자신의 남은 날을 계수하여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 (시. 90:12)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지혜의 마음 주실때만이 우리는 진정으로 세월을 아낄 수 있고, 이 악한 세상에서 영원한 진리와 생명의 은혜를 건져 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기 원합니까? 여러분 자신이나 세상 사람으로부터 인정받는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지혜의 삶을 말입니다. 만약 이런 지혜로운 삶을 원하신다면 “세월을 아끼십시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남으로 값을 지불하고 시간을 사십시요. 이와 같이 지혜롭게 죄악된 세상 가운데서 시간을 건져 올림으로서 영원토록 변치 않는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의 복을 날마다 누려 나가는 빛된 자녀들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