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6, 2023

“순교자” (The Martyrs)

Preacher:
Series:
Passage: 요한계시록 (Revelation) 6:11
Service Type:

“순교자”

(The Martyrs)

8-6-23

본문말씀: 요한계시록 (Revelation) 6:11

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Then each of them was given a white robe, and they were told to wait a little longer, until the full number of their fellow servants, their brothers and sisters, were killed just as they had been.)

[설교 요약]

우리는 지난시간, ‘죽지 아니하면’이란 제목으로 주께서 ‘한알의 밀알’을 통해 도전하시는 ‘죽어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죽어짐’은 먼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수없이 많은 생명을 살리시는 것이요, 또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으로 감당해야 할 죽음’인 것입니다. 바로 날마다 자신의 ‘자아’ 곧 ‘자기생명’을 성령님을 통해 십자가에 목박음으로서 우리는 주께서 약속하신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한편 이런 우리 크리스찬의 죽어짐의 클라이막스는 ‘순교’일 것입니다. ‘순교자’의 사전적 의미는 “죽음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는 사람” (One who witnesses to beliefs by dying for them)인데, 이 순교자의 삶은 주께서 선언하신 ‘죽을 때 다시 살게 되는 기독교의 역설적인 생명’을 믿음으로 증거한 가장 충성된 제자의 삶인 것입니다.

먼저 현실적인 의미에서 여러분과 제가 과연 순교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산다고 할찌라도 성경이 우리에게 선언하는 십자가의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놓쳐서는 않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그의 영적 아들인 디모데에게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 3:12) 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한사람도 예외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 안에서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 이런 핍박이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18~19)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그를 미워하기에 그에 속한 우리 성도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주님의 의로우신 심판날까지 말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죽음으로 주님을 향한 순결한 믿음과 사랑을 증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충성된 순교로서 참된 믿음을 증명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이 오지 않을지라도, 중요한 것은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영화롭게’하고 거룩한 산제사로 주님 만나는 날까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순교자적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시간, ‘죽지 아니하면’이란 제목으로 주께서 ‘한알의 밀알’을 통해 도전하시는 ‘죽어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죽어짐을 예수님은 바로 ‘십자가’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주님자신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어지는 한 알의 밀알 되심으로 수없이 많은 생명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또한 이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그분의 제자된 우리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를 것’을 도전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는 우리 각자는 그분께서 보여주신 본을 따라 우리도 ‘죽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될 때 비로소 그분의 약속하신 많은 열매를 거둘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내가 죽지 않을 때 결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순교자라는 제목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참된 승리의 삶은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 열매는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고 깨닫아 나가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겪는 수없이 많은 유혹과 핍박에 맞서 싸워 이기고, 약속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의 포함된 <계시록 6장>에서는 봉인된 두루마리의 일곱인 중에서 ‘여섯 인’이 각각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부활하신 주께서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는 사도 요한에게 계시로 보여 주시는 내용입니다. 그 인 중에서도 다섯번째 인에 관한 내용이 <9-10절>말씀입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계. 6:9~10)라고. 여기서 “그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정절을 지키고자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인 것입니다.

이 순교자가 곧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 순교자들은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주께 신원하는데, 이때 주님의 응답이 오늘 본문말씀인 것입니다.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v.11) 라고. 여기서 알 수 있는 분명한 한가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주가 되셔서 재림하시기까지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순교자의 수가 충만하게 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 숫자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의로운 심판과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도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순교자의 희생’ 곧 ‘순교자의 흘린 피’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기독교회 2천년의 역사는 곧 ‘순교자의 흘린 피 위에 새워진 교회의 역사’라고 많은 신도들이 선언하는 이유도 그기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저는 먼저 ‘무엇이 순교자인지?’를 성구사전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순교자’의 사전적 의미는 “죽음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는 사람” (One who witnesses to beliefs by dying for them)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영어로 ‘martys’이 된 것은 헬라어 <martyr/ 마르티르>에서 온 것인데, 이것은 <증인/ 증거인>이라는 뜻을 가진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계. 6:9>에서 성도들이 순교한 이유를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 때문이라고 말한 것과 일치하는 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선포하게 된 증거로 인하여 그들이 순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저는 공산권국가나 중동국가와 같은 기독교를 박해하는 국가를 제외하고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 미국이나 한국 혹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순교 당하는 경우는 적어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교자’라는 개념에서 우리는 먼저 ‘무엇이 진정한 순교의 정신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나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내 삶을 통해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고 있는가?’하는 것이 순교자와 배교자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성도 여러분이 이런 증인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머지않아 핍박을 당하게 될 것임을 성경은 선언하고 있음을 여러분은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보내는 그의 마지막 편지에서 이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 3:12) 기독교를 핍박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기독교 탄압국가에 내가 살고 있는가, 아니면 표면적으로는 기독교신앙이 보장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아가는 가가 실제적인 영적 시각에서 볼 때는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의 순결을 가지고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 반드시 핍박이 찾아오고, 경우에 따라서는 순교나 혹은 순교에 버금가는 역경이 찾아올 것을 일깨우는 사도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임을 저는 믿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본질적으로 우리 크리스챤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그리고 이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사단 마귀는 예수님을 대적하고 미워하기 때문에 그분께 속한 우리 성도들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매우 분명하게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18~19)고 말입니다.

이제 저는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첫 순교자인 ‘스데반 집사’에 대해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6~7장을 읽어보면, 예루살렘교회에서 처음으로 선출된 일곱집사 중 한명인 스데반 집사가 행한 행적을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예루살렘의 유대종교의 대표적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내용이 6-7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그는 이 한편의 설교를 통해서 구약성경의 핵심을 관통하고 지나갑니다. 특별히 유대민족의 실제적인 조상으로 간주되고, 우리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 칭해지는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셔서 복의 근원으로 삼을시고,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인도하셔서 그 후손 이스라엘민족으로 언약백성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종들을 핍박했고, 성령을 거역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죽였다고 고발했습니다. 그 말을 듣던 유대종교지도자들은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그때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했는데, 그들은 귀를 막고 그에게 달려들어 돌을 들어 쳤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이와 같이 한편의 설교를 하고 돌에 맞아 죽음으로 기독교교회 역사에서 첫 순교자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스데반집사의 순교의 사건을 보면이것이 한마디로 ‘성령께서 강력하게 개입하신 성령충만의 사건’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스데반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절대절명의 상황 속에서 그가 얼마나 인간의 성정과 인성을 초월하여 충만한 성령의 사람이 되었는지를 그의 이 마지막 한 마디 말에서 잘 나타내 줍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행. 7:60)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스데반의 이런 자신을 죽이는 살인자들을 위한 하나님께 그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는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불가능한 기도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기도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가실 때, 자신을 못박았던 로마 군병들과 또한 희롱하고 침뱉았던 우매한 군중들에 대한 하나님께 간구와 용서의 기도일 것입니다. 주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눅. 23:34)고 말입니다.

저는 얼마전에 우연히 미국인이었다가 귀화하여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요한>형제의 간증을 듣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구한말에 시작하여 몇대째 한국땅에서 선교를 이어온 미국 선교사의 후손으로서 한국 교계와 의학계에서는 상당히 알려진 인물로 저도 여러 해전에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번 간증에서 핵심은 ‘손양원목사’의 삶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난 청년시절을 거쳐오면서 많은 방황을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돌아온 탕자’같은 삶이었다고요. 그는 한때 불교 경전이나, 도교의 책에 심취하기도 하면서 소위 진리를 찾아 여러 곳을 헤매고 방황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날 그곳에는 진정한 구원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불교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신이 되계사는 것이니 그것은 아닌 것 같고, 도교나 유교 등은 인간의 가치기준을 넘어설 수 없음을 그는 인식하고, 오직 기독교만이 인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계시하는 구원의 종교임을 그가 깨닫고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는 과정에서 ‘손양원목사’의 삶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신학적 논증이나 이론이 아니라, 한사람의 진실한 크리스챤의 삶속에 역사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가 목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도 잘 아시는데로 손양원목사님은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함으로 혹독한 투옥생활을 겪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북한군인을 용서할 뿐 아니라 자신의 양아들로 삼음으로서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인간이 앓는 병중에서 가장 끔직한 병으로 불리는 한센씨병, 혹은 나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하는 ‘애양원’에서 손목사는 그들을 섬겼습니다. 일화에 의하면, 환자들의 흘러내리는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내고 보살펴 주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손목사는 6.25사변때 결국 북한군에 의해 고초를 당하다가 순교 당했습니다. 이런 손양원목사의 용서와 희생의 삶, 그 무엇보다도 주님의 제자로서 그가 믿는 바를 한명의 증인으로 실천했던 그 원자탄 같은 성령의 삶이 인요한이라는 방황하던 영혼을 주께로 돌아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한 알의 죽어지는 밀알의 삶을 통해 무엇이 진정한 기독교인지? 참된 기독교의 생명과 진리는 그 어떤 세상의 핍박과 죽음의 위협에도 꺽이지 않고, 승리하며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실천한 조선의 신실한 주님의 제자의 삶을 통해 ‘푸른 눈과 금발’의 형제가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서 살펴본 것처럼 <순교자>란 ‘죽음으로써 자기의 믿음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여러분과 저는 과연 순교자가 될 순간이 올지 어떨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런 순교의 순간이 온다면, 주를 향한 사랑과 충성으로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두손 모아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이 설혹 오지 않는다 할찌라도,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그리고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우리 각자가 분명히 선택할 삶이 있음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순교자적 삶’인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의지와 결심 이전에 성령의 충만하신 도우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삶입니다.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과 수없이 많은 초대교회성도들 그리고 손양원목사와 지금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를 향한 순결한 신앙을 지키고자 순교의 각오로 살아가는 성도들과 함께 성령충만한 순교자적 삶을 살아가는 축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