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30, 2023

“죽지 아니하면” (Unless You Die)

Preacher:
Series:
Passage: 요한복음 (John) 12:24
Service Type:

“죽지 아니하면”

(Unless You Die)

7-30-2023

본문말씀: 요한복음 (John) 12:24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Very truly I tell you, unless a kernel of wheat falls to the ground and dies, it remains only a single seed. But if it dies, it produces many seeds.)

                             [설교 요약]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도전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요한복음 12장>은 이제 주님의 십자가를 준비하시는 모습과 그 십자가의 의미를 잘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주께서 말씀하시는 한알의 밀알이 주는 교훈일까요? 그것은

첫째), ‘한알의 밀알’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그 누구가 대신 질수도, 흉내 낼수도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질수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수없이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는 죽어지는 한알의 밀알인 것입니다.

둘째) ‘밀알은 모든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 모든 크리스챤의 삶이 또한 땅에 떨어져 죽는 한알의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3) 고 도전하시듯이 ‘만약 십자가에서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한알의 밀알로 죽지 않는다면 아무런 열매를 거둘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 질문은 ‘무엇이 죽어야 할까요?’  그것은 이어지는 <25절>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v. 25)라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것은 ‘자기생명’ (self- life)입니다.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게 되고, 그 생명을 미워하는 자, 곧 <자기생명을 죽이는 자>는 영생토록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A.W. 토저는 그의 책 ‘하나님을 추구하라’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을 가로막는 휘장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자기생명’ (self-life)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기생명이라는 휘장은 ‘내 육신 가운데 거하는 죄된 성품’이라 지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와 같은 ‘자기 생명’은 우리 자신의 결심과 노력으로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토저’는 말합니다. 여기에 다시 한번 성령의 능력과 역할이 강조됨을 봅니다. 왜냐하면, 오직 성령만이 우리의 ‘자기 생명’ (자아)를 십자가에 목박아 죽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주께서 약속하신 수없이 많은 열매를 보내되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v.24)는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여, 말씀의 창과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으로서 육신에 속한 자아와 싸워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도합니다.

 

[설교 전문]

            인생을 살아 가다보면 나이가 먹음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를테면, 어린 남자아이들의 경우는 ‘로봇이나 포키만 혹은 공룡/자동차’에 푹 빠지고, 여자 아이들의 경우는 ‘예쁜 인형이나 소꿉놀이을 무척 사랑하다가 나이가 들고 철이 들어감에 따라,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어린 아이들의 놀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자연스럽게 그것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사도 바울의 말처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11)고 고백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도, 철이 들어감에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아집’이고 ‘고집’이요, ‘죽지 않는 자아’일 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아 거듭난 크리스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변화되기를 거부하는 것이 우리의 살아있는 ‘자아’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생명의 말씀을 통해 도전하셨듯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밀알의 삶을, 곧 풍성한 열매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요한복음 12장>은 이제 주님의 십자가를 준비하시는 모습과 그 십자가의 의미를 잘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그 예로써 12장을 시작하며 예수님의 사랑하시던 오누이 나사로, 마르다 그리고 마리아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이 오누리들이 주님을 위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지극히 비싼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그녀가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이것을 본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요. 12:5)고 마리아를 채근하지만, 주님은 이런 그녀의 행위는 ‘자신의 장례할 날을 예배하는 것’ (요. 12:7)으로 영적으로 설명해 주시고, 그녀를 칭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포함한 중.후반절에서 보면, 유월절 명절을 맞아 온 무리가 예루살렘에 모여 유월절을 기념코자 했고, 그 중에는 헬라인 몇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빌립에게 청하여 예수님을 만나 뵙기를 원했습니다 (20-21). 이것을 빌립을 통해 들으셨을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v.23)라고.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오늘 말씀인 것입니다. 어떤 이방인들이 주님께로 나아온 것을 통해 장차 주님 자신에게 수없이 많은 이방인들이 나아올 것을 보여주는 것임을 주님은 암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은 자신의 임박한 죽음, 곧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속해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심으로 구약에 예언된 인자로서 이제 영광을 받을 때가 왔음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주께서 밝혀 주시는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한알의 밀알이 주는 교훈일까요? 그것은 첫째), ‘한알의 밀알’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리고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도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실질적인 주님의 죽음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언급했듯이, 주님은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시고자 우리의 모든 죄와 저주를 담당하여 채찍에 맞으시고 창에 찔려 십자가 위에서 그의 보배로운 피를 흘려 실제로 죽으심으로 ‘한알의 죽는 밀알’이 되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십자가는 그 누구가 대신 질수도, 흉내 낼수도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질수 있는 십자가입니다. 오직 예수님 한 분의 죽으심으로 수없이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는 영광과 구원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이것이 앞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감하면서 ‘왜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라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십자가만을 자랑했던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과 사랑을 통해서 비로소 세상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세상을 이겼던 것입니다.

둘째) ‘밀알은 모든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우리 모든 크리스챤의 삶이 또한 땅에 떨어져 죽는 한알의 밀알이 되어야 함을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주님의 십자가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께서 말씀하시는 십자가는 자신의 십자가만이 아니라, 여기서부터 우리를 향해 ‘너희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는 주님의 도전과 격려가 시작됩니다. 주께서 <누가복음 9장>에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도전하셨듯이,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3) 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만약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라고 주님은 분명히 평가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먼저 주님으로부터 시작되어 그분께서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살리는 생명의 십자가가 되었지만, 이 십자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분을 믿는 제자된 우리 각자가 날마다 져야만 하는 우리 각자의 십자가로 적용되고 완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도 주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말고, 자기생명을 미워함 (자기부인/자아를 죽임)으로 주님의 생명이 내 안에서 풍성하고 아름답게 열매 맺게 결단하고 실천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 까지가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한알의 죽는 밀알’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된 메시지임을 저는 믿습니다.

그럼으로 만약 우리가 십자가지기를 거부한다면, 오늘 주님의 표현데로 하자면, ‘자기생명을 사랑함’으로 ‘한알의 밀알로서 죽기를 거부’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그 문제의 중심에는 첫째, 우리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요, 둘째 ‘죽음의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말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v.24)에서 특별히 ‘죽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저는 주께서 ‘죽어야 산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을 통해 도전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죽는다’는 단어를 사용한 <역설적 진실>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역설적 진실>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생명’을, 그리고 ‘한알 그대로와 많은 열매라는 개념을 대조적으로 사용하심을 통해, ‘생명의 속한 놀라운 역설적 진실’을 드러내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이 말씀을 통해 강조하시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참된 생명의 역사는 반드시 먼저 ‘육신에 속한 것들의 죽음’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역설은 ‘살기 위해선 반드시 먼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강조하시고 도전하시는 역설입니다. 마치 ‘따뜻한 봄바람이 불고, 얼었던 대지가 새싹으로 움트는 생명의 계절’을 경험하기 위해선 먼저 ‘한 겨울동안 눈보라치고 대지가 얼어붙은 황량한 죽음의 계절’을 지나야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께서 분명히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도전하시는 것은 ‘너희가 살기를 원한다면, 먼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런 주께서 도전하시는 ‘죽음’은 우리의 ‘실제적인 죽음’이 아니라, ‘상징적인 죽음’이라는 것임을 우리는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상징은 매우 강력한 상징으로서 이 죽음은 우리의 인격과 존재 전체에 매우 강력하게 그리고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상징으로 말씀하신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25절>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v. 25)라고. 여기서 주님은 우리가 죽어야 할 것은 ‘자기생명’ (self- life)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게 되고, 그 생명을 미워하는 자, 곧 <자기생명을 죽이는 자>는 영생토록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라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은 “무엇이 주께서 말씀하시는 <자기생명>일까요?” ‘A.W.토저’목사는 <하나님을 추구하라> (Pursuit of God)이라는 그의 책에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축복을 누려 나갈수 있을 것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하나님과 나를 가로막고 있는 ‘자기생명’ (self-life)이라는 휘장이 우리 크리스챤에게 존재함을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이 휘장은 이미 예수님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께서 경계하신 이 ‘자기생명’이라는 휘장을 걷어 내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자기생명’ (=자아)이라는 휘장은 ‘내 육신 가운데 거하는 죄된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생명’은 ‘자아/self’ 혹은 ‘자기사랑/self love)’이라고 불리우는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이 ‘자아/자존심/자기생명/자자기사랑’을 죽일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토저 목사는 그의 책에서 “이 자아 곧 자기생명을 어설프게 만지작거리지 말라”고 강하게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결코 자아를 스스로 죽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나의 자아를 십자가에 목 박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도전하시는 것과 같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결심과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과 같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는 것입니다. 자기부인 (자기를 미워함)의 삶은 우리 스스로 결심한다고 실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성령의 능력으로 못박으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갈라디아서에서 자신이 죄와 싸워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십자가 위에서 우리 크리스챤들은 날마다 자아와의 치열한 싸움을 싸워야 함을 사도는 자신의 고백을 통해 선언합니다. 세상이 나를 십자가에 목 박고, 내가 또한 세상을 십자가에 목 박는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에, 세상에 뿌리를 둔 자아를 미워하고 성령으로 못박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기생명을 여전히 사랑합니까? 말로는, 머리로는 자기를 부인할 것 (= 죽일 것)을 되뇌이다 가도, 정작 자아가 죽는 아픔과 고통이 조금씩 느껴지면, 두손에 쥐었던 칼을 슬며시 놓음으로 자기사랑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지는 않습니까? 바라기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v.24)는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여, 말씀의 창과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으로서 육신에 속한 자아와 죄의 유혹을 날마다 죽여 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약속하신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날마다 누려나가는 복된 주님의 제자된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