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18, 2021

“신앙과 인격” (Faith & Personality)

Preacher:
Passage: 갈라디아서 (Galatians) 4:19
Service Type:

“신앙과 인격”

(Faith & Personality)

4-18-21

본문말씀: 갈라디아서 (Galatians)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My dear children, for whom I am again in the pains of childbirth until Christ is formed in you)

[설교 요약]

            저는 오늘 성도 여러분과 함께 ‘우리는 성숙한 크리스챤인가?’하는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해 보기를 원합니다. 사실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믿음’이라는 주제는 늘 우리 관심의 중심에 있지만, 거기에 비해 ‘인격적 성숙’은 그리 많이 다루지는 않는 주제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챤의 ‘인격적 성숙’이라는 주제는 우리 각자가 깊게 성찰하고 시급하게 추구해야 할 과제라고 믿습니다. 그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레위기 11:45)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라고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선언합니다. 여기서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진다”는 말의 의미는 크리스챤의 성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우리 크리스챤이 성숙하다는 의미일까요?”  (What is Christian maturity?) 그것은,

첫째, ‘건강한 인간성을 유지하는 것’ (It is to keep the sound humanity)입니다: 다윗은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시편/Psalms 26:1)라고 하나님께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다’는 의미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성실과 순결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행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완전함’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건강한 인간성을 회복하고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것’ (It is to entrust totally ourselves to God)입니다: 저는 크리스챤의 인격적 성숙의 예로서 다윗을 살펴보고 있는데,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삶’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봅니다. 이렇게 ‘맡기는 삶’은 (첫째) ‘겸손’을 통하여 실천됩니다 (끝까지 겸손함으로 사울왕을 하나님의 손에 맡김/삼상.26장; 삼하.1장). 그리고 (둘째)는 ‘인내함’을 통해서 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과 악인의 형통이 반드시 의로우신 하나님에 의해 심판될 것을 믿고 인내함/시.3,7,37편).

셋째,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것’ (It is to be formed Christ in us)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사도가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는 이유는 아직 그들이 성숙된 신앙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성령으로 시작했지만 (=거듭났지만), 계속해서 신앙의 성숙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모든 신앙적 성숙은 결국 ‘그리스도의 형상(=인격)을 닮아감’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아름다운 형상으로 날마다 자라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오늘 성도 여러분과 함께 우리 자신들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해보기 원합니다. 우리 각자가 크리스챤으로써 자성과 성찰의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이 질문은 곧 ‘나는 성숙한 자인가?’하는 것이요, 동시에 ‘나는 성숙한 크리스챤인가?’하는 질문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살펴봤을 때, 어느 때에든지 잘못된 믿음과 미성숙한 인격으로 인하여 자신 뿐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와 사회전체에 많은 물의를 빗고 해악을 끼친 사람들의 사례는 헤아릴 수 조차 없을 만큼 많은 것입니다. 제가 이와 같은 개인의 극단적인 문제를 오늘 다루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21세기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 크리스챤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하는 기초적이요 본질적인 질문을 저는 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 크리스챤은 나 자신 뿐 아니라, 우리가 함께 신앙생활하는 교회 공동체, 그리고 더 큰 그림에서 ‘현세대의 크리스챤의 시대정신’을 객관화해서 바라보고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해보면, 크리스챤의 인격에 대한 주제는 크게 부각되지 않고,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을찌라도, 저는 이것이 우리 크리스챤 모두가 성찰해야 할 매우 시급한 과제요, 새롭게 출발해야 할 중대한 주제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레위기 11:45)라고. 바라기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과연 나는 성숙된 크리스챤으로 성장하고 있는가? 그 성숙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해가고 있는지 각자 점검해 감으로, 점점 더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형상을 향해 변화되어 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말씀을 포함하여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바로 유대교 율법주의자들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킴으로 ‘할례’를 억지로 행하게 했던 것입니다. 사도는 ‘이런 율법준수를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된다’고 가르치는 거짓교사들을 강력하게 경계하며, 이렇게 성도들에게 도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거짓교사들의 헛된 가르침으로 인해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그의 생명을 통하여 허락하신 진리의 자유에서 떠나, 또 다시 <종의 멍에>에 속하는 과거의 율법의 종으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갈라디아 4장>을 시작하면서 ‘구약교회’의 상태가 어떠한 지를 지적합니다 (v. 1~3). 그 상태는 마치 어린 아이와 같이 미숙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구약교회 성도’와 ‘율법’의 관계를 주인의 유업을 이을 그의 <어린 자녀>와 <청지기/가정교사>로 비유하면서, 그 자녀들이 어릴 때는 청지기 (=가정교사) 아래에서 지도를 받지만, 이제 그가 성인이 되면 청지기 아래에서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주인의 유업을 이을 자녀이기 떄문입니다. 이것이 왜 우리 신약에 속한 우리 성도가 율법에 종이 되어서는 안되는지에 설명인 것입니다. 이제 사도는 갈라디아 성도가 진정으로 성숙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구하며, 그를 위해 또 다시 여인이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우리 크리스챤이 성숙하다는 의미일까요?”  (What is Christian maturity?) 그것은,

첫째, ‘건강한 인간성을 유지하는 것’ (It is to keep the sound humanity)입니다: <시편 26편>은 다윗의 시인데, 여러 성경학자들은 이 시를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니던 시절에 지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 26편>의 내용을 보면, 그가 시를 시작할 때와 마칠 때 2번씩이나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for I have led a blameless life ~) (시. 26:1,11) 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나의 완전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완전함’이란 물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는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완전함’이란 <킹제임스 버젼>에서 보는 것과 같이 ‘성실함’ (integrity)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물론 어떤 인간도 감히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행했습니다’라고 말할 사람은 없겠지만, 다윗은 감히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v.1)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매튜헨리>는 “다윗은 자신의 성실을 엄숙하게 주장한다. 그가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는 그의 신앙고백의 일부분이고, 그의 성실함의 증거들이 여호와를 의로우신 재판장으로 신뢰하도록 그를 격려시켰던 것이다”라고 주석했습니다.

제가 오늘 ‘크리스챤의 인격’이라는 주제의 말씀을 성도 여러분과 함께 나누면서 한가지 문제제기하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성숙된 크리스챤이 된다’는 것이 뭔가 ‘별종’ (?!)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자체가 본질적인 변화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근본적으로 부족한 것 한가지는 ‘건강한 인간성’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제가 말씀드리는 ‘건강한 인간성’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방금 살펴본 데로 ‘성실함’으로 행했던 다윗에게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실함’이란 ‘단순히 부지런함, 혹은 정직함’ 그 이상인 것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내가 행하는 말과 행동 그리고 내 깊은 마음속의 동기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감히 ‘완전히 행했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인격적 행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상당히 복잡한 주제를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 ‘인간성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건강한 인간성’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면서 다윗이 행했다고 고백한 ‘완전함’을 예로 든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다윗은 언제나 믿음으로 행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속에 허락하신 ‘건강한 인격’ 즉 ‘아담의 범죄함으로 인해 비록 훼손되었을 찌라도 우리 속에 간직한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성실함으로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마태복음/ Matthew 11:17) 물론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마음을 강팍하게 하여 주님의 복음을 받지 않고 회개치 않는 이스라엘 민족의 악함을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면서 점점 더 종교화되고,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유대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을 고발하는 말씀이기도 할 것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도 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 아파하지 않는 건강한 인간성을 상실한 종교화된 인간의 외곡된 모습이 아닐까요? 왜, 오늘날 전도의 문이 점점 더 닫히는 것일까요? 왜 오늘날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이 세상 사람들에게서 점점 더 관심 (=매력)없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 교인들이 자신들이 말한 것처럼 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인격적인 모순을 보이는 것에서 출발하지 않을까요?

둘째,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것’ (It is to entrust totally ourselves to God)입니다: 저는 다시한번 다윗의 삶을 통해 우리 크리스챤의 인격적 성숙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만큼 다윗은 우리 크리스챤에게 깊이 연구하고 인격적으로 본받을 가치가 있는 대표적인 성경의 인물의 한명이라고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 다닐 때 뿐 아니라 그의 평생의 위기의 순간마다 보여 주었던 성숙된 삶의 핵심적인 모습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맡기는 모습은 크게 2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 (첫째)는 ‘겸손’, 즉 ‘자신을 낮춤’을 통해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 다윗은 자신을 그토록 핍박하고 죽이고자 했던 사울 왕을 결정적으로 자기 손으로 죽일 수 있는 기회가 2번씩이나 찾아왔음에도 그렇게 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을 내가 감히 죽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손에 사울 왕을 맡기는 것입니다. 다윗은 인생 최대의 위기에서도 섣부르게 행동하지 않고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심 판단하심에 사울 왕에 대한 심판을 전적으로 맡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인내함’이었습니다. 사실 다윗왕의 일생을 살펴본다면 청년시절에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니던 것에서 시작하여, 왕이 된 이후에도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또 다시 도망 다니는 것과 같은 여러가지 힘든 삶을 그의 평생을 통해 숱하게 겪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에서 일관되게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은 ‘인내함’입니다. 특별히 <시편 37편>에서 ‘왜 악인이 형통함을 불평하지 않으며, 인내함으로 다윗이 기다릴 수 있었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시. 37:7,10)라고 다윗은 선언합니다. 비록 그가 악인들이 형통할찌라도 불평하지 않고, 인내로 기다릴 수 있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고 공의로우신 심판이 있을 것임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비록 구약의 인물이라 할찌라도 그의 평생의 삶에서 보여준 것과 같이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원수 갚는 것을 맡기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한 모습은 우리 크리스챤의 중요한 성숙의 덕목임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께 원수 갚은 것을 맡기고 겸손히 그분과 동행하십니까?

셋째,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것’ (It is to be formed Christ in us)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사도는 갈라디아 성도들을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라고. 사도는 무엇을 위해 구한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인격을 닮아간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울은 그가 영적으로 나은 자녀들인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인격을 향해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합당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진정한 크리스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거듭난 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갈. 3:3). 그들 속에는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 속에서 아직까지 그리스도의 형상이 충만하게 이루어져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충만해져 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엡. 2:10)라고.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선한 일로 인하여’ (by good works) 지으심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선한 일을 위하여’ (to do good works) 지으심을 받았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존재가 거듭난 성도들인데, 태어나는 순간 지어지고 끝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에 충만하게 이르도록’ 지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해산하는 수고를 감내하면서 그들의 성숙된 신앙을 위해 기도하고자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들은 성숙된 크리스챤이 아니라, 아직 영적으로 미성숙하고 어린 크리스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자라남으로 ‘선한 일’ (악에 죽고, 의에 사는)을 행할 수 있는 성숙된 크리스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충만하게 이루어져 가는 성도의 성숙된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은 나 혼자만 영적으로 성숙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공동체를 위해 간구하고 수고하는 사도 바울에서 보듯이, 함께 성숙해 나가는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의 삶의 목표인 그리스도의 형상 (=장성한 분량)을 향해 나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함께 고민하고 묵상해본 그리스도인의 ‘인격의 성숙’을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성화’ (sanctification)이라고 부를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의 삶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수 있는데, 첫째는 ‘칭의’ (justification)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것’이요, 셋째는 ‘영화’ (glorification)로써 ‘주님을 미래의 어느 날 다시 만날 때 그분과 같이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칭의’와 ‘영화’ 사이에 있는 모든 삶이 ‘성화’인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바로 성화인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모습을 향해 날마다 자라나가는 삶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주님의 향기를 더 진하게 발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을수록 안과 밖이 서로 연결되는 인격의 통합을 이루며, 하나님께 사랑받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성숙된 크리스챤으로 변화되어가고 있습니까? 이런 아름다운 주님의 형상을 따라 선한 일을 위하여 날마다 지어져 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