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11, 2021

“오직 그가 아시나니” (But He knows the way)

Preacher:
Passage: 욥기 (Job) 23:10
Service Type:

“오직 그가 아시나니”

(But He knows the way)

4-11-21

본문말씀: 욥기 (Job)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But He knows the way that I take; when He has tested me, I will come forth as gold)

[설교 요약]

            우리 교회는 ‘학생’교회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청년의 때를 낭비하지 않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결코 녹녹치 않음을 우리 모두는 공감합니다.

저는 우리가 제각기 꿈꾸고 소망하는 삶의 목표를 성취해 나가는 과정속에서 반드시 겪게 되는 고난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것은 특별히 크리스챤으로서 어떻게 이 고난의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해 나갈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v. 10) 라고 자신이 현재 당하는 고난의 문제에 대해 반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욥의 이와 같은 고난을 대하는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제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 크리스챤이 고난을 통해 깨닫아야 하는 것일까요?” (What should we be recognized through the suffering?) 저는 오늘 본문에서 욥의 고백을 통해서 그 귀한 열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께서 계획하신다’ (God is the One who plans our sufferings)는 것입니다: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v.10a) 라고 고백합니다. ‘나의 걸어가는 모든 걸음을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실 뿐 아니라, 고난 까지도 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표현은 단순히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근본적으로 그분께서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고난은 하나님의 훈련이다’ (All of our sufferings are the discipline of God)는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는 길을 아실 뿐 아니라, “그가 나를 단련(하신다)” (v.10b)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왜 하나님은 고난을 계획하셨는가?’인데, 그 이유는 ‘우리를 단련 (=훈련)시키 시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훈련을 통해 우리를 강하고 성숙된 그의 자녀로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그 훈련의 결과는 정금과 같다’ (The result of discipline become the value of gold)는 것입니다: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v. 10c)고 욥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훈련하셔서 다듬어 나가신 후에는 그가 정금같이 되어 나아온다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고난이 혹독하면 할수록, 그 삶의 열매는 더욱 아름답고 정금과 같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실로 사람이 마음에 자기의 길을 계획할찌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고 열매 맺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 (잠. 16:9)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의 훈련을 인내로서 이겨 나감으로 영혼의 만족을 누리고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시절을 따라 푸른 잎사귀와 풍성한 열매를 맺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 교회는 ‘학생/청년’교회입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수의 청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사랑하는 가족의 품을 떠나 이억만리 타국인 이곳 미국으로 와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부모님과 함께 이곳에 와서 마찬가지로 이 청년의 때를 낭비하지 않고 귀한 열매 맺고자 힘쓰는 청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각자가 여러 상황과 여건 가운데 현재 이곳에 오게 되었든지 간에 관계없이 우리 모두는 현재 제각기 녹녹치 않는 현실과 맞닥트리고 있음을 우리 모두는 공감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나는 쉽고 편안한 환경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고 혹은 ‘나는 하는 일마다 술술 풀리고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힘든 순간의 연속이요, 고난의 연속인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신자나 불신자나 대부분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자가 삶을 대하는 방식을 생각해 볼 때, <내가 꿈꾸고 희망하는 삶의 목표가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 하는 것과, 특별히 그 과정 가운데서 겪게 되는 <고난의 의미는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이겨 나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각자의 이해가 여러분의 삶을 본질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열매맺게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v. 10)는 욥의 고백과 같이 이 고난 가운데 나를 순금과 같이 훈련하셔서 그분의 영광스러운 자녀로 성숙케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신뢰하며 감사와 가쁨으로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동방의 의인’이라고 불렸던 욥이 그가 당했던 모든 극심했던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의 고백임을 봅니다. 그런데 <욥기>의 주제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욥의 믿음/지혜’라고 정의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지혜’라고 정의하는 성경학자가 더 많으며, 저 또한 여기에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총 42장으로 구성된 욥기에 있어서 구성내용을 볼 때, ‘주인공 욥과 그의 세친구와의 대화 혹은 논쟁 (=변론)’이 그 주된 내용인데, 세친구는 ‘욥이 잘못을 하고 죄를 지었으니까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라고 욥을 계속해서 몰아 붙었고, 욥은 ‘나는 잘못이 없다.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라고 그는 항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과 세친구들의 이런 공방이 이어지다가 후반부에 가서 ‘엘리후’라는 젊은 친구가 욥을 꾸짖는데 이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의롭다’ (욥.32:2)고 욥이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욥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창조의 권능과 지혜를 선언하셨고 (욥. 38~41장), 그에 대해 욥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티끌과 재 가운데서 하나님께 회개했던 것 (욥. 42장)입니다. 그럼으로 욥기의 주제는 욥의 의로움이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적 주권과 지혜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포함한 욥기를 통해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이해하고 흔들림없이 붙들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겪는 어떤 고난도 무가치하거나 무의미한 것은 없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내가 재수가 없어서 이런 힘든 삶을 사는 것도 아니요, 환경이나 어떤 누구 탓도 아니요, 내가 못나서 나의 잘못이’ 이와 같은 고난을 겪는 근본이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만약 하나님을 믿는 그분의 자녀라면, 그 어떤 고난도 우연히 주어지는 것은 없으며, 그 고난은 결국 나를 훈련시키고 뜨거운 풀무불에서 달구어 정금과 같이 빗어내는 하나님의 은혜 (=지혜/주권)의 손길임을 우리는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포함한 욥기를 통해서 우리 성도들이 배울 수 있는 귀한 교훈일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제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좀더 집중적으로 묵상해 보기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바로 무엇이 우리 크리스챤이 고난을 통해 깨닫아야 하는 것일까요?” (What should we be recognized through the suffering?)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그 귀한 열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께서 계획하신다’ (God is the One who plans our sufferings)는 것입니다: (내 인생전체, 특별히 ‘고난’에 대해서!)(예/ 시지프스의 신화) 아마 성도 여러분이 최근 저의 설교를 주의해서 들으셨다면 충분히 이해하셨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저는 그동안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은혜이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여러 번 강조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구원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구원받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놀라운 그분의 자녀의 복된 삶을 누리게 하시고자 함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과 같이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24)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주님의 십자가로써 우리를 살리심은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엡. 1:4~6). 이것은 우리 개인의 전 인생 뿐 아니라, 민족의 역사를, 더 나아가 전 인류의 역사를 계획하고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고백하는 오늘 본문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눠짐을 보게 됩니다. 그 첫번째는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v.10a) 라는 것입니다. ‘나의 걸어가는 모든 걸음을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크리스챤은 이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맞아요, 하나님은 내가 가는 길을 모두 아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신다’라는 우리의 고백은 그분을 지적으로 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분을 인격적으로 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정확히 잠언서 기자가 우리에게 도전하는 영적 상태인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 3:5~6)라고요! ‘하나님께서 오직 나의 가는 길을 아신다’고 고백한다는 것은 ‘내가 나의 명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의뢰하고 범사에 그를 인정한다’는 믿음의 고백이요, 그럼으로 틀림없이 나의 한걸음 한걸음을 주께서그분의 능하시고 신실하신 손으로 이끌어 가실 것임을 신뢰한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렇게 여러분의 걸음 걸음을 인도하실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둘째, ‘모든 고난은 하나님의 훈련이다’ (All of our sufferings are the discipline of God)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하나님을 신뢰하신다면, 우리는 욥이 깨닫은 2번째 주제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v.10b)이라고 욥은 계속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가 하나님을 지칭한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단련/훈련하신다’는 것은 앞서 말씀 드린대로 ‘하나님께서 나의 걸음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전제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만이 내 인생을 그 선하신 뜻데로 계획하시고, 온전히 나의 걸음을 이끌어 오심을 믿기 때문에 ‘내가 겪는 어떤 고난도 그분의 훈련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여기까지 성도 여러분이 인격적으로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상태라고 한다면 여러분의 남은 삶은 매우 희망적이고 영적인 열매를 더욱 풍성히 거두어 갈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각자가 일평생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고난은 수없이 다양하고 변화무상 할찌라도 그 고난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요, 그 고난의 이유는 훈련이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모든 훈련의 목적이 그러하듯,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불리어졌던 다윗은 자신의 삶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 37:23~24) 다윗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그토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따랐던 다윗 자신도 때로 넘어지고 자빠지기도 했지만, 아주 엎드러지지 않고 실패자로 남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손이 그를 붙드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 주실 뿐 아니라, 주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까지도 자신과 함께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께서는 그의 원수 앞에서 자기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셔서 존귀와 영광을 허락하여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고난이라는 풀무불을 통해 우리를 강하게 훈련하실 뿐 아니라, 동시에 그의 강하신 손으로 붙드심으로 아주 넘어지고 실패하도록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이런 하나님으로 신뢰하고 있습니까?!

셋째, ‘그 훈련의 결과는 정금과 같다’ (The result of discipline become the value of gold)는 것입니다: 이제 욥은 이렇게 <10절>을 마무리합니다.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v. 10c)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훈련하셔서 다듬어 나가신 후에는 그가 정금같이 되어 나아온다는 것입니다. 고난이라는 혹독한 결과를 통하여 정반대의 아름다운 결과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난을 통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 수많은 성도의 삶을 통하여 목격하게 되는 증거들입니다. 사실 이 고난의 문제는 개인적인 차원 뿐 아니라, 민족적인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개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별히 긴 역사를 통하여 많은 민족으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고난의 세월을 살았던 대표적인 민족으로 우리는 ‘유대민족’ ‘폴란드민족’ 그리고 우리 ‘한민족’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한민족을 포함한 이런 민족들의 긴 고난의 역사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영적인 눈으로 볼 때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과 깊은 인생에 대한 이해, 더 나아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깨닫음을 이런 고난의 기간을 통해 확인해 나가는 것입니다.

제가 앞서 <욥기서>를 간단히 요약하며 설명 드렸듯이,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셔서 그분의 전능하심과 지혜를 선포하셨을 때 그는 깨닫음 가운데 진정으로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 하나이다” (욥. 42:4~6)라고. 이것이 욥기의 결론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정금과 같이 순결하고 가치롭게 살아가는 자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훈련하고 다듬으시는 중심에는 우리를 낮추시고 더 겸손히 자신을 발견케 하시고자 하시는 뜻이 있음을 믿습니다.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말씀을 듣고서 비로소 욥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참된 회개를 했던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자기는 무죄하고 이와 같은 고난을 자신이 받는 것은 매우 억울한 일이라고 주장하며,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죄와 허물을 먼지와 재 가운데 통렬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더 이상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이제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겸손하게 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회개한 만큼 신실하게 그분의 고난을 달게 받고 그 훈련을 이겨 나감으로 순금과 같이, 다이야몬드와 같이 아름다운 열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을 귀로 듣는 신앙에서 탈피해 이제는 눈으로 보는 신앙으로 성숙해가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고, 일하여 성취하고자 하는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주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소원을 따라 성실과 열심을 통해 귀한 열매 맺는 삶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을 소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어떤 구체적인 삶의 목표를 두고 노력하든 관계없이, 지금 이 시간부터 하나님은 여러분의 가야할 마지막 걸음을 아시고, 그분만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그 무엇보다 추구해야 하는 분이심을 깨닫는 여러분 모두 되시길 바랍니다. “사람이 마음에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 (잠언 16:9)시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나의 계획과 희망은 결코 아름답게 열매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한사람도 헛된 무지개를 좇던 어떤 소년과 같이 인생의 긴 뒤안길에서 되돌아서서 후회와 허무함으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이 없기를 원합니다. 구약의 ‘미가’선지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감동적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라고 선언했습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관계없이, 오직 정의롭게 행하며, 한결 같은 사랑으로 살아가며, 겸손하게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동행하는 축복된 인생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그의 선하신 뜻을 따라 범사에 여러분의 삶을 의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물 댄 동산 같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과 같게 하실 것 (사. 58:11)입니다.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시절을 따라 푸른 잎사귀와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