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16, 2022

“십자가로 화목하게” (To Reconcile To God Through The Cross)

Preacher:
Passage: 에베소서 (Ephesians) 2:16~18
Service Type:

“십자가로 화목하게”

(To Reconcile To God Through The Cross)

1-16-22

본문말씀: 에베소서 2:16~18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and in this one body to reconcile both of them to God through the cross, by which He put to death their hostility.)

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He came and preached peace to you who were far away and peace to those who were near.)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For through Him we both have access to the Father by one Spirit.)

[설교 요약]

            지난시간 <엡. 2장>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사랑은 갈라져 있던 우리들을 하나되게 하셨음을 살펴보았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하나되게 하기위해 2가지 장애물을 먼저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 장애물은 ‘모든 인류는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과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로막고 있는 율법이라는 장벽’ 입니다.

이것이 2장을 시작해서 오늘 본문 앞까지 이어져 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이 장벽을 제거하신 것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죽었던 우리를 살리실 뿐 아니라, 갈라져 있던 우리를 십자가로 그분 안에서 하나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의 십자가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일까요?”

  • 화목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까요?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위해서 입니다. 바로 유월절 어린 양과 같이 ‘화목제물’ (the propitiation)되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 (=평화)하게 하시고자 하심 입니다 (v.16a).
  •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며 “다 이루었다” (요. 19:30)고 외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된 관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신 것입니다 (롬. 10:4).
  •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v.16b)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v.18)라고, 주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역사를 선언합니다. 바로 갈라진 우리 모두를 하나되게 하신 것입니다.
  • 우리 모두를 산제사로 드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엡. 5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어 주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사랑으로 살아가십시오” (엡. 5:2)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을 통해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 (롬. 12:1)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로 드린 진정한 이유일 것입니다.

날마다 예수의 십자가를 더욱 깊이 깨닫아가고, 사랑함으로 그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남은 평생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저의 평생의 삶에서 한가지 분명한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욱 깨닫아 나가고 오직 그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의 비밀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저는 잘 압니다. 저는 그것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만이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하며, 소망 없는 우리에게 참소망을 주고 하나되지 못하는 우리 안에 진정한 평화를 주심을 믿기에 주의 십자가를 더욱 붙잡고 날려가기 원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신학자의 선언과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가장 낮아지셔서 자기 희생을 실천하신 숭고한 하나님의 사랑’과 ‘가장 영광스럽게 죄와 사단을 이기고 승리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극적으로 만나는 유일한 곳이라고도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십자가를 사랑하십니까?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감하면서 이렇게 온 인격을 걸고 다짐했던 마지막 말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고 말입니다. 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남은 평생을 통하여 ‘예수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넉넉한 대답의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말씀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죽었던 우리를 살릴 뿐 아니라, 갈라져 있던 우리를 하나되게 하시고,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다’고 사도는 선언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짧은 시간을 통해 결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두 나눌수 없습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주님의 제자에게 있어서는 평생토록 자랑하고 알아 나가야 할 중심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에베소 2장>의 전체 흐름에서 사도가 새롭게 선언하는 예수의 십자가가 의미하는 것을 간추려서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이해하고자 합니다.

지난시간 <엡. 2장>을 시작하면서 저는 2장의 주제는 1장에 이어서 ‘계속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되게 하셨다’고 사도가 선언하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에베소 전체의 ‘주제절’ 이라고 할 수 있는 <엡. 1:10>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갈라져 있던 유대인과 이방인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그것은 2가지 큰 장애물을 제거함으로서 인데, 첫째는 주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심’ (v.1)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살아 있는 한 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죽었던 존재가 살아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방인 뿐 아니라, 유대인들도 모두 죄를 범했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모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인 것입니다. 자신을 대신해서 어떤 훌륭한 선지자나 하늘의 천사를 대신 보내시지 않고서 말입니다. 그 누구도 죽었던 우리를 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모두 영적인 사망상태에 있기에 그들을 반드시 살려야만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께서 자신을 통해 그들을 살리셨는데 또 한가지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 두번째 장애물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율법’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말씀을 보면,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v.14~15)라고 사도가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사도는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으로 막혔던 담인 계명의 율법을 허셨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는 ‘율법’ (the Law)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로막는 담이 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데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의 후손 이스라엘민족에게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민족이 4백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신명기 4:1)라고.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만 율법’을 주셨다는 사실과, ‘율법을 듣고 순종함으로 행하게 될 때 살게 된다’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살게 된다’는 것은 ‘구원받는다’는 뜻이요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에게는 당연히 전혀 관심 밖이고, 상대할 가치없는 존재라고 치부했던 자연스런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없는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은 구원받지 못하며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라고 그들은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너무 구약의 유대인들의 생각을 과장되게 표현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의 복음전도 초기 사역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온 뿌리 깊은 유대인들 만의 영적 편견임을 사도행전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가 경건한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초청으로 그의 집에 가서 말씀을 전했을 때, 성령이 그 이방인들에게 부어지심을 그가 목격하고 매우 놀라며 이렇게 같이 갔던 유대인 형제들에게 고백합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침례 베풂을 금하리요” (행. 10:47)라고. 이때까지 베드로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도들 조차도 이방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부어 주심이 없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직 택한 자녀 이스라엘에게만 성령의 부어 주심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고 베드로조차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께서 이방인에게도 부어 주심으로 역사하심을 목도하고서 그들에게 침례를 베푼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라고 그에게 지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출애굽이후 수천년을 내려오면서 이 율법을 가지고 지킴으로 자신들만 구원받는다는 강한 확신으로 살아온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이 율법이 얼마나 강하고 견고한 담이 되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로막았는지요!

이 두가지 장애물, 곧 ‘우리 모든 인류는 영적으로 죽은 존재’라는 사실과 ‘율법이라는 가로막힌 담’으로 인해 유대인과 이방인은 하나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과 사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통일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 하나님의 영광과 승리의 역사를 행하심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라고 사도는 분명하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v.16)라고. 여기서 우리는 또 한가지의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십자가입니까?” 십자가가 아니면, 길이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오직 십자가 밖에는 다른 길은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마. 26:39a)라고 땀이 피가 되어 흐르도록 간절히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셨습니다. 십자가의 잔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고는 여러분과 저를 살리실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이렇게 순종하십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b)라고요.

그렇다면,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예수의 십자가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화목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 ‘화목제물’ (the propitiation)되신 예수님께서 죽으신 곳입니다. 침례 요한이 묘사했던 데로 ‘하나님의 어린양’ (the Lamb of God)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화목제물 (희생제물) 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유대인들이 양이나 소를 바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이유는 자신의 죄를 대신해서 그 짐승을 생명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자신의 죄로 인해 가로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화해 (=화목)하고자 함이 목적인 것입니다. ‘나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고자 함’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이유가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v.16a) 자신을 하나님께 ‘화목제물’로 드리셔서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케 하고자 함인 것입니다.

둘째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 10:4)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예수 믿으니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을 안 지켜도 좋다는 뜻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된다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었다” (요. 19:30) 고 외치셨듯이, 참으로 율법에서 요구하는 모든 것을 그분께서 다 이루셨다 (=갚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이룰수 없는 율법의 요구를 우리가 예수 믿을 때, 그분의 십자가의 다 이루신 공로로 여러분과 저는 일한 것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롬. 4:6).

셋째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사도가 <엡. 2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됨’ 입니다. 그 이유는 에베소 교회가 바로 ‘다민족’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서로 간에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v.16b)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v.18)고요. 주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3~24)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주님으로 한 몸을 이룬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먼저 화목된 삶을 실천하는 것이 있을때 가능함을 주께서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어떤 성장배경, 성격, 취미, 가치관, 생활습관 그 무엇이 되었건 그 모든 것을 허무신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되게 하시고자 말입니다.

넷째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산제사로 드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엡. 5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어 주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사랑으로 살아가십시오” (엡. 5:2)라고 성도들을 격려합니다. 그러면, 사도가 성도들에게 제시하는 ‘사랑으로 살아가십시오’라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은 성도들 간에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 (갈. 5:13)하는 섬김의 삶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보다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 향기로운 예물로 자신을 드려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우리 자신도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 받으실 아름다운 예물의 삶을 살아라는 뜻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것이 사도가 <롬. 12장>의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롬. 12:1)는 말씀과 본질적으로 하나되는 뜻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합니까?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를 자랑합니까? 저는 오늘 말씀을 마치면서 우리 각자를 돌아볼 수 있기를 도전합니다. ‘나는 과연 예수의 십자가를 날마다 알아 나가고 있는가?’ ‘나는 진정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가?’하고 말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신학이나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과 제가 진정한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있느냐의 문제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평화 (=화목함)의 삶을 누리고 있는지에 대한 믿음의 핵심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의 모든 만족과 기쁨, 그리고 하나됨과 승리의 열쇠가 바로 ‘주님의 십자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의 십자가를 더욱 깊이 깨닫아가고, 사랑함으로 그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남은 평생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