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28, 2021

“십자가의 비밀” (The Secret of the Cross)

Preacher:
Passage: 베드로전서 (1 Peter) 2:21,24
Service Type:

“십자가의 비밀”

(The Secret of the Cross)

3-28-21

본문말씀: 베드로전서 (1 Peter) 2:21,24

21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설교 요약]

저는 이번주와 다음주 두번의 <부활절 시리즈 메세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번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 그리고 다음 주에는 ‘성도의 비밀’이라는 제목의 말씀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승리를 묵상하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셨으며, 왜 그 잔혹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일까요? 그 십자가의 죽으심을 한마디로 다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진리가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고전. 1:18) 라고.

이제,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인가?” (What is the meaning of the Cross of Christ?) 하는 것입니다.

첫째,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선언 (The Cross declares the horror of sin) 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 열매를 따 먹음으로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파괴하였습니다. 이 죄의 힘은 너무도 강력해서 그 누구도 그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주님의 피만이 그 죄에서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지’를 선언 (The Cross declares God’s amazing love for us) 합니다: 왜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은 십자가 위에서 그 모든 고통과 아픔을 감내하며 죽으셔야만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 (요. 3:16) 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 성도가 얼마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하는지’를 선언 (The Cross declares to boast in the Cross)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 6:14) 라고 선언합니다. 자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 인간을 구원할 뿐 아니라, 갈라진 우리를 하나로 연결하며,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으로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밝히고 있듯이, 주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이유가 바로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분을 따르게 하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의 삶에서 날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함으로 하나님과 더욱 깊은 사랑 안에서 주님의 장성한 인격으로 자라 나가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부활절이 한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기념하는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저는 이번주와 다음주 두번의 <부활절 시리즈 메세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만약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그 분을 영접함으로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과연 ‘구원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묵상과 깨닫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임을 잘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았다는 의미가 ‘영원한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머리로 인식하는 것에 그칠 때, 여러가지 실제적 문제가 발생함을 우리는 삶으로 체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성도의 여러가지 영적 문제의 중심에는 아직까지도 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는지? 그리고 그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무엇을 이루셨는지에 대해 깨닫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바라기는 다가오는 우리 주님의 부활절을 또 한번의 행사를 치루듯 하고 넘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더욱 온전히 깨닫고, 삶으로 누려 나가는 복된 시간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오늘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말씀을 시작하면서, 먼저 이런 질문을 해보기 원합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 적지 않은 분들이 ‘구원받고자 함’이요, ‘영생을 얻고자 함’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저도 여러분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제가 한가지 문제제기를 하기 원하는 것은 우리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예수 믿고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축복중의 축복이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는 사실이지만, 그것이 결코 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즉, ‘영적 아기로 출생하는 시작점’입니다. 이것은 마치 달리기를 할 때, 이제 막 첫 <출발점>을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달리기 경주는 계속해서 달리는 <중간과정>과 그리고 마지막의 <종착점>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이 이해해야 할 중요한 진리는 구원받는 것 자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적 출생이 목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자녀의 신분에 합당하게 계속해서 자라나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여러 신약의 저자들이 하나같이 도전하듯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을 향해 평생을 통해 자라나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구원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 성도들이 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질문한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우리 각자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다양한 영적 문제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는 것은 ‘왜 내가 구원받았는지?’ ‘무엇이 구원의 목적인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도의 구원의 목적을 이해해 나갈 수 있을까요? 이제 우리가 진정 이 구원의 목적을 이해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놀라운 그분의 구원의 능력과 비밀을 예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자신의 구원의 목적을 예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 하나님의 위대하고 지혜로 충만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다짐할 뿐 아니라 (갈. 6:14), 그의 남은 삶 가운데 오직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만을 알아 가고자 작정한다고 선언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2)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질문해 보아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무엇이 ‘십자가’입니까? 역사적으로 볼 때, 십자가는 고대 페르시아와 로마제국 시대에 사용했던 <사형 틀>이었습니다. 이렇게 사형 틀로 사용되었던 십자가는 주로 국가에 반역이나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사형수를 처형하는 틀로써 <사형수의 손과 발목에 못을 박아 오랜 시간동안 피를 흘리며 서서히 죽게 하는 처참한 처형 도구>였습니다. 그럼으로 로마제국에서 십자가 처형이 시행될 당시, 유명한 정치인이자 변호사였던 ‘키케로’ (Cicero)는 ‘가이우스’라는 원로원 의원을 변호하면서 이렇게 십자가형의 잔혹함을 고발했습니다. “로마시민을 결박하는 것은 범죄이고, 그를 매질하는 것은 가증한 행위이고, 그를 죽이는 것은 살인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 로마 시민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도 끔찍한 행동을 묘사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그는 십자가형의 잔인한 사형행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십자가 위에서 주께서 죽으신 것입니다. 왜 우리 주님은 죽으셔야만 했으며, 그것도 하필이면 그 잔혹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일까요? 성경에 보면, 구약의 선지자들로부터 해서 신약의 저자들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삶을 살 것인지를 묘사한 여러 말씀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침례 요한이 <요. 1:29>에서 선언한 말씀이 가장 그분의 삶의 핵심을 잘 밝힌 것이 아닌가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라는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을 대신하여 대속 죽음으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주님의 모습을 짧고도 선명하게 묘사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주님에 대한 하나의 시적인 아름다운 표현이 아니라, 구약에서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자신과 민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희생제물로 드려졌던 ‘어린 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살에 각을 뜨고 피를 흘려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드려지는 어린 양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10장>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애굽왕 바로에게 행한 열가지 재앙 중 마지막으로 바로 왕의 장자 뿐 아니라 애굽 백성의 모든 장자와 짐승의 첫 숫컷 새끼까지 죽게 하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그 집의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름’으로 죽음의 천사가 넘어간 것을 기념했던 유월절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짐승을 잡아 제물로 드리는 제사는 존재했지만, 이때부터 이스라엘민족들이 하나님의 명을 좇아 유월절 어린양을 희생제물로 드림으로써 그들의 생명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기념하여 그들은 매일 하나님께 어린양을 번제물로 드렸던 것입니다 (출. 29:38~43). 이와 같이 침례 요한은 나사렛 예수께서 우리 모든 인간의 죄를 지시고 유월절 하나님께 드려진 어린 양이 되어 희생제물로 죽게 될 것을 성령의 충만함으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희생제물 되심에 대해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7)이라고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옆에서 보듯이 선명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자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같이 죽음을 담당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그런데 왜 하필이면 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입니까?”라고 묻으신다면,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할찌라도, 그의 독생자를 죽이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지혜와 능력이 완벽하게 성취되는 곳이 십자가이기 떄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십자가의 진리가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고전. 1:18) 라고 십자가의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요한복음’에 보면 주께서 장차 자신이 어떠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를 이렇게 구체적으로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4~15) 물론, 이 말을 들은 사람들 중에서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아마도 없었을찌라도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1,500여년 전에 모세를 통하여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게 하시고 그것을 쳐다보는 자마다 불 뱀에 물렸을찌라도 죽지 않고 낫게 하시는 이적을 행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그 놋뱀처럼 십자가 위에 높이 달려 우리를 위해 죽으실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믿는 자마다 죄 씻음 받고 살아나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의 우연한 사건이 아닌 것입니다. 천여년 전에, 아니 창세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비밀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인가요?” (What is the meaning of the Cross of Christ?) 하는 것입니다.

첫째,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선언 (The Cross declares the horror of sin) 합니다: 창세기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것을 축복하셨습니다. 다만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먹는 날에는 정녕 죽을 것임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된다)” (창. 3:5)는 뱀의 유혹에 아담과 하와가 넘어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범하게 됨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 인간의 죄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성경이 너무도 잘 밝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죄의 결과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이 죄라는 끔찍한 악의 결과가 하나님과 하나되었던 관계를 철저하게 파괴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영원한 죽음’이요 ‘멸망’인 것입니다.

솔직히 성도 여러분은 죄를 어떻게 이해합니까? 죄를 어떻게 다루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죄는 하나의 실수, 사소한 잘못, ‘미안’이라고 하면 없던 것 정도로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마음을 먹지 않아서 그렇치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다스려 나갈수 있는 악한 힘 정도가 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고 간교합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여러분은 이해합니까? 그것은 이 율법을 지킴으로 인간 스스로 구원받게 하시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 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율법의 목적은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선하고 온전한 것이지만, 문제는 죄의 유전을 받은 우리 인간은 결코 율법의 선한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죄의 강력한 힘이 선한 율법을 행치 않고 도리어 악을 행하도록 우리를 강압하고 컨트롤하기 때문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18~20)라고 바울은 죄의 그 엄청난 힘 아래 짓눌린 자신의 존재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 끔찍한 죄의 힘에서 벗어날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만이 여러분과 저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피만이 이 가공할 죄와 사망으로부터 힘으로부터 자유케 할 수 있음을 십자가는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지’를 선언 (The Cross declares God’s amazing love for us) 합니다: 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 것일까요? 왜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은 십자가 위에서 그 모든 고통과 아픔을 감내하며 죽으셔야만 했던 것일까요? 신구약 성경에는 이런 질문에 대한 매우 다양하고 구체적인 대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말씀들 가운데 <요한복음 3:16>만큼 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는지를 잘 설명해 주는 말씀을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깊이와 넓이를 알수 없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그의 독생하신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셔야 했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큼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그 큰 사랑이 놀랍게 선포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2)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가운데 고통과 좌절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그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의 생명을 통해 우리를 살릴 뿐 아니라 그의 아들과 함께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것을 은혜의 선물로 주시기를 심히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선언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 성도가 얼마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하는지’를 선언 (The Cross declares to boast in the Cross)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감하면서 이렇게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라고.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울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자랑한다’라고 고백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한다’라고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한다’는 고백은 사도 바울만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 모든 거듭난 성도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성도의 구원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십자가의 비밀’이란 설교제목을 잡은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속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감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비밀이 우리를 구원케 하는 것은 이 비밀이 계시된 비밀이요, 진리의 빛으로 드러난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를 잘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21,24)라고. 주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를 구원케 하실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시고자 함이라고 베드로는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제부터는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살아있는 그분의 제자로 세우시고자 함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가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하는 이유는 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가 우리를 <구원>할 뿐 아니라, 주님의 제자로써 그분의 명령을 좇아 날마다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좇음으로 그분을 닮은 <장성한 인격>으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그분을 신실하게 따르는 제자의 삶, 즉 ‘푯대를 향해 날마다 나아가는 성화의 삶’으로 인도하기에 여러분과 저의 유일한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에 세상이 나를 못박고, 또한 내가 세상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성도 여러분의 유일한 자랑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찢으시고 그 보배로운 피를 흘리셔야만 했던 것일까요? 여러분은 아직도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우리의 믿음의 목표라고 여기십니까? 그렇치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의 목적을 이해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날마다 빛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지혜를 깨닫아 나가야 합니다. 바라기는 이번 부활절 뿐 아니라, 여러분의 평생을 통하여 그의 피로 나를 구원하신 주의 십자가만을 자랑함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사랑 가운데 주님의 장성한 인격으로 자라나가는 성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