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21, 2021

“영적 고독” (Spiritual Solitude)

Preacher:
Series: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8:19~20
Service Type:

“영적 고독”

(Spiritual Solitude)

3-21-21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8:19~20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Then a teacher of the law came to Him and said, “Teacher, I will follow you wherever you go.”)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궁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Jesus replied, “Foxes have holes and birds of the air have nests, but the Son of Man has no place to lay His head.”)

[설교 요약]

            요즘 코로나 사태로 인해 사람과의 간격이 더욱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한 우리는 홀로 생활해야 하는 시간이 많아져 가고 있고, 그 시간만큼 사람들은 혼자 있는 외로움으로 힘들어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v. 19)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v. 20)라고 반응하셨습니다. 왜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은 충동적으로 따르는 삶도, 세상적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의 삶도 아님이 그 말씀 속에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서기관이 따르고자 하는 주님 자신도 이 땅에서 머리 둘곳조차 없는 고독하고 정처 없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통해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하심이요, 십자가의 대속 죽음을 이루고자 하심입니다.

이제 저는 우리 주님의 삶을 기억하며 그분을 따르는 우리 성도들과 고독의 관계는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영적 고독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요?” (Why do we need times of the spiritual solitude?) 그것은,

첫째, ‘외로움의 실체를 직시할 수 있기 때문’ (Because we may face realities of our loneliness)입니다: 왜 우리는 홀로 있는 고독의 시간을 회피하고자 하고, 힘들어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의 중심에는 우리 스스로가 아직까지 우리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요!? 나 홀로 있는 고독의 시간은 ‘외로움’이라는 감정 안에 숨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할것입니다.

둘째, ‘삶의 우선순위를 깨닫기 때문’ (Because we may realize about the priority of life)입니다: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님은 날마다 복음을 전하시고 각색 병든 자를 치유하시는 바쁜 삶 가운데서도 습관을 따라 홀로 있는 조용한 시간을 가지셨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조용히 묵상과 기도 가운데 삶의 우선순위를 따르셨습니다 (막. 1:38). 주님이 이런 홀로 있는 시간 가운데 영적 우선순위를 좇으셨다면, 그를 따르는 우리 성도들은 더욱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셋째,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할 수 있기 때문’ (Because we may communicate with God deeply)입니다: 성도의 영적 고독을 연습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과의 더 깊은 교제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이것을 능가할 가치는 없습니다. ‘리차드 포스터’는 “세상의 소음이 멈출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혼란한 소음을 멀리하고 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분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은혜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 고독의 훈련을 통해 하나님과 더 깊은 사귐 안으로 들어가고, 자신의 모습을 더욱 성찰해 나감으로 아름답게 성장해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 중에는 조용히 있으면 뭔가 불안하고 적적해서 인터넷이나 TV를 틀어 놓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외로움을 잘 못 견디는 것입니다. 오늘날 특히 청년들은 외로움의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는 세대가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지난번 <영적 단순성>이란 제목으로 함께 살펴봤듯이, 우리를 힘들게 얽어 메는 복잡성이라는 굴레를 벗어나는 대표적인 길의 하나가 영적 단순성임을 기억합니다. 그때 영적 단순성이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더 깊은 영적 성숙으로 나아가기 위해 그것을 사용했듯이, 오늘 말씀의 주제가 되는 <영적 고독>도 고독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 더 깊은 영적 성숙으로 나아가는 소중한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고독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그 내면적 외로움의 실체를 직면하면서 하나님과의 더 깊은 교제 안으로 들어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먼저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와서 자신이 그분을 따르겠다고 용감하게 선언하는 것을 봅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v. 19)라고 말입니다. 사실 복음서에서 이처럼 자신이 먼저 주님을 따르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온 사람은 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반응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v. 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주님은 이런 적극적으로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의 의욕을 저하시킬 것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주석가 ‘매튜헨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째), 그는 ‘성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님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어느 순간 충동적으로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섰다는 것입니다. 둘째), ‘주님은 자신의 삶을 드러내 보이시며 그의 진심을 시험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자신은 머리 둘곳조차 없음’을 그에게 드러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왜 주님은 이런 머리 둘곳조차 없는 힘들고 정처없는 삶을 사신 것일까요? 그분이 능력이 부족하셔서일까요? 아니면 그분의 존재가 영광스럽지 않기 때문일까요? 그렇치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영원토록 성부 하나님과 하나 되시며,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영광과 권능의 성자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겪으셨던 삶은 사람들에게 대접받고 편안한 휴식처를 제공받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 손에 못이 박힐 만큼 삶의 질고를 지셨고, 마지막 3년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오늘 말씀처럼 머리 둘곳조차 없는 힘들고 고독한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은 이런 자신의 삶을 그에게 드러내 보이시며 ‘그래도 따라오겠느냐?’ ‘너는 나를 따르는 제자로서 댓가를 지불할 준비가 되어있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그 서기관의 결심은 탐욕스런 동기에서 나온 것이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예수께서 많은 기적의 능력으로 병고침과 권능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주님을 따르게 될 때 큰 부를 누릴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게 될 때 얼마 안가서 많은 보수를 받고 큰 재산을 모으게 될 것이라는 탐욕적인 기대를 하고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어찌됐건 주께서 말씀하신 후에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주님을 계속해서 따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 가운데 보여주신 주님의 삶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그분을 믿고 따르는 제자된 우리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저는 먼저 오늘 메시지의 제목인 ‘고독’에 대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우리 <한글사전>에서 보면, ‘고독’은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이고, 그와 비슷한 단어인 ‘외로움’은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실 ‘고독’이나 ‘외로움’ 이라는 두 단어 모두 비슷한 느낌입니다.

그런데 <영어사전>에서 고독에 해당하는 ‘solitude’ 와 ‘loneliness’는 비슷한 내용도 있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solitude’라는 단어가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자 있어서 편안하고 평온한 상태를 의미>하는 표현으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미국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문학가였던 ‘헨리 데이빗 소로’ (Henry David Thoreau)의 대표작의 하나인 <숲 속의 생활> (Walden)이라는 작품에 그것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 작품안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She longed for peace and solitude” (그녀는 평화와 고독을 열망했다) 여기서 소로는 ‘solitude’를 ‘외롭고 쓸쓸 하다기보다는, 편안하고 평온한 상태로 묘사’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제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우리 성도들의 삶에서 특별히 왜 고독의 시간은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영적 고독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요?” (Why do we need times of the spiritual solitude?) 그것은,

첫째, ‘외로움의 실체를 직시할 수 있기 때문’ (Because we may face realities of our loneliness)입니다: 왜 우리는 홀로 있는 고독의 시간을 회피하고자 하고, 힘들어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의 중심에는 우리 스스로가 아직까지 우리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요!? 나의 약한 모습, 나의 감추고 싶은 모습, 여전히 벗어 버리지 못한 스스로 마음에 들지 못한 나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예상하듯이 고요하게 홀로 있는 고독의 시간만큼 우리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런 나 자신과의 만남을 꺼려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그 중심에는 내가 나를 새롭게 발견함으로 인해 내가 치뤄야 하는 ‘변화의 아픔’ (=성장통/ growing pain)을 원치 때문은 아닐까요?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 <영적 발돋움>에서 이렇게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뿌리깊은 고통의 원인인 외로움으로부터 영적 고독으로의 전환이 필요함을 주장했습니다. “외로움은 가장 보편적인 인간적 경험이다.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는 우리에게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오늘날 외로움은 가장 보편적인 인간적 고통의 근원 중의 하나다. 날로 늘어가는 자살, 알코올 중독, 약물중독, 두통이나 위장병과 같은 정신작용에 의한 증상들이 거론될 때마다 정신과 의사들은 외로움이 이런 증후군의 주요원인이라고 말한다. 외로움의 뿌리는 매우 깊어서 낙관적인 설득, 모조품 사랑, 사교모임으로는 결코 치유될 수 없다. 가장 근원적인 인간의 외로움이 우리를 항상 위협하며 우리는 그 외로움을 참으로 대면하기 싫어한다. 흔히 혼자 있게 되는 상황을 피하고자 갖은 노력을 우리는 다한다. 일, 친구, 책, 음악, TV가 없을 때 우리는 홀로 있게 되고 근원적인 인간의 외로움을 가장 잘 느끼게 된다. 그 외로움을 맛보는 것이 두려워서 다시 바빠지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하고,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다고 믿기 위해 게임을 계속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나우웬은 영적 고독의 필요성을 깊이 있게 설명하고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이 고독 속에서 깨어 있음이다 ~ 외로움으로부터 고독으로의 전환운동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의 존재에 이를 수가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위대한 치유의 힘, 즉 우리의 개인적인 치유의 경험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과 공유하게 되는 치유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라고. 성도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있는 외로움의 실체를 직시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아직도 여전히 홀로 있는 시간을 회피하고 두려워하지는 않습니까?

둘째, ‘삶의 우선순위를 깨닫기 때문’ (Because we may realize about the priority of life)입니다: 복음서에서 보면, 우리 주님께서 항상 생활의 습관으로 행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시고 병든 자를 치유하시는 그 바쁜 일상 속에서도 날마다 조용한 곳에 가셔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시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오천명을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먹이신 후에 그 바쁜 가운데 따로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따로 산에 올라 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셨다)” (마. 14:33)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귀신들린 자와 각색 병든 자를 고치시고 난 다음날도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막. 1:35)라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일상적으로 이른 새벽에 홀로 조용히 묵상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고요한 시간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막. 1:38)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홀로 있는 시간 가운데 이 마을 뿐 아니라, 다른 마을에서도 생명의 복음과 치유의 은혜가 주어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주시요, 우리의 목자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이 되셔서 날마다 홀로 고요한 시간을 가지셨다면, 하물며 그를 믿고 따르며 영적으로 부족함이 많은 우리는 얼마나 더욱 이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요?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잠시 언급했듯이, 영적 고독을 우리 성도들이 훈련하는 것은 고독자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우리가 영적으로 더욱 성숙해 나감을 이해하게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영적 고독의 목적은 ‘영적으로 비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번거로운 환경과 복잡한 인간관계의 장애물을 벗어나 조용히 홀로 고독 가운데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단순히 비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새롭게 채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의 중요성을 잘 설명해 주는 말씀으로 우리 주님은 <더러운 귀신 걸려던 자>에 대해 비유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마. 12:43~45)라고.

주님은 이 비유의 말씀에서 우리의 마음이 깨끗이 청소만 하고 비어져 있을 때, 더 악한 일곱 귀신이 들어와 그의 상태가 훨씬 나빠질 것임을 분명히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목표가 우리의 노력을 통해 욕심과 미움과 육신에 속한 정욕을 비우는 것일 때, 어느 순간 악한 영은 우리를 장악하여 영적으로 그전보다도 더욱 악화된 상태로 떨어트릴 것임을 강하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채울까요? 그것은 성령의 은혜로 채우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성도를 도우시는 성령님의 충만하신 은혜로 우리의 영이 가득차게 될 때만 원수 마귀가 또 다시 우리를 사로잡고 통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요함의 훈련은 성령님의 가장 심오한 훈련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고독의 훈련은 때로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과하기도 한다’고 우리의 신실한 믿음의 선배들은 조언합니다. 그 영혼의 어두운 밤은 비록 ‘메마르고 침울하며, 길을 잃는 것과 같은 느낌’을 우리 성도가 경험할 수 있으나 결코 이 시간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 시간을 통과하라고 신실한 성도들은 우리에게 조언합니다. 왜냐하면, 이 밤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시거나 괴롭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자 함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발견하며 더 큰 평화와 자유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자 함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세밀하게 자신을 성찰하며, 나를 얽매고 구속했던 세상의 헛된 것들을 분명히 파악하며 점점 더 그것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홀로 고요한 시간을 가지는 중요한 가치임을 여러분은 이해하십니까?

셋째,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할 수 있기 때문’ (Because we may communicate with God deeply)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우리 믿는 자들이 영적 고독을 연습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런 영적으로 홀로서는 고독의 훈련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더욱 깊고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대표적인 영성가인 ‘리차드 포스터’는 “세상의 소음이 멈출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라고 짧지만, 고요한 시간이 주는 본질적 유익이 무엇인지를 잘 설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떠나서 홀로 시간을 갖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고독 자체만을 위함도, 또한 자기 성찰이 최종 목표도 아니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보다 더 잘 듣기 위함인 것입니다. 구약의 열왕기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명하셔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고 명하십니다. 그가 섰을 때,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으셨고, 바람후에 지진이 흔들렸지만 그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왕상. 19:12) 하나님은 크고 강한 바람 가운데도, 바람 후 지진에도, 지진 후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아니하시고, 불 후에 오직 세미한 음성으로 임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놀랍고도 세밀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역사하시는 방법의 하나임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우리의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수천년 전에 그의 택한 능력의 종 엘리야에게 만이 아니라, 지금도 수없이 많은 그의 자녀에게 홀로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홀로 만나 주시되 광풍과 지진과 불 가운데서가 아니라, 미세한 음성으로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바로 고요한 가운데 마음 속 깊은 곳에 귀를 기울이며, 오직 그분을 열심히 찾는 그의 자녀들을 만나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 좋으신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 안으로 점점 더 가까이 들어 가고 있습니까? 그런 깊은 관계 안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혼자 있는 시간을 힘들어 하거나 부담스러워 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아직도 홀로 영적 고독의 훈련을 한다는 것이 중세의 수도사들이나 특별한 금식 기간에 행하는 자신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지는 않습니까?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런 홀로 있는 고요한 시간 가운데 행하는 영적 고독의 훈련은 우리 신앙의 기초적이고도 본질적인 영적 유익과 성숙을 가져 주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 고독의 훈련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더 깊은 사귐 안으로 들어가고, 자신의 모습을 더욱 성찰해 나감으로 아름답게 성장해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