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10, 2017

“아침마다 새로우니” (New every morning)

Preacher:
Series:
Passage: 예레미야애가 (Lamentations) 3:20~23
Service Type:

아침마다 새로우니”

(New every morning)

9-10-17

본문말씀: 예레미야애가 (Lamentations) 3:20~23

20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I well remember them, and my soul is downcast within me)

21 중심에 회상한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Yet this I call to mind and therefore I have hope:)

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Because of the Lord’s great love we are not consumed, for His compassions never fail)

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They are new every morning; great is your faithfulness)

 

<론>

                저는 오래전에 유대인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플랭클’ 박사가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죽음의 수용소’ (원제목; ‘인간의 의미찾기’/ Man’s searching for meaning) 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플랭클박사는 이 책을 통해 단순히 죽음의 공포에서 살아남았다는 경험을 넘어서서, ‘인간이 살아갈수 있는 생의 의미’ 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본질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그는 ‘의미 치료’ (로고테라피) 라는 치료법을 발전 시켰습니다. 저는 특별히 청년사역을 하면서, ‘삶의 의미’ (the meaning of life) 를 발견하고 지켜나가는 것이 얼마나 청년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인지를 절감 합니다.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본질을 누구보다 잘 아시기에 “ ~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 (. 8:3) 고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허무와 무의미함으로 침체시키고 좌절시키는 모든 세상의 가치관 (=풍조) 과 악한 영들의 영향력과 싸워 이겨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생명과 소망으로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 합니다.

 

<론>

                오늘 본문의 ‘예례미야애가’ 의 주제는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인한 예레미야의 슬픔의 노래’ 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슬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레미야의 탄식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그의 긍휼하심을 의지하고 경험한 가운데 오는 희망의 메세지’ 가 그 주제인 것 입니다. 이러한 ‘죄에 대한 탄식과 회개와 더불어 하나님만이 주실수 있는 참소망의 메세지’ 는 예레미야 애가뿐 아니라, 모든 신구약 성경의 주제임을 우리는 잘 이해할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인한 조국, 이스라엘의 무참한 멸망을 한없이 슬퍼하고, 자기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로 고백하며 탄식하고 회개하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이런 회개함을 통해 선하심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회개하는 심령속에, 그분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바라는 자녀의 심령속에 주시는 ‘새로운 소망의 충만함’ 을 모든 성경 속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희망에 가득찬 노래> 가 되어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v.22,23) 라고.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빅터 플랭클’ 박사가 질문한 ‘우리 인간이 삶을 살고자 하는 생의 의미와 의지는 어디에서 부터 오는 것일까요?’ ‘왜 우리 인간은 가장 힘들고 극심한 고통의 상황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데, 오늘날 더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상황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며, 심지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극단적인 불행한 선택을 하는 것 일까요?’ 물론, 이런 삶에 대한 이런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마디로 정의 하기 힘들고, 너무도 다양한 해석이 나올수 있음을 저는 잘 압니다. 그러나, 저는 ‘인간의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다는 것’ 은 결국 우리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결코 발견할수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 인간의 삶 (=생) 의 이유가 있기 때문 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 인간의 삶의 궁극적인 의미일까요?’

첫째, ‘ 삶은 우연의 산물이 아님을 아는 입니다: ‘내 삶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그의 놀라운 능력과 기쁘신 뜻 가운데 창조 하셨음을 믿는다’ 는 뜻 입니다. 세상의 부귀와 영광을 한몸에 입고 살았던 솔로몬왕은 전도서를 쓰면서, “ ~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전. 1:2,3) 라고 인생의 덧없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헛됨을 본질적으로 우리 인간의 삶이 의미없고 가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날때 그러하다고 그는 분명히 지적하고 있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은 전도서를 마무리 하면서 결론을 맺고 있기 때문 입니다; 일의 결국을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 12:13) 고. 우리의 존재하는 이 삶이 허무하거나 의미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삶이 결국 허무하고 무의미한 삶이 된다는 것 입니다. 생명이신 하나님, 그 선함과 사랑으로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과 분리될때 우리 인생은 황폐화되고 무가치해 질수 밖에 없는 것 입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 마음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 11:8) 라고 호세아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타락한 그의 백성을 향한 사랑을 외치십니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여인이 어찌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아들을 긍훌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것이라” (. 49:15) 고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참된 사랑을 선포하십니다. 젖먹이는 어미는 그 태에서 난 자식을 잊을찌라도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도 않으시고, 포기하지도 않으신다고 선언하는 것 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문학가이자 신실한 크리스챤인, 톨스토이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그의 책에서 <사람은 그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산다> 고 결론 맺은 이유일 것 입니다. 부모는 나를 버릴찌라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영접해 주신다’ (. 27:10) 고 다윗은 고난 가운데 고백 했습니다. 나는 버려진 존재가 아닙니다. 쓸모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어쩌다가 잘못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보배롭고 존귀한 지극히 사랑받는 자녀인 것 입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이 사랑을 경험 하십니까?

둘째,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입니다: 왜 그리스도 예수 밖에는 인생의 참된 의미가 없는 것 일까요? 그 이유는 ‘만약 여러분과 제가 성경의 온전한 메세지를 점점 더 이해하게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어떤 인생의 의미도 소망도 없다’ 고 이해하게 될것이기 때문 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이 땅에 보내신 그분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 를 우리가 믿지 않을때 우리는 참된 생명을 누릴수 없기 때문 입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지 않고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수 없고, 죄의 심판을 면할수 없는 것 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자는 멸망하게 된다고 성경은 분명히 선언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요. 3:16). 따라서 멸망하는 자에게는 삶의 의미도 소망도 없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있을까요?’; 저는 이것을 좀더 큰 그림에서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향한 놀라운 계획과 은혜를 성령의 감동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주시되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이니” (. 1:3~5) 라고. 여기서 사도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는 것이 그분의 피를 통해 과거의 아담으로 부터 물려받은 죄로 부터 씻음 받았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 내가 구원 받았지만 현재와 미래의 내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또 다시 ‘죄와 죽음’에 사로잡히지 않고 완전히 자유케 하는 구원을 하나님께서 계획 하셨다는 사실 입니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 입니다. 첫사람, 아담이 창조되기도 전에,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에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완전한 구원’ 인 것 입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99% 가 이니라, 100% 확실한 구원이라는 것 입니다. 결코 취소될수 없고, 결코 바뀔수 없는 구원인 것 입니다. 바로 우리의 영원한 바위요, 구원의 생수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말 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쉼을 얻고, 생명의 기쁨을 날마다 누리고 있습니까?

셋째, ‘그리스도의 , 성령이 충만하게 도우시는 입니다: 성령님에 대해 나눌적마다 제가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성령님을 잘못 오해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 입니다. 세상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들 까지도 말입니다. 과연 ‘성령님은 누구 일까요?’; 먼저 저는 성령에 대해 우리들이 오해하는 ‘3가지 부정적인 원인’ 을 집어보고자 합니다. 1) 많은 성도들이 ‘성령님을 성경말씀에 기초하지 않고 주관적 경험과 판단으로 이해 하고자' 하기 때문 입니다. 2)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충만’ 을 혼돈하기 때문 입니다. 3) ‘성령님의 절대적인 우리 성도들에 대한 영향력’ 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 이 <3번째> 성령에 대한 오해는 “오늘날도 왜 수없이 많은 크리스챤들이 삶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불평과 불만과 불안한 삶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가?” 라는 문제의 핵심적인 대답이기도 합니다. 바로 ‘성령의 도우심과 통치하심을 구하지 않고, 성령께 순종하지 않기 때문’ 인것 입니다. 내가 만일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인도하심과 은혜가 없다면 나는 결코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가 어떻게 ‘죄와 사망’ 으로 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빛된 자녀가 된지를 결코 이해할수도, 확신할수도 없는 것 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8장> 에서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영,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 (롬. 8:14) 는 것과 ‘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임을 확신하는 양자의 영을 성령을 통해 받게 되었다 (롬. 8:15,16) 고 놀라운 선언을 하는 이유인 것 입니다. 바로 성령님이 나에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해 주시고, 그 영광스러운 신분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시는 것 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성령님을 통해 우리 죽을 몸까지도 살림을 받음으로 (롬. 8:11) 우리 크리스챤의 완전한 영화에 이르기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 입니다. 이런 성경의 성령님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우리에게 무엇을 깨우쳐 줍니까? 그것은 성삼위의 ‘3번째 위격’ 해당하는 거룩한 ‘성령 하나님’ 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적 출생을 하는 ‘거듭남’ 에서 뿐 아니라, 거듭난 성도가 ‘성화’ 되고 ‘완전한 영화’ 의 몸을 입기까지 모든 성도의 삶에서 절대적인 도우심으로 그것을 가능하게 이끌어 가시는 주체가 되신다는 사실 입니다. 이미 거듭난 성도라 할찌라도 점점더 장성한 분량으로 커나가는 성화와 언젠가 완전한 영화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성도의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주체는 바로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 이라는 것 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사역의 핵심이자 중요성인 것 입니다. 이것이 왜 성령님의 성도의 삶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지를 설명하는 가장 큰 이유인 것 입니다. 성령님은 거듭난 성도가 영적으로 태어나면서 부터 완전한 미래의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삶의 ‘보혜사’ (The Helper) 시요, 주체가 되셔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끝까지 인도해 가시는 것 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한 은혜와 다스림’ 을 받지 못할때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성령님만이 주실수 있는 ‘죄와 사망에서 해방’ 됨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 의 대한 확신과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고 불평과 불만과 인생의 무의미함 가운데 고통하는 안타까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충만한 성령의 통치하심은 예수 믿었다고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바른 말씀의 기초 위에서, 성령님을 점점 더 신뢰하고 그를 사모하고 그분께 순종함을 통해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그의 뜻 가운데 누리게 되는 것 입니다. 성령님은 그를 믿고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충만한 은혜로 참된 삶의 의미를 풍성하게 누리도룩 허락 하시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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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살아가는 하루 하루가 즐겁습니까? 기쁘고 감사 합니까? 하나님만이 주시는 삶의 이유를 발견하고, 그분 안에서 참된 안식과 평화를 날마다 누리십니까? 아니면, ‘불안과 불만과 염려’ 가운데 삶의 의미를 아직도 발견하지 못하고 하루 하루 고통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인간의 진정한 삶의 의미와 가치는 오직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 안에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너는 내 아들이라, 너는 내 딸이라’ 불러 주시고, 선언하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성령님의 충만한 도우심으로 누리시길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그의 자녀를 향한 끊을수 없는 사랑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날마다 충만히 인격적으로 누려 나갈때, 나는 비로소 ‘내 존재의 가치와 의미’ 를 더 깊고 넓게 깨닫게 될것 입니다. 바라건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세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그의 영광된 아들과 딸로 삼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충만한 다스리심을 통해 날마다 넘쳐나는 삶 사시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원 합니다. 그때, 여러분은 비로소 ‘말할수 없는 자녀의 영광과 생명의 충만한 의미를 깨닫고’ 기쁨과 감격과 감사로 우리 아버지께 영광과 찬양을 영원토록 올리게 될 것 입니다. 이런 영광된 성도 여러분의 삶 모두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