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4, 2018

“야곱과 에서” (Jacob and Esau)

Preacher:
Passage: 창세기 (Genesis) 25:31~34
Service Type:

“야곱과 에서”

(Jacob and Esau)

3-4-18

본문말씀: 창세기 25:31~34

31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32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 하리요

33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서 론>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야곱과 에서’ 라는 제목으로 성도 여러분과 은혜의 시간 가지길 원합니다. 성경에서 보면,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자라났지만 극명하게 두 사람의 운명이 나누어진 대표적인 사람이 ‘야곱과 에서’ 임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야곱과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무엇인지? 무엇이 이들의 삶을, 아니 이들의 후손들의 삶까지도 극명하게 갈라지게 했는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시기 위함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떤 모습의 삶을 살아 왔습니까? 야곱과 같은 삶 입니까? 아니면 에서와 같은 삶 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어떻게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녀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었으며, 믿음의 조상으로 설수 있었는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야곱과 같이 선하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더욱 더 눈뜨는 시간 되기 원합니다. 반면에 세상의 것을 추구한 에서의 삶이 얼마나 허망하고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닫을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통해 돈도 권력도, 세상의 어떤 쾌락과 명예도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택하심과 그의 자녀가 되는 축복과는 비교할수 없음에 대한 영적인 깨닫음 가운데 소망과 감사가 넘치는 삶 사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본 론>

            저는 먼저 말씀을 시작 하면서 한가지 분명히 밝혀두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위 야곱은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그의 끝이 좋게 끝났음으로 그가 하는 행동은 다 좋은 쪽으로 해석하자. 그리고 에서는 하나님께 책망을 받았으니까 그의 행동은 하나도 가치가 없고 나쁜 것이다는 식의 해석’ 은 한마디로 잘못된 평가라는 사실 입니다. 이것은 에서에게 있어서도 잘못된 평가일 뿐 아니라, 또한 야곱을 옳바르게 이해하는데도 결코 도움이 되지않는 부적절한 평가이기 때문 입니다. 특히, 야곱을 이해함에 있어서 ‘덮어주기 식’의 일방적 합리화는 잘못된 결론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의 신앙적 삶에도 결코 유익하지 않기 때문 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가능한 그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이 모든것을 통하여 우리의 중심되신 하나님의 평가는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서 결론에 도달하기를 원 합니다.

먼저, 야곱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졸졸 따라 다니며 자라났고, 형 에서처럼 들로 나가 짐승을 사냥하는 외향적인 기질이 아니라 내성적이고 엄마의 영향력 아래 자라났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형의 뒷발꿈치를 잡고 태어난 그의 첫 출생에서도 알수 있드시 형, 에서의 ‘장자권’ 을 갖고자 온갖 권모술수를 다 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하자면, 먼저 어머니 리브가로 부터 그 장자권이 의미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누누히 듣게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이런 당장 손에 잡히지 않고 상당히 상징적이고 영적인 장자권을 갖고자 열망했다는 것은 결국 그 장자권의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관심이 그의 삶을 강하게 사로잡고 있었다는 점도 이해할수가 있는 것 입니다.

그러나, 그런 긍정적인 점이 있다고 해서 엄마 리브가와 한 팀이 되서 형과 아빠 이삭을 속이고 장자권을 빼앗는 다는 것이 합리화 될수는 없을 것 입니다. 이런 방법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방법이 아님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수 있는 것 입니다. 특히, 야곱의 이런 ‘빼앗고 움겨잡는 야망’, 그것이 아무리 ‘영적이고 가치있는 것’ 이라 할찌라도 그가 그것을 얻고자 하는 ‘과정’ 이 선하지 못할때 그의 행동은 반드시 비판 받아 마땅하다고 저는 이해하는 것 입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그런 삶을 본 받거나 따라 해선 않되는 것 입니다. 무턱데고 야곱은 결국 하나님의 택한 자녀가 되었으니까 그의 실수와 잘못은 적당히 무모화 하고 넘어가도 된다는 식은 바람직 하지가 않다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이런 속여 빼앗는 인간적인 방법으로의 장자권 획득을 하게 됨으로서 그는 결국 사랑하는 어머니와 살아 생전에 다시는 보지 못하는 현실적인 엄중한 댓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그리고 형을 피해 도망간 외삼촌 라반집에서 20년 동안 톡톡하게 그 빚을 갚아야 하는 혹독한 훈련을 겪게 됨을 보게 됩니다. 또한 형을 피해 살았던 20년의 기간동안 언제나 형에게 의해 죽을것 같은 죽음의 공포 가운데 시달려야 했던 것 입니다. 잠언에 보면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잠언 28:1) 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형을 속여 장자권을 빼앗은 댓가로 이 잠언의 말씀과 같이 그는 형이 쫓아 오지도 않는데 끊임없이 불안해 하고 심적으로 도망 다녔던 것 입니다. 한마디로, 그 잘못된 야망과 그의 철없는 인격으로 인해 그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징계’ 라는 혹독한 훈련의 과정을 겪게 되는 것 입니다.

반면, 에서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먼저 긍정적으로 보면 사내답고 활달하였습니다. 그는 들로 나가 짐승을 사냥해 왔습니다. 아버지 이삭도 그가 사냥하여 잡아온 고기로 요리한 것을 먹기 원했습니다. 그는 야곱보다 훨씬 화통해서 꽁하게 마음에 품고 있지를 못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야곱이 20년간 형을 피해 밧담아람으로 피했다가 다시 형을 만나러 갈때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듣고는 야곱은 자기를 죽이고자 함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그의 오산임을 알수 있는 것 입니다. 에서는 동생 야곱에게 속아서 자신이 받아야 할 ‘아버지로 부터의 <장자축복>을 그가 가로챈 것’ 이 분하고 괘심해 한것은 사실 이었지만, 에서는 처음부터 이 ‘장자권’에 대해 별 관심도 없었고 미련도 없었습니다. 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그것을 잊어버리고, 20년만에 동생 야곱이 돌아왔다는 말에 그는 기뻐서 자신의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 온 것이 훨씬 합리적 추측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실제로 <창. 33장>에서 야곱이 에서를 만났을때 야곱을 죽이고자 복수심에 이를 갈다가 갑자기 그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어떤 흔적을 찾을수 없습니다. 그는 이미 ‘장자권’사건을 까마득히 잊었던 것 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그는 ‘쿨한 남자’ 인 것 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에서의 긍정적인 성품 중에서 그의 치명적인 부정적인 문제점을 찾아보게 됩니다. 아니 성경은 그것을 준엄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그것은 무엇 입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되듯이 에서가 ‘쿨하게 자신에게 허락된 장자권을 팥죽 한그릇에 야곱에게 팔았다’ 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망령된 행동인가를 엄중하게 책망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어디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것을 신약의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히. 12:16) 히브리서기자는 에서가 동생 야곱에게 장자권을 판 사건을 통해 그를 ‘망령된 자’ 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 ‘망령된 자’ 라는 단어를 <현대인의 성경> 에서는 ‘불신앙의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진정한 저자, 하나님은 에서의 삶의 본질적인 문제점은 ‘그가 쿨한 성격의  사람이기 때문도 아니요, 어릴적 한번 장자권을 판 어리석은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도 아니요’, 바로 그의 평생의 삶은 일관되게 하나님만이 주실수 있는 ‘진정한 축복’ 을 관심 갖지도, 소원 하지도 않았다는 것 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정한 복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원한것은 현실적인 복 이었습니다. 그는 야곱이 없는 동안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야곱의 몫까지 몽땅 물려 받은 물질적인 유산과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출세 (400명의 군사를 거느릴 정도의…) 로 이미 만족한 것 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언제 받게 될지도 모를 영적인 축복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 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치명적인 문제점이요 불행의 시작과 끝임을 성경은 고발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하는 것은 어떻게 야곱은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을 누리게 되었는가? 하는 것 입니다. 그것은,야곱이

첫째, ‘장자권을 귀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무엇보다도 야곱은 장자권을 귀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 장자권을 통해 하나님이 주실 은혜를 고대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장자권은 무엇일까요? 바로 ‘팥죽 한그릇에 에서가 야곱에게 판 장자권’ 말 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의 상황에서 이해하자면, 첫째) 장자는 하나님께 드려진 아들이 되는 것이요, 둘째) 장자는 다른 형제들보다 부모의 유산을 한몫을 더 받게 되는 권리를 가지고, 셋째)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조상으로서의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특권이 바로 장자권의 의미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에게 적용해 볼때 ‘장자권’ 은 사도요한이 선언한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요. 1:12) 요, 사도바울이 <롬. 8장> 에서 선언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요, 그분의 후사’ (롬. 8:16,17) 가 되었다는 뜻일 것 입니다. 지난번에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후사’ 라는 말은 ‘그분의 상속자 (heir)’ 라는 뜻이요, 이것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어 하나님께 속한 모든 유업과 영광을 누리게 된다’ (롬. 8:17) 는 뜻 임을 살펴 보았습니다.

제가 이 시점에서 여러분께 한가지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방금 말씀드린 ‘장자권’을 사모하고 야곱처럼 간절히 가지기를 소원 합니까? 아니면, 에서처럼 별 관심없이 팔아도 상관 없습니까?” ‘장자권 받았다고 밥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고 별 신경쓰지 않습니까? 저는 지금 이 순간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영적 눈을 열어 주셔서 야곱이 받은 하나님의 장자권이 얼마나 소중하고 축복된 것인지를 깨닫을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 합니다. 그리고, 에서가 그것을 팥죽 한그릇에 판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불행한 것인지를 성령의 은혜로 이해할수 있기를 원합니다.

둘째, ‘하나님께 끝까지 매달렸습니다’: 야곱의 움켜잡고 빼앗는 삶이 이제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을 깨닫고 그분의 복을 누리고 계승하는 신앙의 조상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바로 ‘창세기 32장’ 에 나오는 얍복강가의 사건 입니다. 그 사건을 창세기 저자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 ” (창세기 32:24,25). 창세기 저자는 ‘어떤 사람’을 ‘천사’ 라고도 하고, 또한 ‘하나님 자신’이라고도 묘사하는데, 이런 존재가 ‘야곱을 이기지 못했다’고 이 상황을 설명하고 있음은 매우 흥미로운 것 입니다. 어떻게 천사가 인간과 씨름해서 질수가 있을까요? 더욱이 하나님께서 말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너에게 졌다’ 라고 인정해 주신다는 것 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창세기의 ‘야곱이 어떤 사람과 밤새도록 씨름’ 한 사건을 많은 신학자들은 ‘그가 밤새도록 죽을것 같은 처절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로 매달린 것이다’ 고 해석 합니다. 밤새 야곱이 철야기도를 했는지 어떤지 정확히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알수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는 하나님께 끝까지 매어 달렸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내가 졌다’ 라고 인정해 주실때까지 말 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간절함과 끝까지 간구하는 믿음이 있습니까?

이런 하나님만이 주실수 있는 진정한 복을 누릴수 있는 자가 취할 행동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 가장 잘 비유로 설명해시고 도전하신 것이 ‘밭에 감추인 보화’ 라고 저는 이해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마. 13:44) 고. 여기서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도전과 격려는 ‘우리 모두가 원하는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여부는 엄청나게 값비싼 보화를 발견할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졌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 이라는 것 입니다.값진 보화를, 값진 진주를 발견하여 분별할수 있는 영적 눈이 있는가?! 라고 주님은 도전하시는 것 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야곱과 에서의 삶을 극명하게 갈라지게 한 실체’ 라고 믿습니다. 아니, 야곱과 에서 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과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지 못하는 자들의 삶의 모습임을 믿습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 거듭난 자가 들어가게 될 천국을 매우 적극적으로 쟁취하는 자만이 얻을수 있는 것으로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음을 봅니다;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략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침략하는 사람이 그 나라를 빼앗는다” (마태복음 11:12) 천국은  감나무 밑에 가만히 누워서 감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자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온 힘을 다해 돌진하여 들어가서 빼앗는 자가 소유하는 것이라고 말 입니다. 바로 야곱은 과거의 세상적 야망과 욕심은 모두 내려 놓고, 이제 겸손과 간절함으로 ‘침략하여 빼앗듯이’ 하나님께 끝까지 매달린 것 입니다.

셋째, ‘하나님만이 진정한 축복을 주실분임을 믿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데로 <창. 32장> 에서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했고, 철저하게 그분께 매달렸습니다. 왜일까요?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복을 주실수 있는 분임을 그는 믿었기 때문 입니다. 제가 이미 앞에서 설명드린데로 사실 에서는 야곱에 대한 원한의 감정이, 장자권에 대한 미련도 전혀 없었기에 그를 죽일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스스로 형이 자신을 죽일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형이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 이유는 필경 자신을 죽이고자 함이라고 생각했다는 것 입니다. 자, 그렇다면 제가 한가지 질문하고 싶은 것은, 야곱의 입장에서 볼때 ‘이제 날이 새면 형이 달려와서 자신을 죽일 것인데, 도데체 무슨 축복을 하나님으로 부터 더 받기 원한것인가?’ 하는 것 입니다.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세기 32:26) 야곱은 하나님께서 지금 자신을 축복하여 주시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다고 결사로 매달린 것 입니다. 이런 그의 태도에서 이해할수 있는 점이 2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야곱은 이 순간 자신이 평생을 통해 쟁취한 모든 것들은 진정한 축복이 아니다는 것을 깨닫았다는 점 입니다. 그리고, 둘째 이 축복을 주실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라고 확신 했다는 점 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을 야곱에게 그 얍복강가에서 새벽동이 틀 무렵 허락하신 것 일까요? 그가 깨닫은 진정한 축복, 하나님만이 주실수 있는 축복을 말 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형에게서 지켜 주겠다는, 생명을 지켜 주겠다는 어떤 확신 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해석에 반대 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축복이라면 사도 바울과 수없이 많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순교는, 아니 오늘날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생명을 바친 진정한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진정으로 축복하지 않으셨다는 말 입니까? 그 축복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분명히 밝혀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바꿔 주셨다는 것 입니다. 바로 평생을 움켜잡고 빼앗는 자, ‘야곱’ 에서 ‘이스라엘’ 로. 즉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 혹은 ‘하나님의 황태자’ 라는 뜻의 이스라엘로 말 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은 단순히 야곱의 목숨을 건져 주셨다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하나님께로 받고나서 이상하리 만큼 순순히 하나님을 가게 했고, 그리고 날이 밝아 형을 만났을때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창. 33:10) 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야곱은 살기위해 형에게 지금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 입니다. 그의 내적 상태가 그렇게 변한 것 입니다. 에서가 변한 것이 아니라, 야곱이 변한 것 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그와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는 그분의 임재 (시. 23:4) 하심일 것 입니다. 이것이 그가 그토록 두려워 했던 형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만날수 있었던 이유일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찌라도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로 인해 두려워 하지 않는 참된 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결 론>

성도 여러분, 저는 지금 ‘우리가 행위로 구원 받을수 있다든지, 내가 얼마나 노력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쟁취할수 있다’ 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여러분과 저의 어두운 영적 눈을 열어 주실때, 우리는 비로소 그분을 세상 어떤 것보다 더욱 사랑하고 그를 온전히 신뢰함으로써 그가 주실 진정한 축복을 붙잡고 놓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인생이라는 것 입니다. 야곱은 끝까지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축복을 포기하지 않고 갈구했던 것 입니다. 바로 에서가 ‘쿨하게 포기하고, 한그릇 팥죽에 팔아버린 장자권, 그리고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던 ‘하나님의 장자권’을’ 말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돈과 명예와 쾌락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이 시간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은혜로 세상의 돈과 명예와 쾌락은 얼마나 허망한 것임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간구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진정한 축복을 야곱과 같이 끝까지 구함으로 아버지만이 주실수 있는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되는 하늘에 속한 유업과 영광을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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