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25, 2018

“참된 안식” (The true rest)

Preacher:
Series: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11:28~30
Service Type:

“참된 안식”

(The true rest)

2-25-18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For my yoke is easy and my burden is light.)

<서 론>

저는 오늘 ‘참된 안식’ 이라는 제목으로 성도 여러분과 함께 주님이 약속하신 안식에 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우리 크리스챤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행복과 만족을 누리는 사람들은 그리 많치 않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다고 하는 크리스챤들 조차 말 입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특별히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쉼은 무엇인지?’ 하는 것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주께서 약속하신 진정한 안식은 무엇인지? 왜 우리는 그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지? 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 안에서 그분만이 주시는 참된 안식을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기도 합니다.

<본 론>

주님은 <마태복음 11장> 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시기 전에 <마. 11:25~28> 에서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어떤 감사 입니까? 그것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세상의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그의 택하신 자녀들에게는 나타내신다는 것 입니다. 그것이 무엇 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복음이요, 평화 (눅. 19:42)’ 라는 것 입니다. 주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올린것은 그 어떤 하나님의 베푸신 눈에 보이는 선물이 아니라, ‘그분의 복음과 평화’ 에 관한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복음과 그분의 평화를 세상의 지혜롭고 똑똑한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연약하고 부족할것 같지만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들에게는 나타내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임을 주님은 선언하시고, 이 놀라운 비밀과 그분의 은혜를 감사 드리고 있습니다. 이 감사는 또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성도들의 감사가 되어야 할 것 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이해하게 되는 것은 소중하고 중요한 ‘복음의 비밀’ (= 참된 보화) 은 세상의 지혜와 높아진 자들의 눈에는 가리워졌다는 점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지혜로는 자기를 알지 못하게 하시고 오히려 그들의 눈이 어리석게 보이는 전도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을 구원하려 하셨습니다” (고전. 1:21/현대인의 성경) 고 <복음의 비밀>, 즉 ‘어리석게 보이는 전도의 말씀’ 의 능력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복음과 그분의 평화’ 가 세상의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인바 되고, 그의 자녀들에게는 놀랍게 알려진바 되었다고 선언하시는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말씀 (마. 11:28~30) 의 기초인 것 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고와 무거운 짐을 내려 놓고 마음의 쉼을 얻고, 대신 주님의 가벼운 짐을 질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과 그분의 평화 안으로 들어가게 될때 가능하기 때문 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 주의 능력이 그를 믿는 자에게 참된 평화와 안식을 주신다고 주님은 지금 선언하고 또한 약속하고 계시는 것 입니다. 저는 이제 과연 주님은 어떤자들을 그의 안식으로 초청하는지?” (Whom does Jesus invite in to the His rest?) 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첫째,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 입니다: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v.28) 주님은 지금 스스로 만족해서 아무런 문제의식도 부족함도 느끼지 않는 자들을 부르고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삶에 지치고 힘들어 하는 인생들을 부르십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 가운데 고통받는 자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높아져서 자신은 죄인이 아니요 의인이라고 만족하는 바리새인을 향해 이렇게 선언 하십니다; “ ~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 9:11,13) 고 말 입니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회개할것 없는 의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스스로 높아져서 자신이 긍휼함과 용서함을 받아야 하는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기에 주님을 알수도 없고 그분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는 뜻 입니다. 그러면, 누가 주님의 긍휼과 용서를 받을수 있는 자 입니까? 바로 자신의 죄성과 연약을 정직하게 볼수 있는 자 입니다. 자신이 병든 자임을 인정할줄 아는 자 입니다. 이 죄와 육신의 무거운 짐에서 스스로 벗어날수 없음을 절감하는 자 입니다. 이런자에게 주님은 생명과 은혜로 함께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은 자신이 병든 자요, 삶의 무거운 짐 가운데 고통 받는 자임을 인정 하십니까, 깨닫으십니까? 그로 말미암아 주님께 나아가고 있습니까?그리하여 주께서 우리를 구원 하셨을뿐 아니라, 날마다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그의 은혜로 씻어 주심을 깨닫고 감사와 기쁨으로 그분께 나아가고 있습니까?

둘째,주께 배우기를 간구하는 자들” 입니다: 이사야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겸손함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에게로 나아오는 자에게 주실 은혜를 놀랍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 55:1) 고. 주님은 우리의 조건을 보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교육을 많이 받았는지, 얼마나 핸섬하고 매력적인지,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그 조건을 보지 않으십니다. 요즘 미국에서 이슈가 되고 있드시 우리의 ‘백그라운드 책업’ 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여러분과 저에게 묻으시는 것은 오직 한가지 입니다. 그것은 ‘너는 지금 목마름을 느끼고 있느냐?’ 는 것 입니다. ‘너는 지금 배고픔을 느끼느냐?’ 는 것 입니다. 육신의 갈증과 배고픔이 아니라, 영혼 깊은 곳의 갈증이요, 배고픔인 것 입니다. 주님은 등 떠밀듯이 억지로 우리를 물가로 데려가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결코 진정한 인격적 관계가 아님을 아시기 때문 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영적 각성을 원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 스스로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인간적인 조건없이, 백그라운드 책업 없이 단지 우리가 인격적으로 깨닫음으로 주님께 나아오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 되는 물가로, 진정한 기쁨과 만족의 시작인 강가로, 바로 주님 자신께로 나아오기 요구 하십니다. 왜냐하면, 돈 없이, 값 없이 포도주와 우유를 끝없이 주시기 위함 입니다.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쉬우니라” (잠. 14:6) 고 잠언의 기자는 고백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지혜는 거만하고 스스로 높아진 자는 얻지 못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비밀 입니다. 이 비밀은 오직 명철한 자가 얻을수 있는 것 입니다. 그러면 누가 명철한 자 입니까? 그는 자신이 연약한 자임을 아는 자요, 자신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갈수 있는 자요,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생명수를 마시지 못하면 영혼의 깊은 갈증 가운데 고통스러워 할수 밖에 없는 자임을 고백하는 자 인것 입니다. 이런자는 바로 주님만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 하심을 깨닫는 것 입니다. 그를 통해 주님께 배우기를 간절히 원하는 자인 것 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 겸손히 나아가 그분께 배우기를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까?

셋째,주님의 멍에를 메고 따르는 자들” 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초청하시는 자가 누구인지 마지막으로 살펴 보면서, 우리가 놓쳐서는 않되는 한가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는 그를 믿는 여러분과 저에게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v.29b) 라고 말씀 하셨다는 사실 입니다. 지금 주께서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를 따르라’ 는 것 입니다. 그러나 ‘따르되 그냥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멍에>를 메고 따르라’ 는 것 입니다. ‘멍에’ (yoke) 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소나 짐승의 목에 메어놓는 도구’ 입니다. 그것은 밭을 갈든지, 수레를 끌든지 주인의 뜻에 따라 그 짐승을 인도하고 훈련하기 위함 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그냥 ‘나를 따르라’ 고 하지 않고,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따르라’ 고 하시는 것 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는 비록 주님을 믿고 거듭난 성도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의 육신은 죄된 것을 사랑하고 악한 길로 가고자 하는 존재라는 것 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결코 선한 하나님의 뜻데로, 주님의 겸손하고 온유하심을 따르고자 원치 않는다는 것 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멍에를 메어야 하는 것 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그의 말씀과 교훈을 따르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이렇게 고발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같이 말씀 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렘. 6:16) 라고. 우리의 마음이 주의 선하신 멍에를 메지 못할때, 우리는 언제나 ‘그리로 행치 않겠나이다’ 라고 이스라엘 백성처럼 외치는 것 입니다.

만약, 여러분과 제가 진정으로 주님만이 주실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참된 안식’를, ‘참된 평화’를 누리기 원한다면 우리는 주님을 따라야만 합니다. 바로 주님의 멍에를 메고서 말 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기쁜소식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v.30) 고 우리 주께서 말씀 하셨다는 사실 입니다. 주님은 결코 거짓말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께서 그의 멍에가 쉽고 가볍다고 하셨다면 그것이 진실인 것 입니다. 물론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저는 잘 압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멍에는 여전히 부담스럽고 무겁게 느껴진다는 것이지요!? 메튜헨리는 그의 주석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성도를 위해 머리에 쓰는 면류관 뿐 아니라, 목에 씌울 멍에도 주심을 기억해야 함’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죄에 속한 육신은 결코 주님의 멍에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꺼리껴하고, 거부 합니다. 우리의 악한 본성 때문 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도전과 같이 우리가 행해야 하는 것은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을 좇는 것’ 입니다. 이것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행함으로 하는 것 입니다. 이것만이 그분께서 약속하신 ‘마음에 쉼’ 을 얻는 길임을 믿습니다. 그분께서 약속하신 참된 안식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임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주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을 좇고 있습니까?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바울은 그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왜 주님의 멍에를 지고 충성스럽게 그분을 따라야 하는지를 이렇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찌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딤전. 6:1)  라고. 그런데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실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농부들이 소에게 멍에를 씌울때 한마리만 씌우는 것이 아니라 두마리를 한쌍으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그때 그중 한마리는 노련하고 경험이 많은 소와 경험이 없고 미숙한 소를 한조로 해서 멍에를 메준다는 것 입니다. 그 이유는 경험이 많고 노련한 소가 그렇치 않은 소를 이끌어 주고 그의 짐을 가볍게 해 주고자 함 입니다. 주님은 바로 자신이 모든 수고와 짐을 우리 대신 짊어지심으로 우리의 짐을 가볍고 쉽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 하시는 것 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그의 쉽고 가벼운 멍에를 메게 하시고자 함이요, 그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게 하고자 함이요, 그로 말미암아 참된 평화와 마음의 쉼을 주시고자 함 입니다. 바로 우리의 주인되신 주님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 함으로 말 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주님의 멍에를 멜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분의 쉽고 가벼운 멍에를 멜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의 은혜와 능력’ 으로 가능할 것 입니다. 주께서 명절 끝날 선언 하신것과 같이 여러분과 제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될때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게)” (요. 7:38) 될것 입니다. 바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수’를, ‘그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요. 4:13,14) 을 마시게 될것 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누리게 되는 참된 안식과 평화인 것 입니다. 주께서 약속하신 이 안식을 모두 누리시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 합니다. 주님만이 주실수 있는, 그의 약속의 성령님 만이 주시는 진정한 평화와 만족이 여러분의 심령 깊은 곳에서 부터 날마다 더욱 충만하게 솟아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아멘. (이번주는 녹음장치 작동 미숙으로 녹음이 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