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22, 2021

“어린 아이와 같이” (Like A Little Child)

Preacher:
Passage: 누가복음 (Luke) 18:15~17
Service Type:

“어린 아이와 같이”

(Like A Little Child)

8-22-21

본문말씀: 누가복음 (Luke) 18:15~17

15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People were also bringing babies to Jesus to have Him touch them. When the disciples saw this, they rebuked them.)

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But Jesus called the children to Him and said, “Let the little children come to me, and do not hinder them, for the kingdom of God belongs to such as these.)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I tell you the truth, anyone who wi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like a little child will never enter it.”)

[설교 요약]

            우리 주님은 어느 날, 그의 제자들과 말씀을 나누시는 가운데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v.17) 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말씀하신 <어린 아이와 같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v.15) 이라고. 그런데 왜 주의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을 데려온 부모들을 꾸짖은 것일까요? 필경 그 아이들이 중요치 않고 귀찮은 존재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v.16a)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for the kingdom of God belongs to such as these) (v.16b)라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란 의미는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을 생각하면서, “왜 예수님은 우리가 어린 아이와 같아 지기를 원하시는 것인지?” (Why does Jesus want us to be like little children?) 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께서 어린이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신.구약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어린 아이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확인해 나가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민. 32:11/시. 127:3/마. 11:25~26/ 마.18:4~6). 하나님은 각별한 관심과 은혜로서 어린아이들을 지키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어린이들의 특성’ 때문입니다: 물론 어린 아이들은 순진함으로써 남에게 쉽게 속아 넘어가기 쉽고, 자기 중심적이라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가진 ‘솔직함’ (honesty)과 ‘열린 마음’ (open mind) 그리고 신실한 ‘의존성’ (dependence)은 성도와 하나님의 관계를 맺는 영적 특성이 됩니다.

            셋째, ‘예수님의 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더 큰가?’하고 서로 다투었을 때, 그들 앞에 어린아이 한 명을 세우시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18:3)고 오늘 본문과 동일한 취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겸손’ (=낮아짐) 과 ‘섬김’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를 살리신 주님 자신의 삶의 본임을 알수 있습니다 (마. 18:4~5)

바라기는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사랑하심으로 예수님의 본을 따라 겸손함과 섬김을 실천하며, 깨끗한 영혼으로 천국의 기쁨과 소망을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 주님은 어느 날, 그의 제자들과 말씀을 나누시는 가운데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v.17) 고 말입니다. 이런 주님의 말씀은 나의 영적 상태는 과연 어떠 한지를 돌아보게 하는 도전의 말씀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졌습니까?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은 ‘주께서 말씀하신 <어린 아이와 같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학자들은 본문이 포함된 <눅. 18장> 전체구조에서 살펴볼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먼저 <눅. 18:1~8>에서 주님은 ‘어떤 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탄원’하는 자세를 통해 <낙심하지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함>을 교훈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9~14절>에서는 ‘어느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서 <누가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다시 말해, ‘누구의 기도를 하나님은 받으셔서 죄 사하여 주심으로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두가지 비유를 주님은 말씀하고 나서, 오늘 본문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v.15) 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 즉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들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서 만져 주심을 바랐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대인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만져 주심을 원했던 것일까요? 물론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임하길 소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만져 주심”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전통적인 표현방식으로써 <축복하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이 그의 자녀들이 신적 은총을 받기를 소망하는 부모의 마음은 비단 유대인 부모 뿐 아니라, 모든 민족 가운데 종교심을 가진 부모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입니다. 이들 부모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의 아이들에게 부어질 하나님의 은총을 소망하여 주께로 아이들을 데려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아이들을 몰고와서 중요한 사역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방해하고 귀찮게 한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아이들을 귀찮은 대상’으로 여겼다는 것은 은연중에 아이들을 그리 대소롭지 않고 주목해야할 대상으로 보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과 같은 인권이 신장된 사회에서 조차도 어린 아이들의 존재가 제대로 존중되지 않고 무시되는 경우가 왕왕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2천여년 전의 예수님 당시에야 오죽했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해서 당시 제자들의 관점에서는 어린 아이들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중심적인 사역의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리 잡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으로 그들은 아이들을 성가시게 주께로 데려오는 그 부모들을 귀찮아 하면서 꾸짖고 나무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그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v.16) 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비유가 적절할찌는 모르겠으나, 마치 어떤 유력한 대통령후보가 많은 군중 앞에서 중요한 연설을 하고자 다급하게 가고 있는데 몇 명의 코흘리개 어린아이들이 그를 보고 달려와서 손을 잡고 놀아 달라고 졸랐을 때 주위의 보좌관들이 그 아이들을 급하게 제재하고자 했지만, 그 후보는 도리어 그 수행원들을 나무라며 그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일 뿐 아니라 그 아이들을 어깨와 양팔에 태우고 놀아주는 진풍경이 벌어진 상황이 지금 벌어졌다고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 누구보다도 사랑이 많으시고 자상하신 분이시기에, 어떤 소외된 사람이나 어린 아이들 조차도 인격적으로 대하심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주님의 가르침은 ‘왜 어린 아이들이 주께 오는 것을 금해서는 안되는 것일까?’ 하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for the kingdom of God belongs to such as these) (v.16b)라고 주님은 심각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은 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주님은 이런 놀라운 영적 진리를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v.17)고 말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한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왜 예수님은 우리가 어린 아이와 같아 지기를 원하시는 것일까요?” (Why does Jesus want us to be like little children?)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께서 어린이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아이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신.구약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나타내시고 (민. 32:11/시. 127:3/마. 18:4~6), 스스로 자신을 지혜롭고 똑똑하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복음의 비밀을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심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셨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5~26)라고.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린 아이들에게 각별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셨다는 것이 이들이 전혀 죄짓지 않는 존재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어린 아이들이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또한 어리석고 자기 중심적인 존재임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듯이 어린이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아야 하는 이유는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런 어린 아이들을 조건없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어린이들의 특성’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어린아이를 사랑하신다면 어린아이가 가진 특성은 무엇일까요? 사실 우리가 어린 아이의 기질 (=특성)을 객관적으로 살펴봤을 때 먼저 단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린이들은 <순진함>이 있습니다. 사실 ‘순수한’ (pure)과 ‘순진한’ (naïve)이라는 말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정확한 판단능력이 부족하고, 더 나아가서 남을 쉽게 믿음으로 거짓말에 잘 속아넘어가고 잘못된 가르침에 현혹되기 쉽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 10:16)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자기 중심적>입니다. 대체로 어린아이들은 남을 배려하기 보다는 자신의 것을 생각하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 아이들은 <솔직함>(honesty)이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서 적당하게 둘러대거나 포장하지 못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더 하지도 빼지도 않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이들의 솔직함을 대표적인 장점으로 말씀드리는 이유의 하나는 이것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솔직하게 그분께 고백하고 간구하는 믿음의 자세를 하나님은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열린 마음>(open mind)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상대방이 피부색깔이나, 성장배경, 교육수준이나 잘 살고 못사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편견이 없고 조건이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 마음이 맞으면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의존성> (dependence)이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는 독립성만이 인간의 장점으로 부각하고 있지만, 어린 아이가 스스로 일을 처리하겠다고 고집하는 것만큼 그 부모를 염려시키는 것이 없고 그 부모를 신뢰하고 참되게 의존하는 것이 어린 아이의 진정한 미덕임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어린 아이의 특성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성도의 관계를 돌아보게 되고, 왜 하나님은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아야 하는지를 더욱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선 <마. 18:1~5>말씀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은 그 시작이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3년반가량 함께 따라다니던 12명의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더 큰지?!’하고 서로 다투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주님은 어린이 한명을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18:3)고. 이 말씀은 오늘 본문말씀과 맥을 같이 하는 말씀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먼저,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자니라” (마. 18:4)라고.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자’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은 사실 자신의 삶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하나님 아버지와 영광을 누리며 동거하셨던 성자 하나님이신 주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자체가 자신을 지극히 낮추신 사건입니다.

다음으로 <섬김>입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 18:5)라고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영접하다’는 뜻은 ‘환영하고 잘 대접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어린아이들을 극진히 잘 섬긴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핵심이 아닐까요? 그분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셔서 이 땅에 우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뿐 아니라, 십자가에 피흘려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복종하심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여리고 약한 아버지의 택한 자녀를 섬기셨던 것입니다. 이 놀라운 섬김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핵심이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 처럼 겸손하게 낮아지실 뿐 아니라,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셔서 하나님의 어린 자녀를 섬기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영적 핵심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우리 주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v.17)고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칭찬 들지 못하고 꾸중 듣는다’거나 ‘천국가서 상급을 많이 못 받는다’ 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가장 강력한 언어로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 (마. 18:3)입니다. 더욱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심으로 성령을 통하여 깨닫게 해주신 깨끗한 영혼속에 겸손함과 섬김을 보여주신 우리 주님의 본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함과 사랑의 섬김으로 주께서 약속하신 천국의 기쁨과 소망이 넘쳐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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